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22.

배가번드 2022. 2. 19.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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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하늘을 볼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목사,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 시간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이 땅에 있지 않고 저 하늘에 있으니 땅에 것을 말하기보다 천국복음을 말하기위해 성경 속으로 바로 뛰어들겠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눅13:1)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눅13:2)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빌라도는 로마총독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인물인데 갈릴리 사람을 죽여 그 피를 제사에 썼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1절)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의 말씀으로서 정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빌라도의 뜻은 “창을 가짐”이며 여기에서는 심판자의 뜻으로 언급되었지요.

갈릴리(원, 순회)사람은 이방인을 뜻하며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심판받아 희생제물 취급받는다는 뜻입니다.

특별하게 이들만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죄를 받는다는 뜻으로 2절과 같이 말씀하신 겁니다.

3절에 회개치 아니하면 다 망한다는 말은 회개하면 안 망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늘 비유로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이 잘 말해줍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눅13:4)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5)

 

액면 상으로 보자면 실로암은 구약에 기록되어있는 예수살렘에 만들어진 연못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기혼샘의 물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터널공사를 했다고 구약에 기록되어있는데(왕하20:20) 이는 비유의 말씀으로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실로암의 뜻은 “파견된 자, 보냄을 받은 자”인데 파견된 자의 탑이 무너졌다는 것은 가장 높은 장벽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망루는 먼 곳을 지켜보는 곳이니 의식의 최고봉을 이름이자 지혜안을 나타내며 그것이 무너졌다는 것은 영안이 열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열여덟이란 3의 6배수라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6은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육(인간)의 숫자이자 거듭남의 숫자입니다.

인간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한 연합(3×6)을 나타내는 거지요.

따라서 이 내용은 깨달음을 얻은 이는 죄가 없다는 말이며(4절) 회개치 않으면 지혜롭지 못하여 성경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음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약의 내용을 액면 상으로만 알고 있기에 누가 역시 비유로서 깊은 뜻을 심어놓았던 거지요.

그래서 누가는 다음과 같은 비유의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눅13:6)

He spake also this parable; A certain man had a fig tree planted in his vineyard; and he came and sought fruit thereon, and found none.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7)

Then said he unto the dresser of his vineyard, Behold, these three years I come seeking fruit on this fig tree, and find none: cut it down; why cumbereth it the ground?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13:8)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9)

 

예문의 내용을 분석하기 전에 번역의 오류를 지적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바로잡아야할 단어는 vineyard인데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포도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활동범위, 작업장, 일터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 세상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놓은 곳을 나타낸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6절의 어떤 사람은(A certain man)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며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겁니다.

7절에서의 삼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기위해 기록된 것이며 지켜보는 하나님을 말해줍니다.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말은 영적인 성과가 없었다는 말이며(성령을 깨닫지 못했음)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사람)는 쓸모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작업장에는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과원지기에 해당하는 단어 “the dresser of his vineyard”는 번역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역하면 포도원을 장식하는 사람이 되겠지만 앞서 말한 대로 vineyard가 하나님의 작업장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the dresser는 입히는 사람이나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같은 영적인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런 분은 하나님(어떤 사람)으로부터 과원(작업장, 이 세상)을 책임질 임무를 부여받았으므로 무화과(구도자, 수행자)가 과실을 맺을 수 있게(영생을 얻을 수 있게,성령을 깨달을 수 있게) 땅을 파고 거름(가르침)준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8절)

이렇게 노력을 기우렸는데도(가르침을 주었는데도, 복음을 전파하였는데도) 과실이 열리지 않으면(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그때는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9절)

위내용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은 지켜보는 분으로서(3년을 지켜봄) 과원지기에게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예수님, 영적스승)는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인다는(땅을 파고 거름을 준일) 것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깨달은 분의 역할은 지대하다는 말이며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들을(1~5절) 구해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을 구해줄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지 성경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눅13:10)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눅13:11)

And, behold, there was a woman which had a spirit of infirmity eighteen years, and was bowed together, and could in no wise lift up herself.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유대교회에서 안식일 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10절)

그런데 11절은 번역이 완전히 잘못되어있으므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여인이 있었는데(there was a woman) 18년 동안이나 약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고(which had a spirit of infirmity eighteen years) 했으니 믿음이 약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18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6×3) 노력했다는 뜻이며 또 함께 구부러져 있었다고 했으니(was bowed together) 교회에 모인사람들과 같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왜곡된 믿음을 믿고 있었기에 지혜를 높이지 못했던 거지요.(could in no wise lift up herself)

이런 사람이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을 만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눅13:12)

And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to him, and said unto her, Woman, thou art loosed from thine infirmity.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눅13:13)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너희 약함으로부터 놓여 졌다고 선언하는 대목을 볼 수 있습니다.(Woman, thou art loosed from thine infirmity)

오랫동안 하나님과 하나 됨을 갈망하며(18년) 구도의 길을 걸어오던 여인에게 강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거지요.

그리고 손을 여인에게 올려놓았을 때 즉각적으로 여인이 바르게 되었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13절)

이 말씀인즉 예수님과 연결이 되는 순간(성령과 연결이 됨) 여인의 잘못된 믿음이 바로 세워졌다는 말이며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여인의 믿음이 컸다는 거지요.

덧붙여 우리가 알아야할 점은 이러한 일이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눅13:14)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눅13:15)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6)

 

액면 적으로 보면 안식일 날 병을 고치는 것은 안 된다 입니다.(14절)

그러나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면 전혀 다른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외식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대상은 그 당시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등이지요.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영혼이 없는 짐승들이나 다름없다는 뜻에서 소나 마귀로 비유했으며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행위를 물을 먹이는데 비유한 겁니다.

이들이 하는 행위도 알고 보면 안식일 날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왜곡된 믿음아래 있던 여인을 사탄에 매인바 되었다고 표현했으며 자신이 행하는 일(영적인 가르침)이 합당하다 말씀하신 것은 가르침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며 성령을 깨닫고 못 깨닫고의 차이가 크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액면그대로 가르치는 이들은 하나님말씀을 가르친다고 볼 수 없으며 영적으로 깨달은이라야 하나님과 하나 되게(18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13:17)

And when he had said these things, all his adversaries were ashamed: and all the people rejoiced for all the glorious things that were done by him.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란 영적이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짓이 무엇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끄러워했던 겁니다.(all his adversaries were ashamed)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습니다.(all the glorious things that were done by him)

그만큼 영적인 사람을 알아보고 따르기가 어렵다는 말이며 영의 일을 안다는 것이 어렵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눅13:18)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9)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눅13:20)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눅13:21)

It is like leaven, which a woman took and hid in three measures of meal, till the whole was leavened.

 

이 말씀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영혼이 커져가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왕국에 대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겨자씨 한 알을 땅에 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그 씨앗(믿음)이 자라나 커져 나무가되면(온전하게 되면) 공중의 새들(이방인, 믿음이 없이 방황하는 이)이 둥지를 튼다(따른다)는 뜻입니다.(18~19절)

그리고 가루 서 말은 우리내면에 들어앉은 성령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며 누룩은 우리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를 가루 서 말 안에 감춘 누룩과 같다고 했던 겁니다.(a woman took and hid in three measures of meal)

완전히 부푼다는 말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비유의 가르침이며 파면 팔수록 깊이 있게 묻혀있는 보석 같은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또 어떤 가르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가 봅시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눅13:22)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눅13:2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Strive to enter in at the strait gate: for many, I say unto you, will seek to enter in, and shall not be able.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곳을 다니셨지만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고 했지요.

예루살렘이 성전을 뜻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계시는(성전) 왕국으로(영생을 얻을 수 있게)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23절에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냐고 물었던 겁니다.

이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셨는데 24절 내용은 조금 더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Strive는 노력하다는 뜻도 있지만 싸우다, 분투하다, 항쟁하다, 등의 뜻입니다.

그리고 좁은 문에 해당하는 the strait gate에 대한부분도 해석을 달리할 필요가 있지요.

strait의 뜻이 곤란, 재난, 궁핍 등의 뜻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기 때문에 (for many) 좁은 문이라는 표현을 한 겁니다.

그만큼 구원을 얻기가 어렵다는 말인 것 같은데 예수님이 여기에 대한 설명을 더해주시는 것 같으니 경청해보겠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When once the master of the house is risen up, and hath shut to the door, and ye begin to stand without, and to knock at the door, saying, Lord, Lord, open unto us; and he shall answer and say unto you, I know you not whence ye are:

 

25절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약간 이상한점이 보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두드리고 서있는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는 겁니다.

서있는데 뭔가 없이 서있었다고 했지요.(to stand without)

집주인이 그저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없기에 모른다고 했을 것이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부분은 물음표를 쳐놓고 다음내용에 집중해보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눅13:26)

Then shall ye begin to say, We have eaten and drunk in thy presence, and thou hast taught in our streets.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13:27)

But he shall say, I tell you, I know you not whence ye are; depart from me, all ye workers of iniquity.

 

26절 내용을 보니 25절에 언급된 집주인은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된 예수님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예수님이 평소 제자들과 먹고 마셨으며 길거리에서 가르치시기도 했는데 어찌 모른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26절 중간부분에 나오는데 in thy presence를 직역하면 당신존재 안에서가 되겠지만 이보다는 형상을 갖춘 상태라고 번역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집주인은 이미 육신을 벗어나 영으로서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인데 이런 분에게 당신이 우리와 먹고 마시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말하는 것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당신이(집주인) 육적 존재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와 함께 지냈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집주인(하나님, 영으로서의 예수님)이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모른다했으며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라 했던 겁니다.(27절)

여기에서 나를 떠나라는 말은 나로부터 분리되었다(depart from me)뜻으로 성령과는 별개라는 말이며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행악하는 자들이라 표현한 것 또한 영적이지 못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25절에서 뭔가 없이 서있었다는 것은 성령과 함께 하지 못함, 즉 성령을 깨닫지 못했다는 거지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면, 혹은 성령과 하나 된 사람과 연결되어 성령을 나누어받지 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13:28)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눅13:29)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13:30)

 

28절~30절 내용만 잘 들여다봐도 영생을 단박에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8절에 언급되는 사람 모두가 구약을 장식하는 인물들로서 하나님왕국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성경(구약)이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구약은 성령을 깨닫게 만들기 위한 비밀스러운 경전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29절을 보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안에 앉는다 했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생존당시에 동양 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종교가 다르다 해도,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영생을 얻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거지요.

영혼의 세계는 방향이 없으며 경계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기록한 것이며 30절 내용도 영의 세계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방향이란 공간이 있을 때 존재할 수 있으며 시간 또한 공간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시공간이 무너진 영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없으며 시작점 알파와 종착점 오메가가 무한대로 공존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성경가르침의 핵심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으니 인연 있는 분들만 알아듣기 바라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13:31)

 

31절은 어떤 깊은 뜻이 있다기보다 이어지는 내용을 말하기위해 설정된 내용입니다.

구태여 설명을 보태자면 분리된 이(바리새인)는 물질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헤롯의 뜻이 “영웅의 아들” 임을 볼 때 물질과 영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2)

And he said unto them, Go ye, and tell that fox, Behold, I cast out devils, and I do cures to day and to morrow, and the third day I shall be perfected.

 

이 내용은 아주 중요하며 대단한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 fox는 단순하게 여우라기보다 혼란스럽다, 속이다, 등의 뜻으로 쓰인 겁니다.

헤롯이 물질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의 세계로 이끄는 예수님과는 정반대이지요.

이런 사람은 구도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기만하기도 하는지라 여우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은 1과 2를 나타냄과 동시에 1은 하나님이신 성부, 2는 육신인 성자를 가리키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기위해 삼일에 완전해진다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영이신 하나님(1)만으로도 완전하지 않으며 육신(성자,2)만으로도 완전하지 않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일 때 완전하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밀스러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연막을 쳐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육신인 예수님은 임무가 끝날 때까지 일(영적인)을 계속해야하며 성령을 깨달은이(선지자)는 성전(하나님왕국, 예루살렘)에 도달할 때라야 비로소 육신을 벗는다는 거지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32절과 33절의 오늘과 내일은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쓰인 표현으로서 물질세상을 나타내기도하고 영의 세계를 나타내기도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13:34)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3:35)

Behold, your house is left unto you desolate: and verily I say unto you, Ye shall not see me, until the time come when ye shall say, Blessed is he that cometh in the name of the Lord.

 

34절의 예루살렘은 33절의 예수살렘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지명으로서의 예수살렘이자 이스라엘 백성들(구도자, 하나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창세로부터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성령을 깨닫게 기회를 주었지만 발로 차 버렸다는 말이지요.(34절)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된다는 것은 육신을 이름이며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뜻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한다는 것은 성령이 드러난 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정도의 믿음을 가져야만 성령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35절)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만 보더라도 이것이 육신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지요.

이렇게 쉽게 해석을 해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되새겨주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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