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와의 대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요즘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어.
대화를 나누는 중간 중간까지도 어김없이 이어져가는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슬픔이 때로는 기쁨이 각각의 감격으로 다가오는 거지.
너와의 대화에서 불 수 있듯이 나또한 일반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을 거야.
수행을 한답시고 그다지 특별하게 굴지도 않았고 감정이 메말라서 감정표현을 못한 것도 아니었으며 남들이 춤을 출 때 흥겨워 춤을 추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면 함께 노래도 했었어.
한마디로 희로애락을 함께 해 나온 거지.
다만 다르다고 한다면 시련을 받아들이는 마음만이 달랐을 거야.
똑같은 일을 당할 때 해석을 달리함으로 내인생길이 비참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꽃길과 같은 축복의 길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내재한 신의 선물이었어.
바로 이 같은 일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신분이 바로 육신을 가지신 내 스승님이었다 이 말이거든.
스승께서는 내가 입문을 할 때 말씀을 하셨지.
"여러분의 입문과 동시에 화신 스승을 하나씩 받게 됩니다.
그 화신스승이 여러분 모두를 보호하며 가르칠 거예요.”
다소 단어 선택이 다르긴 해도 의미는 별다르지 않을 이 몇 마디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나왔어.
그런데 이러한 스승님의 말씀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얼마든지 해석을 달리 한다는 것을 많은 동수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
과거 입문초기에 나를 수행 포기에서 구해주신 동수한분은 이 같은 스승님의 말씀을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하시더구나.
그래서 그분은 물질적인 스승님의 축복을 원하였으며 그 같은 축복이 처음에는 이루어지다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물질적인 어려움이 도래하자 신심이 퇴보하게 되었고 스승님의 말씀까지 의심하며 단체와 등을 지고 말았지.
이 같은 점은 믿음을 달리하는 모든 분들에게도 다 같이 해당될 말이지 결코 우리 단체에만 국한시킬 문제는 아니야.
그런데 이 같은 스승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신비주의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게 되거든.
이것이 반드시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이러한 믿음이 돼 버릴 경우 우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스승님을 사이비교주로 전락시켜 버릴 수도 있기에 새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왜 스승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진짜 본인이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서 사람들에게 하나씩 붙여주시는 걸까?
스승님께서 사람들마다 따라 다니면서 보호를 해주고 가르치시는 걸까?
모르긴 해도 이 같은 점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해.
불교에서는 아마도 부처님의 가피를 말할 것이고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말할 테고 말이야.
아들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화신은 우리들이 깨닫게 되면 볼 수 있는 불성과 신성을 말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본다면 우리들안에 내재한 스승이 아니냐고?
우와!
정말 네가 개오를 했구나.
어떻게 그렇게나 빠르게 성장을 하게 되었는지 놀랄 지경이구나.
그래.
네가 진정 정답을 말했다고 할 수 있어.
스승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였던 거야.
우리들안에 내재한 스승을 일깨우는 순간 스승님과 우리들은 신의 똑같은 품성을 물려받은 쌍둥이 형제들이 되기 때문에 화신스승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거였어.
다시 말해서 우리들 안에 모두가 스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신거지.
결국 이 같은 말씀에 따른다면 내가 어떠한 짓을 하더라도 거기에 따른 보호나 가르침들은 내안에 내재한 스승이 한다는 거야.
이래서 스승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겠어?
그러나 아들아!
이 같은 말도 함부로 하게 되면 엄청난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해.
왜냐고?
그것은 말이야.
사람들의 무지함 때문으로 스승은 반드시 자격을 갖추어야지 자격도 되지 않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거든.
그 말이 맞지 않나요?
실력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왜 스승노릇을 하려고 드는가 말입니다.
모름지기 남을 가르치려고 든다면 남보다 많이 배워야하고 남보다 모범이 되어야하며 청정한 계율에다가.......
그만!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그만하렴.
네 말이 맞긴 하다만 거기에는 크나큰 모순이 들어있어.
많이 배워야 한다면 얼마만큼 많기를 말하는 거지?
남보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면 그 기준이 어디인데?
또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계율이지?
불살생 한 가지만 놓고 말해볼까?
우리들은 숨을 쉴 때도 살생을 해야 하는데 숨도 쉬지 말아야겠네?
물에도 엄청난 생물체가 살고 있는데 물도 먹지 말아야지.
아들아!
이처럼 스승의 자격이라는 것이 계율을 얼마나 청정하게 지킬 수 있는 가로 따지거나 뭔가의 기준이 따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스승은 살지도 못하고 죽어야만 될 것이고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렇다면 스승이 되려면 어떠한 사람이 가격이 있을까?
그것은 말이야.
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될 수 있어.
그렇지 않니?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지?
그렇지만 제자가 얼마나 될는지, 혹은 얼마나 좋은 제자가 생기게 될는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승 자신의 역량에 달렸다는 거지.
이러한 점을 놓고 보면 좋은 스승을 제자가 고른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거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제자의 내면 스승이 육신의 스승에게 이끌고 간다는 표현이 정확할 테고…….
이래서 앞서 말한 대로 스승과 제자는 한 짝이 되는 것이고 좋은 법문이나 좋은 스승을 만드는 이는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되는 거야.
결국 스승은 내안에 내재한 신을 일깨우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겠어?
이 말은 결코 육신의 스승을 하찮게 여기거나 없이 보라는 것이 아니야.
육신의 스승이란 내재한 스승과 하나가 된 분으로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지 함부로 여겨지는 존재는 아니란 것을 알아야해.
그런데 왜 도구라고 말을 했냐고?
그것은 육신이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위한 방편이었을 뿐 절대 스승의 역할을 가볍게 여기려는 의도는 아니야.
왜 우리들의 육신이 진정한 우리들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의미가 그다지도 중요 하냐하면 이러한 개념을 가져야만 모든 이들이 평범할 수가 있기 때문이고 모두가 신의 자녀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이 같은 개념은 종교를 초월 할 수 있고 국경이나 인종차별 또한 넘어설 수 있게 만들어 주거든.
게다가 어떠한 분별심도 없게 해주며 우리들 모두가 신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스승도 될 수 있고 제자도 될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해.
어떤 사람도 더 귀하거나 천하지 않으며 언제라도 우리들은 선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창조력을 갖춘 하나님의 위대한 자녀가 되는 거지.
그렇지만 아들아!
이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안에 내재한 신의 힘이자 스승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우리들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이것은 그야말로 중요할 수도 있는 만큼 좀 더 상세하게 파고 들어보자꾸나.
마음이라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면 이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의 의미를 크게도 작게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올곧게도 만들고 그르치게도 만들기 때문이야.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상하게 변형 시킬 수 있다는 것은 내 주변만 보더라도 명확하게 알 수가 있어.
우리단체의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을 사이비 교주로 만드는데 앞장을 서고 있는데 어찌 보면 바람직 할 수도 있겠지만 분별의 벽이 무너져야 하고 경계가 허물어지는 데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아.
아들아!
스승님의 가르침 중에는 이런 말이 있어.
"두 사람만 모여도 내 법문에 대한 말을 하십시오."
이 말은 불경에도 나오고 성경에도 엇비슷하게 있는 말이야.
또한 한국 속담에 세 사람만 모여도 스승이 있다는 말도 있고…….
이 모든 말들이 앞서 내가 말한 의미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니?
사정이 이러한데도 누군가는 다른 이들이 스승님의 가르침이나 법문을 하게 되면 병적으로 싫어하며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어.
왜 스승이 있는데 자기가 나서서 법문을 하는가?
스승님께서 관음사자라는 직책을 정해놓고 책임자들을 정해 놓았는데 왜 그러한 계통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가?
이러한 것들이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사실은 그분들의 내면에 있는 에고와 질투심이 그러한 생각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해.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앞서 열거한 많은 얘기들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면 상세하게 알 수 있어.
그래도 한 번 더 설명을 해달라고?그렇다면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해.
우리들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들이, 아니 세상 모든 분들이, 더 나아가서 세상만물이 스승님의 법문을 찬양하고 노래해야만 하거든.
그래야 스승님이 천백억 화신 체를 나투시는 것이 맞는 말이 되는 것이며 두 사람만 모여도 내 법문을 말하라는 말 또한 진리가 되기 때문이야.
사정이 이러한데도 누군가의 법문하는 행위를 나무라거나 비난을 한다면 그분의 에고의 발동이 아니라고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거지.그렇지?
언젠가 동수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할 때였어.
평소 스승님의 법문을 자주 말하던 나를 나무라듯 동수한분이 점잖게 충고를 하더구나.
"사형!
스승님 법문을 우리들이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스승님이 계시는데 우리들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차라리 화제가 없으면 일상생활에 관한 얘기를 합시다."
솔직히 이 말에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억지로 참아 넘겨야했어.
생각에 따라서는 그분의 말이 맞기도 한데다가 평상시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도 나 자신이 스승님 법문을 한 것은 사실이었거든.
그렇지만 우리들이 법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오로지 신만을 찾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스승님 법문을 앉으나 서나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겠어?
그래서 못 들은 척 해버렸고 지금까지 이 같은 일을 줄기차게 이어 오고 있는 거야.
최근에는 그나마 지쳤는지 수그러들긴 했다만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만약 우리들이 일상생활 자체를 선으로 여기라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제자가 맞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스승님의 법문이 아닌 것이 없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스승님 법문이 아니지?
천백억 화신을 나투하는 스승님을 우리가 모신 것이 맞는다고 한다면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스승님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스승님이 계신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 법문이라고 한다면 관음법문 아닌 것이 어디에 있지?
교회의 목사님이나 절에 계신 스님의 가르침이 스승님의 법문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말을 할 수 있느냐 말이야.
물론 그들이 하는 말 전부를 법문으로 들으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그들의 말씀 속에서도 스승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누군가 말을 하기 바쁘게 에고를 발동시켜서 말이 많다는 둥 스승노릇을 한다는 등의 판단을 해서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있는가 이 말이거든.
아들아!
이래서 부처 눈에는 부처만이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이 보인다고 말을 하고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가득한 눈에는 스승 아닌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거야.
어떤 사람의 어떠한 말속에서도 금쪽같은 가르침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그자신의 그릇됨을 말하는 것이지 화자의 그릇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닌 거지.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문제를 찾는 이에게는 얼마든지 꺼리가 많으며 그 사람은 언제나 남의 좋지 않은 냄새만을 맡게 되는 거야.
그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겠니?
앞서 너와의 대화에서 말을 했듯이 이 세상 전체가 관음법문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도 있고 온 우주가 스승으로 꽉 들어찬 것으로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네 안에 존재하는 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야.
자신이 이러한 인식을 갖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이의 어떠한 말에서도 신을 보려고 노력을 해야 마땅한 일이지 다른 이의 스승님 찬양 속에서조차 오만과 편견이라는 쓰레기를 뒤져서 뭐하겠다는 건가 이 말이거든.
이 말은 내가 오만과 편견이 없다는 말이 절대 아냐.
내가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같은 심판은 내재한 나의 내면스승이 할 것인데 왜 자신이 심판하려 드는가 하는 말이야.
이 같은 말을 내가 하는 것은 절대 내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에고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그분들이 내안에서 보았다는 에고 있어.
그분들이 보았다는 오만과 편견 내안에 있다니까.
그분들이 보았다는 폭력과 부정성 음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내안에 존재하고 있어.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어쨌는데?
내가 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왜 다들 가져가지 못해서 안달들을 하지?
왜 내가 주려는 좋은 것들은 받을 생각들을 하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만 보고 가지려고 하는가 말이야.
나를 비난하는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찾아가곤 하였는데 그 같은 내행동을 보고 가까운 동수한분은 묻더구나.
사형은 가만히 보면 싫어하는 분들만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그 같은 그분의 말에 그 당시는 말을 못했다만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해야겠구나.
글쎄 말입니다.
나도 모르겠어요.
내안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는데 어쩔 도리가 없거든요.
병자에게 약이 필요하지 멀쩡한 사람들에게 무슨 약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같은 말을 그 당시 자신 있게 못했던 이유는 또다시 내말이 하나의 에고로 비춰질까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어.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두려운 것보다 쓸데없는 구업을 초래하는 상대를 위한 배려였다 해야 정확할거야.
다들 나와의 대화를 재미있게 즐기다가도 돌아서면 온갖 소리들로 비방을 하며 내 에고를 말한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었어.
심지어 그런 느낌이 너무나 강해서 다시는 그들과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해보았지만 다음번에 또 그들과 만나게 만드는 신의 안배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아.
그들을 만나기전 절대로 스승님의 가르침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게 되면 모든 화제들이 스승님의 법문으로 쏠리게 되고 또다시 우리들 모두가 그러한 법문을 하게 되거든.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스승님의 법문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란 것을 알아야하고 그중에서도 스승님의 에너지를 강하게 느끼는 자가 도구가 되어 스승님을 대신하는 것인데 그러한 이치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다들 힘들어 하는 거야.
말을 하는 자나 듣는 이들이나…….
아들아!절대 내가 스승 흉내를 낸 것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야.
분명히 말을 하지만 나는 스승의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스승의 일을 대신한 것에 불과해.
다시 말하자면 스승의 일을 한거라는 얘기야.
많은 이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내가 이 같은 말을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우리들 안에 모두가 동일하게 스승님의 화신이 심어져 있다는 스승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 모든 이들이 신의 동등한 자녀라는 말이 진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거든.
이래야만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모든 분별의 벽을 허물어트릴 수가 있는 것이고 앞으로 있을 대종교 통합을 실현 시킬 수 있기 때문이야.
만약 이러한 개념이라면 우리들은 스승님을 모실 필요도 없겠네요?
모든 이들이 스승인데 왜 우리들이 스승을 모셔야합니까?
단체나 종교도 필요 없을 것 아닌가 말입니다.
좋은 질문을 했어.
네 말이 맞아.
그리고 틀리다고 볼 수도 있고…….
네 말이 맞는다는 것은 네가 정말 스승이 없이도 혼자서 이모든 개념들을 받아들이고 신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너의 역량의 문제에 입각한 결론이며 네 말이 틀리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함으로 길을 안내해줄 스승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에 입각한 결론이야.
이 또한 선택에 달렸다고 볼 수 있지만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두가지의 길이 사실은 하나의 길이거든.
결국 한가지의 길을 두 가지로 표현한거지.
아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합니까?
어떻게 스승을 따르는 것과 혼자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하나의 길이라는 거냔 말입니다.
엄연하게 두 가지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데요.
그래.
네가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하지만 내말을 찬찬히 들어보렴.
이 세상에는 팔만사천법문이 있다고 누군가 말을 했지만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법문이 존재한다는 말을 언젠가 내가 했을 거야.
기억나지?
그러한 수많은 길들이 결국에 가서는 한 가지에 집약되고 있음을 너와의 앞선 대화에서 어느 정도의 결론을 얻었지 않니?
이와 같은 의미로 보자면 스승을 따르는 것이나 혼자서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나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며 육신의 스승이나 내면의 스승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을 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내가 수행을 하는 것 같지만 내재한 스승이 육신의 스승 앞에 이르게 만들어서 공부를 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라는 말이며 이러한 통합된 개념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그토록 목숨 바쳐 육신의 스승을 따르는 거다 이 말이거든.
결국 내안에 있는 내면의 스승을 따르면 되지 육신의 스승을 따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분명하게 알아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어.
육신의 스승을 따르는 것이나 내면의 스승을 따르는 것이 둘이 아닌 것은 이론적인 결론이고 실제적인 현실의 문제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이래서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하나임과 동시에 여러 개가 되는 거지.
아들아!
너무 어렵지?
미안하구나.
너무 어렵게 설명을 해서…….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접근을 해보도록 해.
먼저 우리들은 내면에 스승이 있다는 것을 대다수가 모르고 있어 그렇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들 안에 스승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거야.
"여러분 안에 신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신을 우리는 스승이라고도 불러요.
이러한 점은 어느 누구나가 마찬가지이며 우리들 모두는 동등한 신의 자녀들이예요."
이것이 바로 육신의 스승이 하시는 일이거든.
그러면 우리들 중 때가 된 영혼들은 얼른 알아듣게 되는 거지.
"야!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때가 왔구나.
얼른 가서 그(그녀)를 만나러 가야지."
그렇지만 습관으로 무장된 육신은 거부를 하는 거야.
"에이!
저 사람은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라.
깨달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마늘을 먹을 수가 있어.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여자와 잠을 잘 수 있으며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말이야.
여자는 스승이 될 수 없어."
수많은 생각들이 신으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들 삶의 방향을 조절하는 거야.
그러한 결과 결국은 자신의 기호에 맞는 스승을 고르게 되는 거지.이래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스승들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중에 나와 짝을 이루게 된 스승님은 나와는 완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훌륭한 파트너가 되는 거야.
이것은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며 내가 선택한 스승을 나와 완전한 하나가 되어서 신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내재한 우리들 스스로의 신인거야.
어떠니?
이제 무엇인가 스승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 같니?
그렇지만 아들아!
우리들이 육신의 스승님을 모시는 것에 대한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크다고 볼 수 있어.
왜 그러냐 하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해보자꾸나.
앞서도 말을 했듯이 우리들의 육신은 습관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누군가의 가르침을 올곧게 흡수하기가 쉽지가 않거든.
내가 차를 마시면서 내재한 신의 지시대로 말을 했다 하더라도 동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였던거야.
스승이 있는데 지가 왜 나서서 남들을 가르치려 드는가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인 거지.
이 같은 마음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겠지만 육신의 습관을 뛰어넘는 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거든.
이러하기에 육신의 스승을 모신다는 것이 실로 큰 의미를 갖는 거야.
습관덩어리인 내 육신에게 개념을 심어주는 거지.
“내가 이제 육신의 스승님을 모시기로 했으니 스승님의 가르침을 목숨처럼 여기고 따르자.”
이 같은 두뇌의 입력된 정보에 따라 스승님의 어떤 것들도 받아들이기로 작정을 하고 억지로라도 따르려고 노력을 하는 거다 이 말이거든.
이것은 아주 중요할 수 있는 거야.
스승이니까 당연히 나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의 두뇌에게 심어줌으로 인해서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아주 수월해져.
이래서 스승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며 남들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이 같은 제자들의 바람에 부응 할 수 있게 항시 노력해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기에 정말 어려운 역할인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승께 항시 감사를 해야 하며 그들의 노고에 찬양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거지.
이제 스승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생겼는지 모르겠구나.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을 하였다면 목숨을 건 신뢰를 가져야 그분의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으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면 스스로의 내면 스승이 드러나게 되어 마침내 육신의 스승과 하나 됨을 알게 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헌신을 다한 육신스승에 대한 신심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해.
너는 혹시 내안에 내재한 스승만 알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으로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
이 말을 하고 보니 정말 중요한 일이 될 것 같아 좀 더 상세하게 말을 해야겠구나.
아들아!
내가 가르침을 전해 받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제자를 내면의 스승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니?
육신의 스승을 신처럼 떠받들 때 내재한 스승이 신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안다고 한다면 육신 스승을 신과 같이 여기며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육신 스승을 위한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거야.
다들 물질적인 인식을 떠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영적인 성과를 얻고 싶은 마음에 스승의 가르침을 우습게들 여기고 있지만 실상을 바라다보자면 주객이 전도된 거라 할 수 있어.
물질이 아까워서 스승님의 가르침이 담긴 영상물이나 서적하나 구입하는 것도 마음과의 타협이 쉽지 않은데 어찌 부처를 논하고 신을 논할 수가 있겠니?
미라래빠는 스승께 전 재산을 바치고도 엄청난 고통을 선사 받아야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의 스승들 삶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겠지만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스승께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야.
설거지 3년, 장작패기3년, 밥하기 3년, 이렇게 9년을 봉사하고서야 술법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는 옛날얘기가 결코 허구가 아님을 알아야해.
다행히 우리들은 자비로운 스승을 만나 이렇게 쉽고 편리하게 법문을 배우고 있으며 비용조차 들지 않고 최고의 가르침을 얻고 있거든.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감사의 표시조차 하지 못하고 있어.
입으로는 스승께 감사한다고 말을 하다가 자신에게 조금만 불이익이 생기기라도 할라치면 스승을 비난하며 등을 돌리는 거지.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가르침을 구하는 자세며 믿음을 가지는 마음상태인거야.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듯이 내가 스승에 대해 교만의 마음을 가졌을 때 그날당장 지옥의 야차에게 끌려가 혼이 난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내재한 스승이 육신의 스승을 향해 존경심을 가지지 못한 나 자신을 벌하기 위한 일이었어.
그래서 오늘 이 같은 비판은 나를 위해 마련한 내재한 스승의 말씀이 분명해.
이러한 연유로 스승에 대한 보시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할 수 있으며 스승께 보시를 하고 헌신을 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