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인과(因果)의 세상이라 말하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Be not deceived; God is not mocked: for whatsoever a man soweth, that shall he also reap.
말은 다르지만 속뜻은 같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는다는 뜻에서 하나님은 무시당하지 않는다(God is not mocked) 했으며 모든 일이 심어놓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을 심고 거두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질러 놓았던 일들은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그러한 일들의 결과는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출21:2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출21:24)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5)
이 내용은 분명히 인과법을 말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짝을 이룬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믿는 유대교와 이슬람은 서로 전쟁을 해가며 이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며 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반대편에서 원수처럼 물어뜯고 싸우고 있는 거지요.
물론 전쟁의 원인은 다양하게 많지만 기본베이스는 종교관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볼 것은 이 내용이 모세에 의해서 3500년 전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 죄의식이 결의된 채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법이 필요했을 것이며 율법을 세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구태여 타인에게 맞은 것을 그대로 갚지 않아도 반드시 자신의 행위는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님은 다르게 말합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3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41)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
이 말씀을 실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속뜻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육에 속한 이들은 오늘은 내가 너를 때리고 내일은 네가 나를 때리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인과의 연결고리를 끊어야한다는 뜻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39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했으며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 한거지요.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은 육에 속한 이에 맞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똑같이 대응하게 되면 인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됨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이렇게 처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주어졌다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본인을 위해 좋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뭔가 내가 갚을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고 했을 때 거절을 하면 그만이겠지만 나도 모르게 빌려주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과법이 적용되었을 겁니다.
해본사람들은 알겠지만 막상 돈을 빌려주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있으며 돈을 빌려주기 싫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모두가 인과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로서 인간의 의지를 벗어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인과이고 피할 수 있다면 인과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로서 믿음의 척도를 가늠하려 들지만 무척 위험한 발상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런 사람은 스스로가 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를 때릴 테니 어디한번 참아보라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 마음에 악마가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결론에 대한 것이라 봐야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경우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 같은 경우,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으며 이 말씀을 진리로 여깁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 뭔가 불이익의 순간에 다가오면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일이 돌아왔구나 생각하고 이제는 갚았다는 생각을 하지요.
또한 과거에 그 어떠한 불이익의 순간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한 밑거름이었구나 생각하면 그 모든 일들이 용납이 됩니다.
번뇌는 보리라 했으므로 나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 사람들 모두가 영적 깨달음을 얻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로 인해 그 역할을 맡았다 여기게 되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까지 듭니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생각들입니다.
나에게 물질적 손해와 육신적 고통을 준 이들을 원망하고 미워해봐야 돌아올 것은 또 다른 미움과 원망이지요.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라도 타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일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그 어떤 현실조차도 축복으로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거나 가난한 삶을 살아갈지라도 신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며 주어진 현실을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결과가 주어져 있는데 원망해봐야 본인의 마음만 괴로울 것이며 돌아올 것은 또 다른 고통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어차피 육에 속한 이는 잘나거나 못나거나 모두가 죄인에 불과하며 성령으로 거듭나야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무엇보다 우선시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빛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빛이신 성령은 물질세상의 법도와는 별개의 존재로서 성별을 상실하고 지위를 벗어나며 더없이 높은 하늘 위나 한없이 낮은 아래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지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빛이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며 또 다른 한주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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