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더위가 절정에 이른걸 보니 가을이 가까워졌나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절정은 곧 쇠락의 첫출발점이지요.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멸망은 곧 구시대의 종착점인 동시에 창조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멸망과 창조는 한곳에서 만난다 하는 겁니다.
흔히들 종교가들은 현시대를 일러 말세라 말하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 하지만 다들 틀린 해석입니다.
경전이 말하는 멸망이란 육적자아가 멸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영적자아인 성령이 내안에서 되살아나는 것이 부활이지요.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차례 설명했기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아직까지 육신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된 믿음아래 놓여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멸망과 부활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육적 자아와 영적자아의 전쟁에서 영적자아가 승리했을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 홀로목사가 여러분과 함께 하는 동안 일어나야 하는 일이며 일어날 일입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이런 영광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6장의 문을 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요6:1)
After these things Jesus went over the sea of Galilee, which is the sea of Tiberias.
여러 번 말했다시피 갈릴리(원, 순회, 지역)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디베랴의 뜻은 “좋은 관찰”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예수께서 뭔가 좋은 것을 살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비유한 겁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요6:2)
And a great multitude followed him, because they saw his miracles which he did on them that were diseased.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요6:3)
And Jesus went up into a mountain, and there he sat with his disciples.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6:4)
And the passover, a feast of the Jews, was nigh.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자들에게 행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지요.(2절)(they saw his miracles which he did on them that were diseased)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예수께서 육신적으로 병든 이를 고친 것보다 영적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병든 이들을 치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었습니다.
그러니 2절에 예수를 따르는 이들도 당연히 영적인 치유를 바라고 모여든 걸로 봐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산에 올랐다고 한 것이며 영적으로 높은 가르침을 주신다는 뜻이지요.(3절)
마찬가지로 4절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어야 됩니다.
그때껏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던 유월절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신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같은 일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요6:5)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6)
눈을 들어 보았다는 것은 높은 영적인 눈, 즉 혜안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인 빌립에게 어디에서 떡을 사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냐는 시험을 하신거지요.
또한 저자 요한은 이일을 통해 영안이 열린 예수님과 제자들의 인식에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한 겁니다.
다음 내용을 보면 이 말이 이해됩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6:7)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 오되(요6:8)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요6:10)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6:11)
제자들 모두는 이 상황을 물질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비유의 가르침으로서 담긴 뜻이 있지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있는 같은 내용을 잠시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
니이다(마14:17)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마14:18)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
니(마14: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6:37)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막6:38)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막
6:39)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막6:40)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
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막6: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눅9:13)
이는 남자가 한 오천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명씩 앉히라 하시니(눅9:14)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눅9:15)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눅9:16)
각 복음서마다 같은 내용을 약간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마태복음22편과 마가복음9편, 누가복음 13편에 상세하게 해놓았지요.
이 내용들에 대해 각 복음서마다 다양한 해석을 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라며 이곳에서는 더 이상의 해석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이 아니라 말씀의 떡으로 사람들을 영적인 세계로 낚아 올린(들어올린) 일을 비유했다는 사실만 아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이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며 조만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요6:12)
When they were filled, he said unto his disciples, Gather up the fragments that remain, that nothing be lost.(KJV)
When they had all had enough to eat, he said to his disciples, "Gather the pieces that are left over. Let nothing be wasted."(NIV)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요6:13)
12절을 KJV로 보면 배부른 후에 해당하는 부분을 “채웠다” 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they were filled)
그렇지만 NIV는 충분히 먹은 후에로 기록하고 있지요.(they had all had enough to eat)
나 홀로목사가 늘 주장하듯이 이 내용은 KJV로 해석되어야하고 그럴 경우 말씀으로 충만해졌을 때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되면 13절에 언급된 열두 바구니는 제자 열둘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 내용을 하나님의 은혜(떡 다섯 개=5=은혜의 숫자)로 충만하여 삼위일체(3=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4=사람의 숫자)의 연합(3×4=12)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요.
우리의 목적이 영생에 있으니 당연히 영적인 해석을 해야 하며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해석도 상관없습니다.
초점을 영생에 맞추게 되면 당연히 영적인 해석을 내놓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 말씀의 떡을 먹었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겁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6:15)
When Jesus therefore perceived that they would come and take him by force, to make him a king, he departed again into a mountain himself alone.
오병이어의 내용을 말씀의 떡으로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영생을 얻게 해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예언된 선지자라 칭송한다고 했습니다.(14절)
그렇지만 물리적 기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잡아 물질세계의 왕으로 떠받들려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난다고 기록한 겁니다.(15절)
예수(성령)는 물질세계와는 무관하다는 뜻에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며 물질세계의 왕보다도 더 높은 영계의 왕이라는 뜻으로 산으로 떠난다 했지요.
이렇게 예수님이 산으로 가버리신 후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요6:16)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요6:17)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요6:18)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요6:19)
So when they had rowed about five and twenty or thirty furlongs, they see Jesus walking on the sea, and drawing nigh unto the ship: and they were afraid.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요6:20)
But he saith unto them, It is I; be not afraid.
16절의 바다는 세상을 비유한 겁니다.
앞에 3절에서 산에 올랐다고 한 것은 높은 영적세계를 뜻한다 했으니 예수님의 영적가르침을 받고 높이 고양된 의식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런 후에 사람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러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바다로 내려간 걸로 묘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7절에서 가버나움으로 간다고 했던 겁니다.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의 뜻은 “위로, 동정”입니다.
사람들을 위로하고 동정하러 배를 타고 갔다고 했으니 복음을 전하러 세상으로 나간 것이 맞지요.
그런데 17절 뒷부분에 이미 어두웠고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했는데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 성령(예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던 겁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어려움을 마주치게 된 거지요.(18절)
하지만 제자들은 멈추지 않고 영적항해를 계속해나갔고 마침내 예수(성령)를 만나게 되었습니다.(19절)
그런데 19절 말씀을 가만히 보면 뭔가 이상한점이 발견됩니다.
한글성경에는 예수께서 배 가까이 오셨다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그 반대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걷는 것은(Jesus walking on the sea) 맞는데 배 가까이 끌어당긴다고 했지요.(drawing nigh unto the ship)
이렇게 되면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는 구원의 방주이자 믿음의 방주이며 제자들이 영적항해에서 어려움에 처하자 내면의 성령이신 예수가 나타나서 제자들을 안전한 방주로 끌어당긴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한글성경은 NIV를 해석했음)
우리가 구도의 길을 걷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영적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처음으로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되면 무척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벼락 치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지진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는가하면 빛을 보기도하며 신령스런 존재를 만날 수도 있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제자들이 무서워했던 것이며 예수께서 두려워 말라 하셨던 겁니다.(20절)
사실 이 말씀은 당일 말씀하였다기보다 평소 가르침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구도의 과정에서 겪게 될 일을 예수께서 미리 가르쳐주었기에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했던 거지요.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6:21)
제자들이 기뻐서 예수(성령)를 영접하자 그들이 원하던 땅(영생)에 즉시 도달했습니다.(21절)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마음에 성령이 되살아났는지요.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해석에 동조하시겠지만 아직도 이 내용이 비유의 가르침이라 여겨지지 않는다면 같은 내용을 다르게 기록한 마태복음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마14:2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14:24)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14:25)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14:26)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
요한복음과 비교해본 결과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결국 이 내용은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말이지요.
아직도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고 믿는다면 마가복음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완전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막6:4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막6:46)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막6:47)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
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6:48)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6:49)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막6:50)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막6:51)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
이러라(막6:52)
요한복음은 가버나움으로 간다고 했는데 마가복음에는 벳세다로 갔다 했습니다.
가버나움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의 뜻은 “위로, 동정” 이라 했으니 제자들이 복음전파에 나선 거라고 말했었지요.
마찬가지로 벳세다의 뜻은 “사냥꾼의집, 고기잡이의 집, 어촌”등입니다.
이 역시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영적인 세계로 잡아들인다는 뜻이지요.
결국 두 복음서가 지명을 달리 기록했지만 뜻은 같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가복음 52절에서 제자들이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 것은 이 말씀 역시 비유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둔하여 담긴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이 내용이 비유의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리라 생각되며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복음22편과 마가복음9편에서 상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비교를 해보는 것이 이해하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언급해 본겁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확실히 설명하기 위해 마태, 마가복음을 되짚어보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당시 나 홀로목사가 강해한 내용이 지금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요.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강도 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가 어른 양만큼 먹으면 소화시키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으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의 강해내용보다 요한복음의 강해내용이 깊이가 더 있다는 거지요.
과연 여러분이 얼마만큼이나 나 홀로목사의 말을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나 홀로목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영생을 얻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완전히 둘로 갈라지는 경험을 한 후부터 그때껏 하고 있던 일상이 허무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날 이후로 내 삶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으며 내가 걸어야했던 길은 풍랑을 만난 배처럼 위태로웠으며 뒤집힐 위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5년을 쉴 새 없이 정진해 나왔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삶이 평탄해진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성령을 깨닫는다 해서 어려움과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어려움과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것은 물질적 삶을 벗어나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특권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고통과 괴로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없다면 영생의 하늘은 멀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믿음의 끈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영생의 하늘로 인도하실 겁니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시간을 여기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볼 수도 있고
눈을 내리깔고 땅을 볼 수도 있네.
하늘을 우러러보매 새를 볼 것이요
땅을 내려다보매 뭇짐승들을 볼 것이다.
허나, 영안으로는 이모든 것을 한눈에 볼지니
시공간이 한 점에 담긴 까닭일지라.
육안이 볼 수 있는 것은 육의 것이요
영안으로 보는 것은 천지간을 넘은 것이니
귀 열린 이들만 들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