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31.

배가번드 2018. 10. 2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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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신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걸어가는 나 홀로목사의 성경연구시간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난시간에 있었던 영혼과 영생의 문제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각자의 인식정도에 따라 궁금한 점들이 모두 다를 것인데 초등학교수준이라면 초등학생다운 질문을 할 것이고 대학생이면 대학생다운 질문을 하겠지요.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대답을 해주게 되면 나 홀로목사의 몸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궁금한 점들을 모두 해소해드리지는 못하고 있으며 그저 영생에 관련된 질문만 접수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곳은 예수를 숭배하고 떠받들기 위한 곳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1+1=2로 알고 있고 그렇게 배우고 있지요.

하지만 나 홀로목사는 1+1=1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적이고 물질적인 세상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겁니다.

사과 반쪽과 반쪽이 합하여지면 온전한 하나가 되듯이 남녀가 만나 하나를 이룰 수 있으며 백사람과 백사람이 합하여져도 하나가 될 수 있고 수만 명이 합하여져도 하나 안에서 여럿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귀 열린 자들만 듣기를 바라며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22:1)

And Jesus answered and spake unto them again by parables, and said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2:2)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unto a certain king, which made a marriage for his son,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22:3)

And sent forth his servants to call them that were bidden to the wedding: and they would not come.

천국을 혼인잔치에 비유했으니 청한 사람들이란 천국으로 들어오라고 권유받은 사람입니다.

종들이란 천국복음을 전해주는 이들로서 성직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지요.

아들의 혼인잔치라 비유했지만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영광된 자리인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으려하니 하나님(임금)은 또 다른 이들을 보냅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22:4)

Again, he sent forth other servants, saying, Tell them which are bidden, Behold, I have prepared my dinner: my oxen and my fatlings are killed, and all things are ready: come unto the marriage.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22:5)

But they made light of it, and went their ways, one to his farm, another to his merchandise:

   

이번에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오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했는데 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천국에 오라는 말보다 세상 것을 귀하게 여겼다는 거지요.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았다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가볍게 여겼다(they made light of it)입니다.

천국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다보니 돌아보지도 않았다했고 한사람은 자기 밭으로 또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다했으니 세상 것에 관심이 더욱 많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육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목사가 수없이 반복적으로 영생을 얻으려면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왔지만 자신의 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22:6)

And the remnant took his servants, and entreated them spitefully, and slew them.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그렇다할지라도 복음전하는 이들을 잡아 욕보이고 죽이기까지 하니 이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는지요.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22:7)

But when the king heard thereof, he was wroth: and he sent forth his armies, and destroyed those murderers, and burned up their city.

표면적으로 보면 잔인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하고 있지요.

무고한 이를 해하면 벌 받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복음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뿐일 것을 욕보이고 죽인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영적수준이 물질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짐승과 같아서 천국복음을 전해주는 이를 원수처럼 여겼기에 욕보이고 죽였다는 것을 반어적인 비유로서 표현했지요.

그만큼 영생을 얻기가 어렵다는 말이며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22:8)

Then saith he to his servants, The wedding is ready, but they which were bidden were not worthy.

이 말씀은 천국의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자격을 갖춘 이들은 적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인일보다 영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이가 드물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이 보입니다.

청한 사람들이 합당하지 않다했는데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여기에는 뭔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으니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지요.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22:9)

Go ye therefore into the highways, and as many as ye shall find, bid to the marriage.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22:10)

So those servants went out into the highways, and gathered together all as many as they found, both bad and good: and the wedding was furnished with guests.

예문을 올리고 보니 청함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보이고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이들은 때가 되어 천국으로 부름 받을 사람들이었으며 시절인연이 도래한 사람들이었지요.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영혼들이었다는 것을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으로 표현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일에 너무나 깊숙이 빠져들어 헤어나지를 못하였으며 개중에는 천국복음을 전해주는 이의 손길을 뿌리칠 뿐 아니라 해치는 짓까지 했다는 것을 말해놓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9절과 10절에서 말한 손님들은 아직 인연이 무르익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22:11)

And when the king came in to see the guests, he saw there a man which had not on a wedding garment: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22:12)

And he saith unto him, Friend, how camest thou in hither not having a wedding garment? And he was speechless.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22:13)

Then said the king to the servants, Bind him hand and foot, and take him away, and cast him into outer darkness, there shall be weeping and gnashing of teeth.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

For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

여기까지 읽어보니 어떻습니까?

조금 이상하지 않았는지요.

하인들을 보내 아무나 마구잡이로 데려오라 해놓고 예복을 안 입고 왔다고 손발을 묶어 어두운데 내던지니 제정신가진 사람들이라면 이상하다 여겨질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이니 분명 담겨진 뜻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예복을 입지 않았다 했는데 이 말씀은 기본적인 인식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주지요.

친구여 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며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은 천국(혼인잔치)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에서 손발을 묶어 어두운데 던지라한 것은 그 사람의 영적수준이 무저갱(無低坑)에 떨어질 만큼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국에 이를 수 있게 허용해 놓고 있지만 각자의 인식정도가 그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영적이지 못하고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암흑과 같은 이세상의 고통 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게 지혜로운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말씀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예수님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기를 바라며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22:15)

Then went the Pharisees, and took counsel how they might entangle him in his talk.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22:16)

And they sent out unto him their disciples with the Herodians, saying, Master, we know that thou art true, and teachest the way of God in truth, neither carest thou for any man: for thou regardest not the person of men.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22:17)

Tell us therefore, What thinkest thou? Is it lawful to give tribute unto Caesar, or not?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22:18)

But Jesus perceived their wickedness, and said, Why tempt ye me, ye hypocrites?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22:19)

Shew me the tribute money. And they brought unto him a penny.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2:20)

And he saith unto them, Whose is this image and superscription?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2:21)

They say unto him, Caesar's. Then saith he unto them, Render therefore unto Caesar the things which are Caesar's; and un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22)

When they had heard these words, they marvelled, and left him, and went their way.

이 내용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시험을 한 것인데 그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가 로마정부에 세금을 바쳐야했는데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말하면 로마인들에게 고발을 당할 것이고 세금을 내야한다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사람들로서는 로마에 세금 내는 것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기회만 닿으면 로마식민지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했지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했던 겁니다.

16절 내용 중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외모로 따지지 않는다고 칭찬한 것은 로마인들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식이니 세금 내는 것이 옳다는 말을 하도록 유도하기위한거지요.

날이 갈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어떻게든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지혜로운 말씀으로 곤경을 벗어났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물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가이사에게 물질을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했으니 이보다 명쾌한 답이 없지요.

세금을 내야한다 내지 말아야한다 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돌려 말함으로서 질문자체를 원점으로 돌려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면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내지 말아야한다 말씀하신 걸까요?

대다수 사람들이 내야한다 말씀하신 걸로 생각하는군요.

나 홀로목사가 생각건대 예수님께서는 세금 내는 당사자들이 알아서하라는 말씀을 하신 걸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가이사이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하겠지만 가이사를 포함하여 모든 세상 것은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께 바쳐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 여겨지면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사실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간파하시고 그들의 간계를 무산시킨 것을 말한 것 일뿐 실지로 세금을 내는데 있어서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情緖)를 보자면 세금을 어떻게든 안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고 로마정부는 반대로 기를 쓰고 세금을 거두려 노력했을 테니까요.

생각할수록 예수님은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가볍게 넘어선 예수님의 다음 행적이 어떨지 몹시 궁금해지는군요.

다 같이 따라가 보겠습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22:23)

The same day came to him the Sadducees, which say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and asked him,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영의 세계에 대해 믿지 않았으며 지극히 현실주의자들로서 모세오경만을 믿는 이들입니다.

앞 구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시험을 했는데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시험을 하고 있으니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다양한 시험을 받은 셈이지요.

어떤 내용의 시험이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22:24)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22:25)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22:26)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22:27)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22:28)

이 내용은 구약을 인용한 것이니 잠시 구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25:5)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25:6)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25:7)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25:8)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25:9)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25:10)

이 내용을 보면 모세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추정(推定)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에는 부족 간에 싸움이 잦았지요.

그러다보니 과부가 많이 생겨났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계문제가 대두(擡頭)되었을 겁니다.

이러한 해결책으로 자연스럽게 전사자 형제가족을 다른 형제가 떠맡는 율법이 생겨난 거지요.

나 홀로목사의 성장시기에는 이웃나라 일본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오랜 옛날 생겨난 풍습이 고착화되어 제도(制度)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경우이며 이스라엘에서는 모세가 세운 율법이 예수님시대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저 하나의 풍습이나 관습이 지켜지느냐 마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대명제가 걸려있기 때문이지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과는 거리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23)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22:30)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22:31)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22:32)

여기서도 구약이 인용되었는데 잠시 살펴본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3:2)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3:3)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3:4)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3:6)

모세오경이 담고 있는 내용은 지극히 비유적이고 은유(隱喩)적이어서 해석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구약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특히 모세오경의 내용은 이스라엘에서 전승되어오는 비밀교의에 의한 것이 많아 단시간에 풀어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훗날 기회가 주어져 구약만 다루게 될 때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고 지금의 시간에는 약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 내용은 모세가 깊은 묵상(黙想)속에서 하나님과 만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타지는 않는다고 한 내용을 들 수 있습니다.

떨기나무라고 묘사되어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내면세계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5절에서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신발신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6절에서 조상의 하나님이라 한 것은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나타난다는 말로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무소 부재한 힘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 설명하기를 시집장가도 가지 않고 천사들과 같이 된다 했던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죽어서 영적으로 부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말이지요.

죽어서 부활을 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말이니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생을 뜻합니다.

그때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신으로 부활한다 생각했기에 사두개인들이 그러한 질문을 했던 겁니다.

이 같은 생각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라 해서 별다를 바 없습니다.

육신으로 부활을 한다 여기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기 바랍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부분이지만 육신의 몸으로서 부활이 아니라 영체(靈體)로서의 부활이라는 것만 말씀드리며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22:34)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22:35)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22: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22:38)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9)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40)

이 말씀 역시 구약을 인용하신 것인데 잠시 살펴본 후 돌아오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사랑하라(6:5)

An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ght.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Thou shalt not avenge, nor bear any grudge against the children of thy people, but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I am the LORD.

구약과 신약을 비교해보면 그다지 차이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계명은 신명기에 기록된 내용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둘째계명은 레위기의 내용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한 겁니다.

38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 해놓고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다 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두가지가 율법 중에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말씀이며 선지자들의 가르침 중에서도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구약의 내용을 인용해가며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 같은 이유를 알아보려면 다시 한 번 더 구약의 레위기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함께 보시죠.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너희 각 사람부모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9:3)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19:4)

이 내용은 모세에게 여호와하나님이 규례와 법도를 말씀해준 내용인데 2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합니다.

그이유가 여호와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 말씀인즉 이스라엘사람들(하나님을 믿는 사람)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하나님만 생각하는 날)을 지키라 했던 겁니다.

4절 말씀역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을 안다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니 우리자신이 거룩해지는 일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을 예수님께서 인지하고 계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난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고쳐주기 위해 영의 세계에 대해 설명 해주십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22:41)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22:42)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22:43)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22:44)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22:45)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46)

44절의 내용은 시편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인데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기 위해 시편을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110:1)

The LORD said un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예문을 올리고 보니 언젠가 만물 안에 성령이 깃들어있다라는 소제목으로 나 홀로목사가 다룬 적이 있던 내용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이미 말씀해 놓았던 만큼 이 시간에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앞에 써진 The LORD는 여호와 하나님이며 뒤에 나오는 my Lord는 다윗의 영혼을 나타내는데 이 장면을 연상해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의 영혼이 기름부음(그리스도)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해 일갈(一喝)을 날리셨던 겁니다.

예수님생존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구세주(그리스도)가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는데 정작 다윗은 시편에 기록하기를 그리스도(my Lord)를 주라고 칭하였지요.

이 말씀을 보자면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한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직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다윗의 영혼과 예수의 영혼이 그리스도라는 직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이 같은 점을 모르는 바리새인들로서는 구약의 내용을 설명할 도리가 없는지라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 또한 이러한 오류를 벗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의 교리를 보면 하나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사람들이 다윗의 후손 중에 그리스도가 나리라 믿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다고 믿고 있는 거지요.

예수님의 부활이란 다윗이나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를 이룬 사람들이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인 동시에 우리들안에서 예수님이 되살아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멜기세덱과 그리스도가 둘이 아니며

부처와 관세음보살도 둘이 아니라

구분 짓고 분별 심을 벗지 못한 인식에서는

수없이 갈라질 것이고

만물이 동일한 인식에서는

언제나 하나일 것이다.

입으로는 신을 믿는다하나

그 행위로는 신을 믿지 않고 있나니

신이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신이라면 하지 못할 말을 하고

신이라면 하지 못할 행동을 하니

어찌 신을 믿는다 하리오.

신이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편재하다 말은 해도

진심으로 믿는 이는 많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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