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척 착하고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타인들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합니다.
들어보면 자신이 받은 구원을 확인하고픈 마음이기도 하고 자신들과 같은 믿음의 길로 함께 갔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좋은 의도에서 하는 말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지만 나같이 영적인 체험을 한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여겨집니다.
이는 마치 사과를 먹어본 사람에게 사과 맛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사과를 직접 먹어본 것이 아니라 사과에 대해 설명해놓은 기록을 전달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먹어본 사람은 압니다.
사과에 대한 논문을 읽어본 이와 직접 먹어본 이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으며 한번 먹어본 이와 여러 번 먹어본 이의 차이점도 있습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과 맛에 대한 설명이 고정되어 있으며 유동적이지 못한 반면에 먹어본 이는 구체적이며 리얼합니다.
게다가 여러 번 먹어본 이는 사과 맛이 먹을 때마다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때에 따라서는 사과가 썩어 있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요.
아침에 먹을 때와 저녁에 먹을 때의 맛과 효능이 다르고 기분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까지 압니다.
더군다나 다른 과일까지 먹어본 이는 설명에 있어 더욱 많은 차이가 납니다.
과일의 종류가 사과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다는 점도 알아서 어느 것도 독특한 맛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기에 사과만이 최고로 맛있는 과일이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과를 먹지 않으면 죽는다거나 말라비틀어진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과를 파는 사람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본인이 사과를 팔아야함으로 어쩔 수 없이 과대선전을 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사과를 먹어보지도 않고 점검해보지도 않은 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사과 맛을 간직하고 있는지, 썩은 것은 없는지 살펴본 후에 팔아야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장사치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막8:14)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막8:15)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막8:16)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막8:17)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8:18)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막8:19)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막8:20)
And when the seven among four thousand, how many baskets full of fragments took ye up? And they said, Seven.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8:20)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do not understand?
14절에서 배(육신)에 떡(말씀=가르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진정한 가르침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과일이 있지만 과일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라는 거지요.
즉, 사람의 몸은 각기 다르게 존재하지만 성령이라는 이름하에 영혼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15절을 통해 스스로를 구별되었다 여기는 자(바리새인)들과 물질 세상에 속해진 자(헤롯=영웅의 아들)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 한 겁니다.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의 육신에서 나오는 삿되고 허황된 가르침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여 액면대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16절)
가르침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먹는 떡으로 알아들었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와 지혜 없음을 나무라고 있는데 이는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액면대로만 성경을 보려 하느냐는 말씀과도 같은 겁니다.(17절)
지혜안이 열리지 않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것을 비유로써 말씀하시고 잘 기억해보라 하십니다.(18절)
사실 이 말씀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제자들이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몰랐더라면 기억하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제자들 또한 답변을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19절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물리적인 기적이 아니라 말씀의 떡(가르침)을 먹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달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5는 은총의 숫자이고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며 4는 인자의 숫자이자 사람의 숫자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연합하여(3×4=12) 은총을 받은 이가 무수히 많았음을 비유로서 말해놓은 겁니다.
20절 역시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심을(7)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믿어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4)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른 이의 경우에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의 다음말씀을 생활에 지침(指針)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5)
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이미 수차례 말했듯이 예수께서는 내재하신 성령을 일깨우라 주문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기를 부인하고 내재하신 성령이 우리의 진짜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어린아이처럼 굴어서는 안 되며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만 합니다.
본인에게 닥치는 모든 환란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믿음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 생각하거나 내 죄를 씻어주신다 여기며 감사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 하신거지요.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다보면 어느 순간 범사에 감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재하신 성령을 인정하는 영적인 삶속에서 경험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천하를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제거당하면(lose himself, or be cast away)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했습니다.(what is a man advantaged)
물질적으로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갈곳을 모른다면 무슨소용이 있냐는 말이지요.
그만큼 영적인 길을 걷는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또한가지 알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조심해야할 것은 함부로 누군가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본인이 아직 지혜를 얻지도 못한 상태인데 누군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주어도 소용없겠지만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습니다.
성령이 드러난 이의 눈에는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하며 하나님자녀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손을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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