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35)

배가번드 2021. 8. 25.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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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선 행사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밖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보이고 있었는데 네 할머니가 호주로 가시게 된 거야 .

채권자들로부터 심한 압박감으로 고생하시던 할머니를 네 고모가 호주로 가시기를 권유하고 나 역시 가시기를 바랐던 일이었기에 무척 잘된 일이기는 했지만 멀쩡하던 집을 아들 때문에 한 순간에 잃어버린 할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지……

일찍 홀몸이 되어 3남매를 힘들게 키우시면서 어렵사리 구하신 집이라 남들의 집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으련만 행여 사업실패로 의기소침해있는 큰아들의 마음이 위축이라도 될까봐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는 네 할머니야말로 참다운 보살님이시라 생각해.

가끔씩 동수들과 얘기를 할 때마다 도는 내가 닦는데 득도는 내 가족들이 한다고 해서 웃곤 하는데 정말이지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앞서지만 그 모두가 우리 가족들이 공유해야 하는 공업 때문인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가족들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고 내 아픔 또한 가족의 아픔인데 그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그때는 알 수가 없었지.

일단은 네 할머니가 호주로 가서 네 삼촌과 사시면 마음고생은 면하리라 싶었고 너희 모자 일만 정리가 되면 내 마음의 부담은 완전하게 덜어질듯했어.

이불견본을 구하러 대구에 갔을 때 네 외갓집을 통해 너희 모자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호주를 떠나올 때 워낙 모질게 하고 떠나온 터라 다시 연락하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선 행사 준비하던 중 어떻게 알았는지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와서 찾더라고 하는데 아마도 네 외가에서 보낸 사람인 것 같더구나.

사람들이 올 때마다 외부에 물품구입을 하러 나와 있었기에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선 행사가 끝나면 일단은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어.

그러한 바깥의 일과 함께 진행되어오던 선행사준비가 완료되고 스승님의 도착으로 일정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다른 선행사와는 달리 이번에는 스승님께서 관음 사자들의 참석도 허락을 하시는 바람에 약2백 명의 장주 자들과 미리 도착한 대만 식당작업 팀들로 인해 디데이도 되기 전에 벌써 500명도 넘는 인원들이 미리 와서 작업을 하였지.

선행사가 자주 열리는 대만이라 경험이 많은데다가 스승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관음 사자들과 식당 팀들이 움직이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했어.

먼저 전기배선공사에 투입이 된 관음 사자들의 일하는 모습은 우리국내 전기기술자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공사 진척도와 지혜를 보여주었는데 3천명이상을 수용할 대 명상 홀 전기배선을 하는데 불과 몇 시간 걸리지 않아서 해치워버리더구나.

먼저 선을 이리저리 펼쳐놓고서 중간 중간 필요한 소케트나 구조물들을 배치하고 형광등이 달리는 위치마다에 피복을 벗긴 후 연결을 시키니까 삽시간에 수백 개의 형광등과 TV모니터와 각 나라의 통역들이 쓰게 될 앰프 시설들을 연결할 수 있는 전기 시설들이 완료되어버렸지.

관음 사자들이라면 스승님께 입문하기 전부터 스님이었던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사회 일들에는 문외한인줄 알았었는데 실지로 보니 웬만한 기술자보다도 더욱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

스승님에게서 직접훈련을 받은 분들이라서 다르기도 하였고 선행사가 워낙 자주 열리는 대만에서 단련이 되기도 했거니와 불모지에 뛰어들어 스승님 법을 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하시는 분들이라 한국의 동수들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던 거지.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만능인이 되도록 훈련을 시키시는데 어떠한 일도 혼자서 해 낼 수 있게 가르치거든.

무조건 자신에게 맞는 일만 찾아서 하려는 우리한국의 동수들과는 많이 달랐어.

아들아!

이 이야기를 하면서 참으로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때 당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했던 선행사가 열리는 센터가 처음에는 전 세계관음가족의 본부로 쓸 작정이었는데 무산이 되어 버린 것이었어.

그 당시 일을 도우려고 온 대만 분들과의 주도권 싸움에다가 잘난척하는 수행자들의 얄팍한 에고들 때문에 처음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먼저 내가 속해있던 부식 조만 하더라도 식당 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는데 주방 팀의 팀장자리를 놓고도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지다시피 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냐 말이야.

스승님께서는 그렇게나 분별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데 제자들이 일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기도 차지 않는 것이었어.

한 스승을 모시고 일을 하는 입장에 주도권을 누가 잡으면 어떻고 내가 남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하면 어떻겠냐만 아직까지 세상의 업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많은 동수들이 그러한 하심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야.

물론 이 같은 점은 대만 동수들이라 해도 자유롭지 못했고 우리나라의 동수들과 오십 보 백 보였으나 우리가 좀 더 어른다운 행동이 필요했다는 거지.

여기는 한국 땅인 만큼 한국 동수들이 책임자를 맡아야만 하고 외국 동수들은 일을 거들기만 하라는 소린데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행자입장으로 놓고 볼라치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스승님을 모시고 하는 선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도권 다툼은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일이었거든.

우리한국 동수들로서는 국제선행사 경험이라고는 전무하였고 모든 것을 대만의 관음사자와 대만 동수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불구하고 시작부터 삐걱거리는데 어떻게 크나큰 일이 주어질 수 있었겠냐 말이야.

게다가 출가승들은 출가승들대로 에고에 가득 차서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처리해나가기 일쑤이니 어느 누가 함께 일하고 싶어 하겠는가 말이지.

대만 관음 사자들끼리 하는 말로 한국으로 파견될 지원자를 뽑는다면 서로들 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니 우리한국 동수들의 극성스러움이 얼마나 큰지 알만하지 않니?

아들아!

가끔씩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너는 한국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어.

참으로 한심하기도 하고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해.

진정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할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 일터인데 눈앞의 조그마한 자존심으로 크나큰 이익을 저버리는 무지한 짓을 하고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보고 누구 편인가 나무라듯 하니 어처구니없어 대화를 포기 하고 살았어.

너도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적게는3천에서 많게는5천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행사를 하게 되면 먹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소비시킬 뿐 아니라 왔다 갔다 경비를 써도 얼마나 쓰는가 말이야.

이모든 것이 국내에서 소비가 되는 만큼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어도 될 것이고 경제적인 이익보다 더욱 큰 명상의 에너지가 우리한국에 퍼부어지게 될 것을 왜 모르는가 말이지.

이러한 에너지흐름은 꼭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수행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어떤 기운이 좋지 않은 사람 옆에 가면 왠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명상을 해서 맑은 기운을 가진 사람 옆에 가면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명상을 하게 되면 그만큼 좋은 기운을 한국 땅에 가져다주게 됨은 당연할 것 이라는 거야.

그러한 좋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건만 아쉽게도 그때는 그러한 복이 없었나 봐.

물론 다른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 그 당시 내 눈에 비춰진 일들을 보았을 때 국제본부의 일이 무산 된 것은 순전히 우리자신들의 문제라고 여겨져.

이렇게 가끔씩 주도권 다툼을 겪으면서 선행사의 막이 올랐는데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설들이 완비되었고 차질 없이 진행이 되어 무척 다행으로 여겨졌고 간간히 시간이 날 때마다 선행사가 열리는 명상 홀로 올라가서 스승님을 뵙고자 했었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스승님을 뵈러 올라갈 때마다 일이 생기는 것이었어.

세 번을 잡혀 내려오고 나서는 다시 올라갈 엄두를 내지 않았는데 그제야 호주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나는 거야.

명상을 하는 사람은 명상을 해야 하고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봉사를 명상 삼아 일념으로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함을 깨달았던 거지.

흔히들 명상을 앉아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초심자시절 명상을 생활화시키기 위해 용명정진을 하고 나면 주어지는 자리에서 명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앉아서 명상을 할 수 없을 시는 일을 명상 삼아 집중을 훈련해야 하거든.

호주에서 대만 식당 팀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았더니 두 개조로 나눠진 작업 팀이 한 팀이 일을 할 때는 다른 한 팀은 식당 밖의 한쪽에서 명상을 하고 일정시간을 간격으로 교대로 작업하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인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어.

간혹 명상을 많이 하기 위해 욕심을 내는 분들을 더러 보는데 그것도 하나의 선병 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집착을 벗어 던진 대신 명상에 대한 집착을 입은 꼴이라 여겨져.

무엇이든지 과하면 탈이 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여서 어떤 일도 과하게 욕심을 부리게 되면 화를 자초하지 않겠냐는 거지.

명상 역시도 자신의 신체능력에 비해서 과하게 되면 상기 병이나 폐기, 등의 주화입마의 증상들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점 때문에 스승이 필요하고 계율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아.

아들아!

이 말은 명상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이 절대 아니야.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고 대처하라는 말이지.

시간이 주어졌을 때는 오로지 명상만 하고 주어진 일이 있을 때는 주어진 일을 명상으로 삼으라는 말이야.

나 역시 일을 하느라 절대적으로 부족한 명상을 할 욕심에 중간 중간 명상 홀을 기웃거린 것인데 결국에는 잡혀 내려오고 말았고 그 이후 다시는 명상 홀을 기웃거리지 않았어.

그렇게 명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열심히 일을 하던 중 물품 구입을 하러 영동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마주 오는 차량이 낮이 익어서 보니 우리 차를 세우는 거야.

왜 그러나 싶어 차를 한편에다 세웠더니 부식 팀의 팀장이신 L사형이었는데 큰일이 났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니.

원래 스승님이 법문 하시는 단상에는 언제나 축복과자가 비치되어있어야 하고 법문이 끝이 나면 동수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며 서로들 행복하고 즐거운 가운데 그날의 명상을 자축하곤 하는데 축복과자가 동이 나버렸다는 것이었어.

영동시내의 큰 슈퍼는 모두 뒤지다시피 해서 동물성 재료가 들지 않은 과자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한번에 3백만 원 이상의 과자를 구하자 영동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겨우 구한 과자를 법문시간을 넘기지 않고 가까스로 도착을 하였는데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던 거야.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때의 그 일을 떠올리며 즐거워들 하는데 그 당시는 아찔한 순간이었어.

수천 명을 모아놓은 장소에서 조금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수행자의 마음 자세인 것이어서 이러한 과자부스러기하나로 뭐에 그리 난리들을 피우나 해서는 곤란해.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웠겠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딱 한번 쓰이는 큰북 하나가 쓰임새가 없다고 소홀히 한다면 그 연주회가 엉망이 되듯이 이 세상 모든 일 역시 어떤 역할을 맡았다 해도 그 역할이 소중하지 않는 법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선 행사에서의 과자 역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 역할이 나에게 떨어진 이상 책임을 반드시 완수해야만 했고 그것도 아주 완벽하고 빈틈없이 해내야만 했던 거지.

그렇게 아찔한 순간을 가까스로 넘긴 다음날은 우리에게 불호령이 떨어진 날이었어.

스승님께서 영동센터건립과 선 행사 준비에 참가해서 함께 수고한 작업 팀 모두를 불러 모아 담소를 나누시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는데 케이크를 준비해야 하는 동수들의 늦장으로 우리가 늦게 올라가게 된 거야.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 몇 명만 남기고 올라가도 될 것을 의리상 기다리다 보니 늦게 된 건데 모이기로 한 장소에 훨씬 못 미친 자리에 있던 호법에게 우리가 작업으로 인해 늦었다는 사실을 통보해주길 바랬더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라오라는 관음사자의 지시가 있어서 올라갔었지.

속으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늦게 된 정당한 사유도 있었던 만큼 올라가게 되었고 관음 사자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므로 안심을 했던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 스승님으로부터 엄청나게 혼이 났어.

먼저 올라간 나와 또 다른 동수는 앉아있었는데 내 뒤로 멀찌감치 따라오던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 호통이 떨어지자 올라오던 사람들이 올라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던 거야.

할 수 없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내가 일어나 함께 내려오게 되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들더구나.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스승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버티어 나왔는데 그나마 나를 알아주실 줄 알았던 스승님으로부터 혼이 나 쫓겨 내려온 꼴이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어.

나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쫓겨 내려온 팀장 역시도 허탈을 넘어서 눈물이 글썽한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게 보이더구나.

한 달 넘게 자신이 하던 병원 문도 닫아놓은 상태로 선 행사 준비에 매달렸는데 칭찬은커녕 호되게 꾸지람만 받았으니 얼마나 실망을 하고 무안했겠니.

말없이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며 차 안에 앉아있노라니 모여 있던 동수들이 모두 다 내려오고 있었는데 우리를 쫓아내고 난 후 스승님께서 그 자리를 파했다는 것이었어.

우리의 심정을 알아차린 사형한 분이 전해주길 우리가 뒤늦게 올라감으로써 스승님의 영감을 흩어 놓았다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

솔직히 내가 올라갈 때 나보다 먼저 앉아있던 사형 중에는 나하고 다툼이 있었던 사형도 앞자리에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내 마음이 좋지가 않았었거든.

어떻게 저런 인간이 스승님 앞에 고개를 들고 앉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당연히 스승님께서는 전체의 분위기에서 그러한 나의 감정을 읽으셨을 것이고 쫓겨서 내려온 것은 내가 받아야할 당연한 결과물 이었지만 그때 당시는 전혀 그러한 생각을 못했어.

무조건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에 대한 위로와 선 행사 준비기간 동안의 수고를 칭찬받기만을 원하고 있던 나의 에고는 스스로의 잘못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야속하고 섭섭한 마음만을 가졌던 거야.

아들아!

너 역시 이러한 나의 감정을 잘 이해하리라고 여기는데 어떠니?

지난해 네가 중국에 와서 마음고생이 심했겠지만 나 역시 네 뜻대로 못해줘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

내가 가슴뼈가 부러져서 돌아왔다고 해도 너로서는 속이 상할 대로 상해있었으니 말하기도 싫었겠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기는 내가 너보다 심하지 않았겠니?

그와 같이 스승님께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셨나 보았어.

다음날이 되자 주방으로 내려오신 스승님께서 동수들을 일일이 돌아보시면서 인사를 하시는 동안 주방뒤편에 자리한 부식창고에 있던 내가 몰래 가서 스승님을 멀찌감치 뵙고 다시 창고에 앉아있었는데 식당에 계시다가 올라가시겠거니 했지.

그런데 바깥이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것이 스승님이 오신 듯했어.

내가있던 창고는 식당 뒤에 있었으므로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데 불구하고 스승님께서 창고까지 오신 거야.

내가 앉아있던 창고 안에 오셔서는 훳 이즈 디스?”라고 물으시는데 그렇게 간단한 영어가 들리지가 않는 것이었어.

밖에 있던 도자기 판매한다던 동수가 디스 이즈 불레싱 캔디라고 하자 스승님께서는 정리가 아주 잘되었다고 칭찬해주시면서 그 자리에서 직접 손을 과자박스에다 집어넣고서는 기도를 하시더구나.

그러고 나서 수고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시는데 언덕길로 차를 타고 지나실 때 내면으로 스승님과 대화를 나누었지.

 

스승님!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못난 제자를 용서하세요.”

 

했더니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더구나.

 

네가 못난 것을 알긴 아는구나.”

안다는 놈이 철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못나게 굴고 아이처럼 응석이나 부리려 하다니 언제 어른이 되려고 하니?”

 

스승님을 향해 합장으로 예를 올렸더니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 보시던 스승님께서 반대편으로 얼굴을 획하고 돌려버리시더구나.

이날 저녁에는 그 많은 선 행사 중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오월이라 하지만 산중 밤공기란 얼마나 차가운지 외국 동수들의 한기도 쫓아줄 겸 처음 먹어보는 인삼차를 동수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차를 끓여 올라갔을 때 스승님께서는 동수들과 함께 파티를 하자시면서 동수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명상 홀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셨어.

한참을 다니시면서 동수들과 춤을 추며 인사를 나누시다가 잠깐 동안 옷을 갈아입고 나오셔서 캠파이어가 이어졌는데 근엄한 스승의 모습이나 경직된 제자의 모습들은 간곳없이 모두들 허물없는 친구가 되어서 즐기고 있었던 거야.

미리 연락 받은 팀장님도 내 옆에 함께 있었는데 전날 서운했던 감정이 많이 녹은 것 같았지.

다음날은 외부의 손님들과 동수들이 함께 모여서 공연을 관람했는데 마을을 오가며 어른들을 모셔오느라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끝이 났어.

일부의 사람들을 남기고 사람들이 떠나가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분들 중에 러빙푸드 라는 대만의 채식판매회사의 책임자동수가 인삼제품을 사고자해서 금산을 가게 되었지.

그곳에서 인삼제품만 육백만 원어치를 구입했는데 인삼을 사면서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달러를 바꾸기 위해서 은행을 갔을 때 미화 오만 불을 바꾸겠다고 하자 은행의 과장까지 나와서 환대를 하는 바람에 IMF를 실감하게 되었는데 내가 안내한 분들 말고도 다른 분들까지 많은 제품을 구입하느라 달러를 썼고 보면 우리가 선 행사를 열게 된 것이 국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 생각해.

우리가 선 행사 준비를 위해서 사용한 비용만하더라도 수억 원에 이르고 선 행사 기간 중에 먹을거리구입에만 억대의 돈이 소비된 것만 보더라도 알게 모르게 우리가 지역사회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

공식적인 일정이 끝이 나고도 스승님께서는 센터에 잠시 동안 머무르고 계셨는데 스승님 시중을 드느라 동수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아신 스승님께서 한마디말씀이 계셨어.

 

여러분이 나를 좋아하긴 합니까?”

기도를 할 때는 모두들 스승님! 제발 저희들 곁으로 와주세요. 하며 간청을 해놓고서 막상 내가 와서 머물게 되니까 이제는 스승님! 언제 돌아가시나요? 스승님께서 계시니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하면서 바라고 있으니 정말 알 수 없는 제자들이에요.”

 

하시면서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셨어.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는데 평상시 우리가 하느님에게 기도를 해서 무엇인가를 바라놓고서 막상 그 일이 주어졌을 때는 그 일을 하기 위한 번거로움 때문에 불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때 당시 동수들의 바람으로 한국에서 선행사가 열렸고 스승님 역시 동수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머무르고 계셨지만 조그마한 희생이나 봉사 없이 즐기기만 하려는 우리들의 욕심을 스승님께 들키고 말았던 거지.

동수들의 불편함을 아신 스승님께서는 또다시 목마른 영혼의 부름에 답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셨는데 스승님께서 한국을 떠나시는 날 때마침 정문에 있던 내가 입구에서 스승님을 배웅하게 되었어.

차가 내 앞을 지날 무렵 잠시 멈춘 차창을 통해 스승님께서 테이크 캐어 라는 말씀을 하시고 합장으로 인사를 하였는데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지.

스승님의 인사말씀은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하는 험난한 길을 걱정하시는 것 같았고 내심으로 나 역시 기도하길 스승님 제게 6개월의 시간을 주십시오.” 했어.

선행사가 마무리될 때부터 내 마음은 호주로 가서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노라는 생각이 있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느낌으로 언젠가는 내가 교도소를 가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되었던 거야.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나 역시 센터를 나오기 위해 그 동안 맡아 하던 모든 일을 다른 동수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했는데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5만 불 중 3만 불 이상을 앞으로 상주할 동수들을 위해 고스란히 남겨두고 나왔지.

실상은 스승님께 받은 돈이라 돌려드려야 했지만 어차피 스승님께서 주신 돈이고 앞으로 센터에 머물면서 수행하실 분들이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 할 것 같아서 남겨준 것이었어.

3달 가까이 지내고 나서 내 주머니에는 처음 영동센터 일을 하러 들어갈 때 가지고 갔던 오만 원 중 이만 원을 쓰고 삼만 원이 남아있더구나.

선 행사 기간 중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이 또다시 가족들을 생각하게 하였는데 결코 깨달음이란 현실을 도피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내 앞에 다다른 모든 것을 받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

한의원 하는 사형에게 부탁해서 차비를 마련한 후 네 엄마를 만나 사과를 하고 일단 호주에 가서 지내면서 재기를 할 수 있나 여건을 살펴보고 여의치 않으면 돌아와 새 출발을 하겠노라 얘기하고 호주로 떠나게 되었어.

아들아!

지금 돌이켜봐도 그 당시 나의 선택은 교도소밖에는 갈 곳이 없었어.

그런데 내가 자수를 하게 되면 네 엄마까지도 함께 잡혀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는 지라 함부로 자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러한 일을 누구와 상의도 할 수 없으니 한마디로 대책이 서지 않았던 것이 그 당시 내 입장이었던 거야.

그래서 스승님께 육 개월의 시간을 달라는 기도를 했고 호주 행을 결심하게 된 거였지.

솔직히 내 앞에 어떠한 길이 놓여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내가 알고 있고 연결이 되고 있는 모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

이렇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또다시 호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호주로 돌아가서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사건들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도록 하자꾸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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