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23.

배가번드 2022. 2. 24.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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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음성을 따라 움직이는 양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영생의 하늘을 향해 걸어가는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 시간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혹시 나 홀로목사의 인사말이 평소와 달라 이상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제가 이런 인사말을 하게 된 이유는 성경상의 목자와 양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성경상의목자는 예수님이고 양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예수님이 양이기도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The next day John seeth Jesus coming unto him, and saith, Behold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그런데 예문을 보니 어린양인 것은 맞는데 세상 죄를 없애주는 양이라고 했습니다.(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그러면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 생각해봐야겠지요.

만약 세상의 죄를 예수님이 없앨 수 있다고 한다면 2천 년 전에 모두 없애버렸겠지만 아직도 세상에 죄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을 깨달아 세상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음을 어린양에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은 육신과는 완전히 다른 몸체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재한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은 육신과 완전히 분리된다는 의미로서 죄와는 무관해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세상 죄를 없앤다는 표현을 한 겁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내재한 성령을 깨닫게 가르쳐주는 스승인지라 세상의 많은 죄를 없앤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양인데 무엇이 다른 걸까요.

다 같은 양이지만 제자들은 아직 세상 죄(육신으로 지은 죄)를 없앨 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으로(성령을 깨닫지 못했음으로) 이끌어줄 목자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근본에 있어서는 다 같이 성령을 담고 있지만 아직은 성령을 드러내지 못했음으로 아직까지 세상 죄로부터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자이며 제자들은 양으로 묘사되는 겁니다.

이제 어린양과 목자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고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 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눅14:1)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눅14:2)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눅14:3)

And Jesus answering spake unto the lawyers and Pharisees, saying, Is it lawful to heal on the sabbath day?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눅14:4)

And they held their peace. And he took him, and healed him, and let him go;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눅14:5)

And answered them, saying, Which of you shall have an ass or an ox fallen into a pit, and will not straightway pull him out on the sabbath day?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눅14:6)

 

지난시간 누가복음 13장을 통해 안식일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은 지난번과 이번의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번은 안식일 날에 모여 (영적인)가르침 받는 것을 일에 비유한 것이고 이번 것은 안식일 날에도 세상적인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언급한 겁니다.

본문 내용 중에 3절을 보면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고 했지요.(Jesus answering spake unto the lawyers and Pharisees)

그러나 정작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질문한 내용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날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데 대해 대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일날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엄하게 지키고 있던 그 당시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고쳐주기 위해 말씀하신 거지요.

그래서 5절에 말씀하시기를 나귀나 소가 구덩이에 빠졌다면 곧바로 건지지 않겠느냐 했던 겁니다.

원래 고창병(dropsy)이란 일종의 부종으로서 헛배가 부르는 병을 일컫습니다.

그 당시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대해 잘못알고 있었다는 것을 이런 병에 비유한 거지요.

요즘이야 일요일에도 일하는 기독교도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일을 했다가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여겼기에 이런 가르침이 필요했던 겁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하니 뭐라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적어도 크리스천들이라면 이런 관습에서 자유로워져야합니다.

다만 안식일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관습에서 벗어나 매일같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신앙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 가르침이 있는지 성경으로 눈길을 옮겨보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눅14:7)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눅14:8)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눅14:9)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눅14:10)

But when thou art bidden, go and sit down in the lowest room; that when he that bade thee cometh, he may say unto thee, Friend, go up higher: then shalt thou have worship in the presence of them that sit at meat with thee.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For whosoever exalteth himself shall be abased; and he that humbleth himself shall be exalted.

 

이 내용은 겉보기에는 잔치 집에 초대된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거지를 조심하라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혼인은 남성(육신)과 여성(영)의 합일에 따른 완전함을 상징함으로 여기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성령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며 청한 이는 하나님을 비유한 겁니다.

따라서 7절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상좌 택함을 보셨다는 것은 영적가르침을 받는 이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8절에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을 때라고 한 것은 영생을 얻으려할 때(구도의 길을 걸어갈 때, 가르침을 받을 때)를 가리킵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이유는 영적인 세계에는 높낮이가 없는 것인데 이를 모르고 높아지려하면 영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높낮이가 있을 경우 더 높은 이가 오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함으로 위없는 깨달음(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요.(9절)

이런 이유로 우리가 배움의 과정에 있을 때(청함을 받았을 때)에는 겸손해야 하며(sit down in the lowest room) 스스로가 자신을 낮출 때 청한 이가 와서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10절에서 자신을 낮출 때 청한 이가 온다는 것은 육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게 되면(육신의 한계) 자신내면의 성령이(청한 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벗이여 라고 한 것은 하나가되었음을 비유함)

10절의 마지막 부분을 직역해보면 이 같은 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너와 함께 앉아서 먹고 있는(sit at meat with thee) 그들의 형상 안에서(in the presence of them) 숭배 받게 될 것이다.(shalt thou have worship)

이렇기 때문에 누가는 11절에서 자신(육신)을 높이는 자는 (영적으로)낮아지고 자기(육신)를 낮추면 (영적으로)높아진다 했던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인지 영을 아는 이들만 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다음가르침을 보겠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눅14:12)

Then said he also to him that bade him, When thou makest a dinner or a supper, call not thy friends, nor thy brethren, neither thy kinsmen, nor thy rich neighbours; lest they also bid thee again, and a recompence be made thee.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14:13)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4)

 

자기를 청한 이에게 이르셨다는(Then said he also to him that bade him)말은 영적인 가르침을 청한(성령을 깨닫기를 원하는)이에게 말한다는 겁니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는 말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식사대접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thy friends, nor thy brethren, neither thy kinsmen)이고 물질적인(thy rich neighbours)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이지 못할 경우 인과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they also bid thee again, and a recompence be made thee)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13절에 가난하고 불구인 사람들을 청하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물질에 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며 의인이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 몸 안에 내재한 성령이 깨어나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14절)

가난한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행위 모두가 하늘에 쌓여 성령(의인)이 깨어나는데(부활)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눅14:15)

 

함께 먹는 사람은 예수님가르침을 받는 제자를 가리키며 제자들 중에 한사람이 비유의 가르침을 알아들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는 말은 예수님 가르침이 천국복음이라는 말이며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귀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어질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눅14:16)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눅14:17)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눅14:18)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눅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14:20)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14:21)

 

16절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잔치를 배설(排設)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놓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가지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은 하나님에게 명을 받은 스승을 비유한 것이며 천국복음(잔치 상, 영생)을 전하는 임무를 맡고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물질적이고 육적인 이유로 인해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17~20절)

그런데 21절과 22절을 보면 가난한 자들과 병신, 소경, 저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눈 밝은 이들은 이 내용을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앞에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형편과 21절에서 언급된 육신적으로 완전치 못한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비교해보면 확실하게 인식 될 거라는 거지요.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아니리 육신적으로도 자신이 모자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경우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눅14:22)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And the lord said unto the servant, Go out into the highways and hedges, and compel them to come in, that my house may be filled.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4:24)

 

명하신대로 했다는 것은 (심령이)가난한 이들과 겸손한(불구자)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는 말이며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들 외에 또 다른 이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3절은 조금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합니다.

주인(하나님)이 종(예수와 같은 영적스승)에게 나가라고(Go out) 했다는 것은 종이 천국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왔음을 말해줍니다.

넓은 길(the highways)은 좁은 천국의 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세상을 비유한 것이며 산울타리(hedges)는 높은 인식의 세계와 세상 사이에 놓인 경계를 비유한 겁니다.

강권하라는(compel them to come in) 말은 세상과 천국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구도자를 강하게 압박하여 천국으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24절을 눈여겨봐야합니다.

전에 청하였던 사람들은 한사람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대목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많은 이들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일들을 핑계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런 이들은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지라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은 명심해야합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물질 지향적 삶을 살아가거나 육적인 향락에 빠져 살아간다면 영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보충설명을 하셨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눅14:25)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많은 이들이 함께 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25절)

하지만 무조건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해야 된다고 했습니다.(26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정말 이것이 액면그대로 받아들여야할 일이라면 성경은 천하에 둘도 없이 불경한 책이 될 것이고 예수역시 가족 간의 불화를 조장하는 가짜 스승일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제대로 된 가르침이 될는지요.

이 말씀인즉 예수께서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육신적인 면들을 넘어서지 않으면 자신의 내재(內在)한 성령을 드러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달리표현하자면 영은 육신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지 않는 자도 제자 될 자격이 없다 했습니다.(27절)

이 말씀을 설명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십자가는 예수님이 받은 형벌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매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여기에 쓰인 십자가는 각자의 인생에서 짊어져야하는 삶의 짐 보따리로 봐야합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행하던 십자가형에서 죄수가 자신이 매달릴 목재를 자신이 지고 가는데서 유래된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각자의 인생길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시련과 고통이라는 짐 덩이를 예수님(스승)께 맡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롯이 져야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가 않으며 성령을 드러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일반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하거나 예수와 같은 영적인 스승에게 매달리게 되는데 이러한 행위는 성령을 깨닫고자하는 사람들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라는 겁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거하고 있음을 안다면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가 해답을 찾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누구나가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그럴 때 일반인들은 그 어려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습니다만 내재한 성령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안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하게 짊어지고 스승(예수)을 따라 갑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혼자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내재한 성령이 안배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27절과 같이 말씀하신 겁니다.

이러한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강조의 의미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기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14:28)

For which of you, intending to build a tower, sitteth not down first, and counteth the cost, whether he have sufficient to finish it?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눅14:29)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30)

 

해석에 앞서 28절 번역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할 것 같습니다.

망대를 세우고자 할 때 먼저 앉지 않는다(sitteth not down first) 했는데 앉아서 비용을 예산한다고 해석한 것은 옳지 않다는 거지요.

어찌 생각하면 먼저 앉아서 차분히 생각하면서 계산하는 것이 맞다 여길지 모르지만 이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라 행동(노력)하지 않고 주저앉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겁니다.

먼저 앉지 않고 탑을 완성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망대를 세운다는 것은 뜻을 높이 가진다는 의미로서 (성령)깨달음을 비유한 것이고 이를 완성한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니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봐야(예산을 세움)한다는 거지요.

앞서 보았던 대로 육적이고 물질적인 면들 보다 영을 더욱 사모해야(육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생각하고 실천에 옮겨야한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보는 이들이 기초만 쌓고 끝내지 못했다고 하거나 역사를 시작하고 이루지 못했다고(주저앉음) 비웃게 된다 했습니다.(29~30)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육신적인이고 물질적인 일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아시는 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여주셨습니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14:31)

Or what king, going to make war against another king, sitteth not down first, and consulteth whether he be able with ten thousand to meet him that cometh against him with twenty thousand?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눅14:32)

Or else, while the other is yet a great way off, he sendeth an ambassage, and desireth conditions of peace.

 

31절의 앞에 등장하는 왕은 육신이고 뒤에 나오는 왕은 영을 비유한 겁니다.

육과 영이 전쟁을 벌일 때 먼저 주저앉지 않고(sitteth not down first) 이만의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는 거지요.

육(일만)과 영(이만)이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하게 나타납니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육적인면들도 심각한 손상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을 경험해본 이들은 너무나 잘 알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님께서는 저(영)가 저 멀리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하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아직 상대편 왕(영)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멀리 있는 동안)부터 준비를 하라는 말로서 영적인면들을 중히 여기는(화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영이 나타나게 되면 진동이 빨라져 육신이 미쳐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거지요.

이것은 아주 과학적인 일로서 진동이 빠를수록 조밀하며 진동이 느릴수록 거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나 홀로목사가 누누이 강조했다시피 물질적이고 육적인 사람들은 영적이기가 어렵다고 했던 겁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예수님이 다름과 같이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이 말씀은 자기 재산이나 가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은 완전히 별개라는 사실을 알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할 것은 물질 지향적이고 육적인 쾌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음 내용을 보면 왜 우리가 이런 결론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14:34)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14:35)

 

소금이 짜야 소금답듯이 영생의 길을 걷고자하는 이는 영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자신 안에 들어앉은 영이신 하나님을 깨달으려는 자가 땅의 소산물인 육신과 물질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해주어도 못 알아듣는다면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영생을 얻을 가망이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주식시장이나 알아보라는 말을 남기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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