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은 밭에 심겨진 겨자씨와 같다.

배가번드 2024. 9. 23.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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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세계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막연(漠然)하게 짐작하는 것과 정확히 아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지요.

본인의 영혼이 따로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가 어려운데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영생을 얻는 줄 알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요한복음 5장 39절)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신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신약은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며 예수생존당시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임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해당하는 성경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내용이 영생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을 알겠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 모두는 구약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구약의 내용이 워낙 비유와 은유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겁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가 논해야하는 이유는 잘못하면 영혼의 세계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동료수행자 한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러한 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영혼이 같지 않다는 겁니다.

코끼리의 몸체가 큰 만큼 영혼도 클 것이 분명함으로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영혼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기에 깜짝 놀라게 되었지요.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영혼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분만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목사님조차 설교시간에 이런 주장을 하는지라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기에 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식의 차이로 영혼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객체화 시키는 범위에서는 각 영혼 모두가 개별적 특성과 육신의 제한적 인식에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영혼의 크기가 다양하다는 인식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인식의 폭을 넓혀 하나님의 시각으로 조명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점에 입각하여 생각해볼 때 빛이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삼라만상 어느 곳에도 동시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경계의 벽에 갇혀 있지도 않고 관념의 틀 속에도 고정되어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혼의 크기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인식의 폭이 경계의 벽을 넘지 못한 걸로 봐야 합니다.

즉, 영혼이 성령과 하나 되지 못한 상태이며 지혜안을 완전히 연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경속의 다윗은 우리에게 잘 설명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The LORD said un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이 말씀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말씀하시는 여호와가 있고(The LORD said) 다윗의 주님이(my Lord) 따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있고 원수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다윗의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으므로 이는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원수는 성령과 반대되는 영역인 다윗육신을 비롯한 물질세상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윗의 주는 아직 성령과 하나 되지 못한 다윗의 영혼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함으로 이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며 다윗의 영혼이 육의 속성을 넘어서 성령과 하나 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영혼의 크기를 말하고 있다면 성령과 하나 된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며 좀 더 확장된 인식을 가질 때까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바 있지요.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막12: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 들과 같으니라(막12:25)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막12:26)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12:27)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영혼이 그 몸을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살아생전 성령에 대해 알고 있거나 인연을 가졌다면 성령의 영접을 받게 될 것이지만 아직도 확장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좀 더 세상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아직도 영혼이 누군가의 아내고 남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영생의 하늘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이지요.

본인 스스로가 전체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객체화된 하나님만 알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런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예문으로 올린 26절은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한 것으로 빛이신 성령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영혼과 성령과의 상관관계를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안에도 계시고 아버지인 이삭의 내면에도 거하며 아들인 야곱에게도 내재하신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육신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분이시며 빛이신 몸으로 영원 속에 거하신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전체이신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으로 형용할 수 없이 영광된 일이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하나님은 저 하늘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이 땅에도 거하시며 사람은 물론 짐승 및 뭇 생명들의 내면에도 거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내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말씀드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혼의 세계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신바 있으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14:31)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4:32)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4:33)

 

겨자는 1년생 초목으로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는 이 말씀이 비유의 가르침 이라는 사실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 왕국은 사람의 기준으로는 이해되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중의 새들은 하늘의 것을 앙망하는 구도자의 영혼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인자의 품에 안겨 성령과 하나 됨을 뜻합니다.

실지로 겨자는 기름을 짜는 풀이고 찌꺼기는 향신료로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누룩에 비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겁니다.

불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부증불감(不增不減)한다는 뜻이지요.

우리 인식의 범위에 따라 얼마든지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 영의 세계라는 것을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아직도 겨자가 나무냐 풀이냐를 두고 갑론을박 말이 많으며 예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영혼의 세계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하나님왕국으로 인도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개탄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말 하건데 영혼이 성령과 하나 되려면 경험자의 말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아래 거하는 이들만 들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