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참석하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시작에 앞서 지난시간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지라 어쩔 수 없었지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며 그때는 우리가 서로 약속한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올 때 우리각자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낼지 정해놓고 온다고 볼 수 있는데 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마칠 때가 있다는 것은 시공간이 제한된 이세상의 법칙과 같은 겁니다.
우리인생도 어느 날 느닷없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며 그때가 어느 때인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그때가 온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나 홀로목사의 강해도 제한된 육신의 삶을 통하여 영원한세상의 성령을 깨닫기 위함이지요.
이곳을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이 이점을 깨닫고 제한된 육신의 삶이 끝나기 전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나시길 바라며 요한복음5장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I can of mine own self do nothing: as I hear, I judge: and my judgment is just; because I seek not mine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Father which hath sent me.(KJV)
By myself I can do nothing; I judge only as I hear, and my judgment is just, for I seek not to please myself but him who sent me.(NIV)
30절 내용은 너무나 중요해서 두 가지 버전의 영어성경을 함께 올렸습니다.
첫 번째 KJV를 직역해보면 나의 하는 것(I can of mine)은 나 스스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own self do nothing)입니다.
같은 대목을 NIV 버전으로 해석해보면 내 스스로(By myself) 할 수 있는 것은(I can do) 아무것도 없다(do nothing) 이지요.
비교해보면 한글성경은 NIV를 해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KJV를 보게 되면 풍기는 뉘앙스가 많이 다릅니다.
NIV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KJV내용은 내가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나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NIV는 행위자를 자신에 국한시키는 반면 KJV는 행위자와 의지력을 가진 자를 구분 짓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듣는 대로 심판한다 했습니다.(as I hear, I judge)
이 말은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는 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것이나 자신의 의지를 찾지는 않으며(I seek not mine own will)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의지를 찾는다고 했습니다.(but the will of the Father which hath sent me)
그런데 NIV는 같은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요.
나 자신의 즐거움(기쁨)을 찾지는 않으며 나를 보낸 이를 찾는다 했습니다.(I seek not to please myself but him who sent me)
두 경우 모두 육신(나)의 의지보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심도 있게 상고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대로 한다고 했으며 듣는 대로 심판한다고 했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말씀해주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지요.
서두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서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것은 (I can of mine own self do nothing)내가하는 일 모두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만났으며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행동한다는 뜻이지요.
이해가 되셨나요?
부디 이해가 되셨길 바라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요5:31)
If I bear witness of myself, my witness is not true.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5:32)
There is another that beareth witness of me; and I know that the witness which he witnesseth of me is true.
3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스스로 증거를 드러내면 그 증거는 참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절에는 예수님을 위해 증거 하는 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따라서 위내용을 종합 해볼 때 육신의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고 해서 참되다 말할 수는 없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명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증거하고 있을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5:33)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5:34)
But I receive not testimony from man: but these things I say, that ye might be saved.
요한이 진리에 대해 입증하였다는 것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말했던 상황을 가리킵니다.(33절)
그러면 잠시 요한의 증거말씀을 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요한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이 담긴 그릇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요한의 증거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증명하고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 하셨는데(But I receive not testimony from man)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를 높이려 해서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34절)
결국 이 말씀은 요한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이신 하나님말씀을 믿는다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겁니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요5:35)
He was a burning and a shining light: and ye were willing for a season to rejoice in his light.
보시다시피 요한을 등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빛이신 성령을 가리키며 사람들이 빛(성령)안에서 즐기기를 원하였다 묘사하고 있지요. (35절)
그런데 재미난 것은 요한을 불타면서 반짝이는 빛으로 표현했다는 겁니다.(a burning and a shining light)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겪은 체험과 흡사한데 잠시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3:2)
And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unto him in a flame of fire out of the midst of a bush: and he looked, and, behold, the bush burned with fire, and the bush was not consumed.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다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소모되지 않는다.” 입니다.(the bush was not consumed)
나무에 불이 붙었으면 당연히 재가 발생되어야 하는데 이 불꽃은 내면의 불꽃, 즉 성령이기에 나무를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바로 요한이 이러한 상태(깨달음을 얻음, 성령이 깨어남, 득도)에 도달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5:36)
But I have greater witness than that of John: for the works which the Father hath given me to finish, the same works that I do, bear witness of me, that the Father hath sent me.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5:37)
And the Father himself, which hath sent me, hath borne witness of me. Ye have neither heard his voice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5:38)
And ye have not his word abiding in you: for whom he hath sent, him ye believe not.
이 내용은 조금 어렵게 번역되어있는데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이 요한보다 더 큰 증거를 가진 이유가(I have greater witness than that of John) 아버지께서 주신 이루게(마무리)하는 역사 때문이라는 겁니다.(for the works which the Father hath given me to finish)
요한이 성령을 깨달은 사람은 맞지만 그가 중간에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니 임무를 완성치 못했다는 말이지요.(35절에 일시적으로 머물고자 했음을 기록하였음)(ye were willing for a season to rejoice in his light)
요한도 예수님도 다 같이 성령을 드러낸 분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는 역사가(the same works that I do)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증거라는 거지요.(bear witness of me, that the Father hath sent me)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신 성령이 예수님 몸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37절에서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 하셨다고 한 것이며 자신이 하는 일 모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과 동일하고 자신을 입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너희는 어느 때고(아무때나) 하나님음성을 듣지도 못하였고 형상을 본적도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령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Ye have neither heard his voice at any time, nor seen his shape)
성령이 드러나면 언제든지 하나님말씀을 듣고 볼 수 있다는 말이며 앞서 말한 대로 성령이 드러난 스승을 만나 일시적으로 보고 들을 수는 있지만 어느 때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스승을 만나도 항상 성령을 보고 듣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했지요.(38절)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스승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좀 더 예수님말씀에 집중해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Search the scriptures; for in them 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and 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
And ye will not come to me, that ye might have life.
이제 한 가지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라 말씀하셨고(Search the scriptures) 그들 안에서(성경 안에서)(in them)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생각하라 하셨지요.(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그것들이(성경의 말씀들이) 나(예수)를 증명하는 것이라 했습니다.(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
즉, 성경을 볼 때 그 말씀들이 성령(예수님)의 입장에서 혹은 성령을 드러내는 방법을 설명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40절에서 너희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오지 않는다 하신 겁니다.
제자들 중 상당수는 예수님의 육신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예수의 몸을 신격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한 거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상숭배를 경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
I receive not honour from men.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But I know you, that ye have not the love of God in you.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43)
I am come in my Father's name, and ye receive me not: if another shall come in his own name, him ye will receive.
보시다시피 예수님의 육신에 대한 숭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요.(41절)
그리고 오로지 사람들이 육신예수의 기적에 대한 일들만 생각하고 정작 얻어야할 영생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42절)
43절에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씀은(I am come in my Father's name) 성령으로 왔다는 말씀이며 영접치 않는다는 말은(ye receive me not) 육신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가 자기이름으로 오면 영접할거라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성령이나 영생을 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스승을 더 좋아할 거라는 말인데 그만큼 성령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말씀까지 하였을까를 생각하니 나 홀로목사의 가슴 또한 답답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존당시나 지금이나 우상숭배의 늪은 무서운 것인데 과연 해결방법은 없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예수님말씀에 귀 기울여 보도록 하지요.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How can ye believe, which receive honour one of another, and seek not the honour that cometh from God only?
육신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서로 영광을 취한다고(receive honour one of another) 비유했는데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지요.
이러다보니 정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일한 것을 어떻게 믿겠냐는(How can ye believe)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성령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일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니, 곧 성령을 뜻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지요.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5:45)
Do not think that I will accuse you to the Father: there is one that accuseth you, even Moses, in whom ye trust.
예수께서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고소한다 말한 것은 심판하는 것이 육신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예수가 아니라 영의 세계에 있는 모세가 심판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해놓은 거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니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믿음의 형태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은 모세오경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모세가 이들 신앙의 핵심이었던 겁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거지요.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5:46)
For had ye believed Moses, ye would have believed me; for he wrote of me.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5:47)
But if ye believe not his writings, how shall ye believe my words?
진정으로 모세를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의 내용이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46절)
그런데 47절에 예수께서 그의 글도 믿지 않는데 어찌 내말을 믿겠느냐 하신말씀은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은 모세오경을 절대적으로 믿었고 모세를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의 요지는 모세가 남긴 성경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만큼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신앙의 깊이가 육적이고 물질적인데 머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머물렀던 2천 년 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거듭남의 역사가 2천년 넘게 이어오고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예수육신의 부활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부디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만큼은 이 같은 망령된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시길 기원하며 5장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세상을 다녀간 수많은 선각자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믿는 자들이
어찌 육신의 완벽함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 누구라도 완벽한 육신을 가졌더라면
아직 세상에 남아 있을 터 이지만
누구도 이 땅에 남아있지 못하도다.
영의 세상이 시공이 무너진 곳이라
말은 들었으나 이해는 못하기에
영생의 하늘을 육신으로 갈 수 있다 믿도다.
누구라도 육신으로 하늘에 오를 수 있다면
그 하늘은 영생의 하늘이 아니요
그 몸도 성령이 아니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