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세계를 알려면 가시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거시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지식보다는 느낌을 따라야합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누군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명상을 해보면 진동과 함께 느낌이 너무나 확실한데 막상 단체에 속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다고 했지요.
이것이 바로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단체에 속한 사람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인지라 그들의 수준으로 단체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단체가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이 정답이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정답이 되려면 오답이라 여기는 곳에서도 정답을 찾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물의 실체를 본다는 것은 현상계를 넘어 절대계를 본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떠한 곳에서도 본질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보는 것을 연습합니다.
책을 통해 많은 영적지식을 습득하지요.
이럴 경우 책을 만든 이의 수준을 내 의식수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책을 만든 이가 수준이 낮을 경우 그 낮은 수준을 내가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한 이가 여러 책을 접하게 되면 저자의 다양한 수준을 말하게 되지요.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지만 일괄적이지 못하고 주제가 좌충우돌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누군가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를 일러 스승이라 칭하는 겁니다.
일단 이렇게 스승을 모시게 되면 그가 중심이 되고 절대적으로 신뢰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가시적인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 늘 비판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게 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바깥에서 하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수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을 깨닫는데 있는 것인데 목적의 대상에 혼돈이 왔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이미 완벽함에도 자꾸만 물질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만족이 없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물질도 함께 오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지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불경가운데 보문품에 보면 물질은 보배로운 구슬과 같다 했습니다.
수행자를 영적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도구로 쓰일 뿐 물질은 거추장스러운 옷과 같다는 말입니다.
초발심 때는 물질적인일도 잘 풀리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상이 이래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의 대다수는 이런 현상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일을 당연하게 여겨야하는데 물질적 어려움을 자신의 수행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해석하기에 문제가 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은 하늘을 바라보고 몸은 땅을 향하고 있는 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란 점을 말하는 겁니다.
귀 열린 이만 듣고 귀 막힌 이는 듣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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