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27.

배가번드 2018. 10. 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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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향해 항해하는 홀리(holy)하고 홀로(holo)된 나 홀로 목사입니다.

별로 신통할 것도 없는 매일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요즘 나 홀로 목사의 하루는 무척 바빠졌습니다.

반년 정도 남긴 공사현장의 외형은 완성단계에 접어들었고 내장공사가 한창이라 쉴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다보니 낮 시간 동안은 많이 바빠졌고 퇴근 후에는 성경에 몰입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상하게도 일이 바빠지게 되면 오히려 성경에 매달리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많아집니다.

시간이 많으면 성경에 더욱 많이 매진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성경에 몰입하다보면 두뇌가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하기가 어려워지며 어떨 때는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육신에 속해져있는 두뇌는 영적인 일을 싫어하며 어떻게든 세상일을 즐기길 좋아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육신적인 일에만 몰입할 수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령에 대해 알고 있고 영적인 체험을 했으며 체험 속에 있으므로 영의 일을 거부할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육신을 도구로 하여 영적인 일을 하기위해서는 두뇌를 달래가며 일을 해야 합니다.

간간히 음악을 듣기도하고 영화감상을 해가며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숙소생활을 하다 보니 룸메이트가 있어서 그분이 일찍 들어올 때면 영화감상이나 음악을 들으며 저녁시간을 보내고 늦게 들어올 때는 성경에 집중을 하며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함께 방을 사용하는 분이 골프광이어서 거의 대부분의 저녁시간을 골프를 치는지라 늦게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성경에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늦게 들어와서는 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골프프로그램을 시청하는지라 나 홀로 목사의 수면을 방해하고 있지요.

그럴 때면 이불을 덮어쓰고 깊은 명상 속에 잠기곤 하니 어쩌면 그분이 나에게 행복과 불행을 한꺼번에 주는 것 같습니다.

육신적으로 보자면 불행할 것 같은 일도 영적으로 보자면 행복이라 할 수 있으니 현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늘 행복할 수 있지요.

이렇게 해서 나 홀로 목사는 항상 감사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으며 오늘도 변함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경 속에 빠져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19:1)

 

늘 그렇듯이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며 공생애(公生涯) 초기 사역(使役)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난 곳이지요.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갈릴리는 전통적으로 이방의 고장이기도합니다.

오랜 기간 아수르의 지배를 받은지라 사투리가 심했으며 이곳출신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받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출신이다 보니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많이 받았지요.

유대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오랜 세월 외세에 지배를 받던 곳이어서 생활방식자체가 많이 틀리는데다가 사투리도 심하다보니 믿음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인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출신이지만 요단강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요단강(요르단강)을 넘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이른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약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요단강을 건너 하늘로 올려 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단(Jordan)의 히브리어 뜻은 영원한 강이니 곧 영생을 말한다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영생을 얻은 예수님인지라 사람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9:2)

And great multitudes followed him; and he healed them there.

 

여기에서 병을 고쳤다는 말은 정말 병을 고쳤을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잘못 알고 있던 인식을 바꿔주었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는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

The Pharisees also came unto him, tempting him, and saying unto him, Is it lawful for a man to put away his wife for every cause?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19:4)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19:5)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19:6)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사이에 있었던 의견충돌을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이 알아야할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말씀을 몰라서 이렇게 물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경에 상반되게 기록된 일들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시험했던 거지요.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을 말씀하셨는데 잠시 창세기를 살펴본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인용하신내용에 따르면 누구도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또 다른 성경의 기록을 예로 들며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19:7)

They say unto him, Why did Moses then command to give a writing of divorcement, and to put her away?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19:8)

He saith unto them, Moses because of the hardness of your hearts suffered you to put away your wives: but from the beginning it was not so.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19:9)

And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except it be for fornication, and shall marry another, committeth adultery: and whoso marrieth her which is put away doth commit adultery.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바리새인이 인용한 신명기 내용을 보고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사람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24:1)

When a man hath taken a wife, and married her, and it come to pass that she find no favor in his eyes, because he hath found some uncleanness in her: then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and give it in her hand, and send her out of his house.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아내가 되려니와(24:2)

And when she is departed out of his house, she may go and be another man's wife.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24:3)

And if the latter husband hate her, and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and giveth it in her hand, and sendeth her out of his house; or if the latter husband die, which took her to be his wife;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24:4)

Her former husband, which sent her away, may not take her again to be his wife, after that she is defiled; for that is abomination before the LORD: and thou shalt not cause the land to sin,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for an inheritance.

 

모세가 신명기에서 이혼에 관한율법을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정해주었는데 그러한 일로인해 예수님생존당시 이스라엘에는 이혼이 성행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이혼을 쉽게 하는지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거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혼에 관해 물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했던 것인데 만약 이혼을 해도 된다고 하면 창세기를 들어 공격을 했을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이혼을 해서 안된다하면 신명기를 예로 들어 비난하려 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와 같이 음행한 이유 외에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이게 된 거지요.

이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신명기244절에 몸을 더럽힌 아내를 받아주지 말라는 율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고보니 참으로 이상하다 여겨집니다.

창세기도 신명기도 모세가 지었는데 왜 상반되게 적었을까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니 해답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8절에서 창세기를 들어 해답을 말씀하셨는데 원래 남녀의 결혼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게 성적인 결합을 통해 2세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두 몸이 한 몸이 된다는데(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있다는 거지요.

우리의 원래모습이 남녀구분 없이 완전한 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기위해서는 너와 나의 분별이 없어져야하는데 결혼이야말로 음양의 조화를 통해 완전함을 구현(具現)하는 방법이며 신의 창조력을 실현하는 일인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원리원칙대로만 살아갈 수 없는 탓에 방편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모세는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율법들을 신명기에 기록해놓았는데 현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은 구약의 내용을 보며 아주 불합리하고 남성위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 할지 모릅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241절을 보면 결혼한 후 여성의 순결을 문제시 여겨 이혼을 할 수 있다 말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순결하지 않음을 기뻐하지 않으면 이라고 했으니 문제시여기지 않으면 괜찮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다른 이의 아내가 되라고 말해놓았으니 몇 번을 결혼해도 무방하다는 것이지요.

다만 4절에서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던 사람과 재결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놓았는데 이렇게 말해놓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신명기 5장을 통해서 보았듯이 엄격한 계율을 통해 유전적인 요소가 전승(傳承)되는 일을 없게 하기 위해서이기도하고 무분별한 성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여성을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의 뜻은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지는 신성한 일이며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하는 것 역시 하나님과의 약속을 파기할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서 하는 것인데 또다시 번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능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지요.

알고 보면 이 같은 일은 아주 타당성 있는 행위라 할 수 있는데 만약 아내의 혼전순결을 문제시 여겨 이혼을했다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던 사람을 또다시 맞아들일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아내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속이고 이혼을 한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모세는 기업으로 주신 땅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지 말라 했던 거지요.

신명기를 살펴보면 남성위주로 율법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간음한 이유가 아니면 이혼을 할 수가 없고 여성의 경우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에는 몇 번을 결혼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니 남성들이 불만이 많을듯한데 예수님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이 같은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이해가 갈 겁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9:10)

His disciples say unto him, If the case of the man be so with his wife, it is not good to marry.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불만스러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결혼풍속도를 알 수가 있는데 일부다처제가 당연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지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멋대로 아내를 버리고 또다시 장가드는 일들이 성행했었는데 오히려 여성들에게 유리한쪽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지자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했던 겁니다.

제자들의 불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19:11)

But he said unto them, All men cannot receive this saying, save they to whom it is given.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19:12)

For there are some eunuchs, which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some eunuchs, which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be eunuchs, which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heaven'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결혼을 하고 말고는 운명적으로 타고나야 한다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이거나 사고로 인해 혼자살 수밖에 없거나 영적인 길을 걷기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인데 오늘날의 신부님이나 스님들이 영적인 길을 걷기위해 독신생활을 선택 하신 분들이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을 하고보니 예수님께서는 금욕주의를 표방(標榜)하던 에세네파였다는 생각에 확신이 듦과 동시에 천국을 가기위해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독신수행이야말로 천국에 이르기 위한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라는 생각에 동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 홀로 목사는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되기를 자청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을 하였을 뿐 천국을 가기위한 절대조건으로 독신을 해야 한다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독신수행이야말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될까봐 성경은 다음구절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9:13)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19:14)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19:15)

 

이미 마태복음 26편에서 충분히 설명을 해놓았음으로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더 이상 하지 않겠지만 미리 언급한대로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자 합니다.

다소 유리한 점은 있을지언정 결혼유무가 영생에 이르는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수는 없음입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영원한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이 궁금한 것 같은데 예수님시대에도 누군가가 영생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잠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And, behold, one came and said unto him, Good Master, what good thing shall I do, that I may have eternal life?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9:17)

And he said unto him, Why callest thou me good? there is none good but one, that is, God: but if thou wilt enter into life, keep the commandments.

 

여기에서도 번역에 대한 문제점을 짚고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16절에 선생님이여 한 것이 아니라 선한 선생님이여 했기 때문에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왜 나보고 선한선생님이라 부르느냐고(Why callest thou me good?) 물었던 겁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대답을 하셨는데 이는 성령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대답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 이렇게 기록해 놓은 거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십계명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19:18)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9:19)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1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9:21)

Jesus said unto him, If thou wilt be perfect, go and sell that thou hast, and give to the poor, and thou shalt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and follow me.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9:22)

 

여러분들은 이러한 내용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요?

나 홀로 목사에게는 이 내용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난 20년 세월을 부자청년과 같은 마음자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수행단체에 입문을 하여 다섯 가지의 계율을 목숨처럼 지키며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지요.

예문에서 보듯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청년은 자신이 뭔가를 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참고로 나 홀로 목사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했던 계율에 대해 말해볼까요?

우선적으로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의 계율이고 두 번째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며 세 번째는 도적질 하지 말고 넷째 음란하지 말며 다섯 번째가 술, 담배 마약을 하지 마라였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죽어라고 지켜 나왔으며 지금도 지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과거와는 양상이 달라졌지요.

과거에는 육신이 완전해 질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계율을 지켜 나왔으나 이제는 육신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지켜야한다 생각합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육신으로 완전해 질 수 있다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나 홀로 목사의 경험을 거울삼아 생각을 고치시기바랍니다.

나 홀로 목사의 경험으로 볼 때 완전하게 계율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불살생한가지만 보더라도 우리들은 완전할 수가 없는데 숨 쉴 때마다 수십억의 생명들이 죽어가며 물을 마실 때조차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있지요.

그리고 나머지 계율역시 마음으로부터 짓는 죄도 죄악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죄를 짓지 않는 육신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알았기에 예수님말씀의 뜻을 곧바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예문에서와 같이 부자청년은 자신이 노력한 결과물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는데 스스로의 노력으로 계율을 지킬 뿐 아니라 수고한 대가로 인한 재물을 많이 쌓아두었으므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진정한 뜻은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영의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나면 하늘에서 보화가 내려온다 했던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19:23)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9:24)

 

만약 이 말씀을 부자들은 무조건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 또한 웃기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앞서 부자청년에 대해말씀하신 끝에 덧붙인 말로서 하나의 비유의 말이지요.

우리가 보았다시피 부자청년은 자신이 십계명을 아주 열심히 지켜왔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으며 재산도 많이 가졌으므로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놓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의 자신의 것(육신, 물질)을 붙들고 있는 한 영을 알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비유로서 하신말씀인지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19:25)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But Jesus beheld them, and said unto them,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보다 어렵다했지만 그조차도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이는 분명 영에 대한 이야기이며 언젠가 나 홀로 목사가 영의 세계는 부증불감 하다고 했던 말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했지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Then answered Peter and said unto him, Behold, we have forsaken all, and followed thee; what shall we have therefore?

 

이번에도 성질 급한 베드로가 제일먼저 나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따랐으니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거지요.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And Jesus said unto them, Verily I say unto you, That ye which have followed me, in the regeneration when the Son of man shall sit in the throne of his glory, ye also shall sit upon twelve thrones, judging the twelve tribes of Israel.

 

여기서도 번역에 대한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in the regeneration을 세상이 새롭게 되어 라고 했는데 이는 분명 영적인 부활을 뜻하는 겁니다.

인자는 예수님이니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제자)들안에서 부활을 하게 되는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세상이 새롭게라고 받아들이면 지금의 세상이 멸망하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거지요.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며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이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보좌에 앉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 안에서 성령으로서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도자들의 내면에서 성령이신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부활했을 때의 일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상속하리라(19:29)

And every one that hath forsaken houses, or brethren, or sisters, or father, or mother, or wife, or children, or lands, for my name's sake, shall receive an hundredfold, and shall inherit everlasting life.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영생을 얻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버린 자들은 다음세상에서 물질적인 복을 백배이상 받게 되며 영생을 얻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윤회사상이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도 윤회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는 영생을 주려고 했기에 드러내놓고 말씀하지는 않았던 거지요.

사실 윤회사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만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통해 간간히 비유로서만 언급하고 속 깊은 이야기는 피해갔는데 그이유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는데 혼란을 주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게 되면 윤회사상에 대한 나 홀로 목사의 의견을 말씀드리기로 하고 19장의 마지막 구절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But many that are first shall be last; and the last shall be first.

 

앞서 보신대로 다 같이 예수님을 위해 육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버리고 따랐지만 어떤 이들은 이번 생을 사는 동안 영생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을 수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다음 생을 기다려야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많은 제자들이라고해도 곧바로 영생을 얻지 못할 수 있으며 훗날 제자가 된 이들이 먼저 영생에 이를 수 있다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을 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분명한 사실하나는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19장을 모두 마친 것 같은데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관계로 오늘은 여러분과 한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상고해보는 시간을 갖고자합니다.

예문을 통해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아주 지혜롭게 비켜 가신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날 가톨릭교도들은 이혼을 극구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은 이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요즘의 한국 사회는 이혼율이 높기로 유명한데 과연 이혼이란 해서는 안 되는 일일까요?

각자의 개인의견이 분분할 것이 분명하지만 성경적으로 보자면 분명히 간음을 한 이유 외에는 이혼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9절 말씀 중에 우리들이 깊이 있게 상고해봐야 할 단어들이 있습니다.

음행한 이유 외에는(except it be for fornication, and shall marry another, committeth adultery) 이혼을 해서 안 된다고 했는데 음행에 해당되는 단어fornication 에는 사통과 불륜이외에 우상숭배라는 뜻도 있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이 단어를 예로 들어 문제시여기는 이유는 간음에 해당하는 adultery는 간통, 간음, 불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뜻을 가진 단어를 동시에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헬라어 성경에는 fornication에 해당하는 단어로 포르네이아(porneia)가 사용되었는데 영어성경 NIV 에서는 부부간의 불성실(marital unfaithfulness)로 해석을 했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하나의 해석도 광범위해질 수 있습니다.

불륜이라는 말도 범위를 정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확대 해석할 수도 있고 적용범위를 좁힐 수도 있습니다.

혼외정사는 모두가 불륜이라 규정지을 수도 있으며 유부남 유부녀가 눈이 맞아 바람이 나는 일에 국한시킬 수도 있다는 거지요.

이러한 연유(緣由)로 일부 이슬람국가에서는 혼외정사를 한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오늘날 문명국가를 자처하는 선진사회에서는 반대로 불륜을 미화시키기까지 합니다.

간통죄가 점점 없어지는 이유는 성인남녀가 합의하에서 하는 성행위는 사랑으로 보기 때문이지요.

이 같은 일을 종합해 볼 때 나 홀로 목사는 이혼을 하는 행위에 대한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고자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행위자 자신 내면의 성령이 반드시 잘잘못을 가린다는 거지요.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비록 그 행위가 사랑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인데 이 같은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입장을 바꿔보면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배우자 몰래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 했을 때 자신의 배우자역시 그러한 행위를 해도 용서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면 자신이 심판받을지 말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가 경험해본결과 배우자 외에 다른 이와 사랑행위를 하는 사람치고 자신의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을 용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있기도 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가 싫증이 나서 이미 마음이 돌아선 사람이었지요.

따라서 나 홀로 목사에게 불륜에 대해 묻는다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명백하게 인식하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는데 영적인 일을 몰랐을 때 저지른 그 어떠한 일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보았듯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 했으니 또다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고 타인을 향해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 있는 것이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영원히 죄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근한 예로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백정이 칼을 놓으면 부처다

 

이 말은 정육점 하시던 분이 하던 장사를 때려치우고 더 이상 고기를 팔지 않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물질적인 마음을 돌이켜 영적인 길로 접어든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회개하고 천국복음을 받는 것과 동일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가끔씩 주변을 살펴보면 영적인 일조차 물질적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얻게 된 영적인 체험과 능력으로 인해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해도 무방하다 여기며 과거에 행하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있는데 뭔가를 잘못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알았듯이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대제사장의 지위인 멜기세덱의 칭호를 받은 인물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더올라갈 자리가 없는 왕의 신분이었으며 영적으로도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멜기세덱의 반차에 올랐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가난한 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인의 위치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야만 했는데 그이유가 육신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영생을 확보해놓았다 할지라도 육신으로 지은 죄는 육신이 갚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은 다윗의 일을 예로 들어 기록해놓은 것이지요.

부디 이곳을 오시는 여러분들만큼은 자만의 마음을 먹지 마시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걸어가시라 당부 드리며 오늘의 성경강해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살아서 백년 살기보다

죽어 천년 살기를 원한다면

죽기를 선택할 것이고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서 천년을 살기보다

이 세상에서 백년 살기를 원한다면

살기를 원할진대

 

죽고자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니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살아서 죽지 못하면

죽어서도 살지 못할 것이요.

 

죽어서 살지 못하면

죽지 못해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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