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147)

배가번드 2022. 4.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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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설날의 아침이구나.

우리나라는 요즘 이상한 명절을 보내고 있는데 너는 실감을 하려나 모르겠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설 명절이 새해를 여는 첫날로 인식이 되었기에 신년인사를 자연스럽게 했었는데 이제는 새해 벽두인 1월 1일에 신년 인사를 하는지라 설날에 해야 할 인사가 애매모호하게 된 거야.

이 같은 일 역시도 세상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들은 새 시대를 열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아.

언젠가 있게 될 찬란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는 거라 여겨져.

지금 나는 비록 타국에서 설 명절을 보내고 있지만 이웃들의 따스한 환대로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있어.

네가 이제 나 대신 네 할머니를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장 하였다는 것이 타국에서의 설 명절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으며 게다가 이웃에 사시는 가루비누(세척제) 공장 사장님 부부께서 방문을 해주시는 통에 아주 즐거운 명절이 되고 있거든.

이분들과는 평상시 가끔의 왕래가 있어 왔는데 새해벽두부터 방문을 해주신 거지.

사장님께서는 연세가 환갑을 넘기셨는데 불구하고 아직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사업의 열정을 가지고 계시고 특히나 민족관이 아주 투철한 분이야.

중국에서 사신지가 오래인데 불구하고 조선인의 피가 식지 않으셨는지 항상 말씀 도중에 자신이 조선인임을 내세우시더구나.

대학을 중국에서 마치셨지만 자신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고 자신의 외가댁은 독립 유공자로서 항일전사라고 하셨는데 북한의 김일성보다 한세대 앞선 항일전사 이었다고 하셨어.

한국에서 살았다면 독립 유공자로서 대우를 톡톡히 받았을 집안을 배경으로 가지신 분인데 아직까지 사업의 활로를 찾지 못해 고생을 하는 중이었던 거지.

그러다보니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는지 우리 공장을 가끔 들리시고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동네 서기말로는 우리 두 공장이 가장 골치 아프다더구나.

꼬리(고려 사람들을 중국인들이 낮추어 부르는 말)들이 제일 말썽이라는 소리인데 한마디로 자신들에게 상납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였어.

그만큼 그 공장의 사장님이나 내가 다 같이 고지식한 사람들이라는 소리인데 이것 또한 우리들이 가끔씩 대화가 통하게 되는 이유인가 봐.

이분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경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어.

하나님이 왜 우리들의 대화에 올랐나 하면 그분이나 내가 공장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

물론 나는 내재한 하나님을 발견했다 믿고 있기에 당연지사로 하나님을 말하였고 그분은 그분대로 연세가 있으신지라 세상사 모든 것은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 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셨던 거지.

그리고 최근 내가 성경을 읽다보니 느꼈던 점들이 있기도 했고…….

아직까지 구약의 앞부분에서 맴돌고 있는 지라 결론을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해석을 내리고 있기에 나름의 의견을 말하게 된 거였어.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개인의 생각이긴 하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정해놓은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거든.

이러한 내 생각이 인생살이 육십을 넘긴 그 사장님과 의견의 합일을 보게 된 것은 그분 역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이와 같은 일은 순탄한 삶을 살았다 해도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되는데 이세상의 온갖 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 왕의 말에서도 허망한 인생살이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면 잘나거나 못나거나 혹은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관계없이 돌아갈 무렵에는 세상살이의 부질없음을 말하게 되는 모양이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 말을 남기고 돌아간 솔로몬 왕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궁극의 목표점이 뭐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될 것 같아.

하지만 성경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결코 이 세상살이의 덧없음을 말하고 무조건 신을 향한 일만을 고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거든.

솔로몬 왕이 그 같은 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삶을 살아본 끝에 나온 말이었지 처음부터 신을 알고 나온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고 온 세상을 모두 움켜지며 살아보았으며 국민들을 위해 선군의 정치를 하여 온 세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허망하였다는 말은 인간들의 가치관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알게 된 후에 나오는 말이 아니겠어?

이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일들을 경험한 끝에 긍정적인 일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며 신을 부정하며 살아 보고 나서야 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거지.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수라는 것을 알아야해.

아들아!

최근 한국의 방송에서는 대단하신 교수님께서 성경의 구약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며 버려야 할 과거의 소산이라는 것을  열심히 강연하고 있다더구나.

그분의 그 같은 말씀이 전혀 말이 되지 안 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나 역시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은 있어.

그분은 나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학식을 겸비하신 것은 누구나가 알 수 있고 나또한 인정하지만 시각의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거든.

그러한 의견차이가 바로 인식 때문이긴 하지만 똑같은 목표점을 가진 두 가지의 길이기도 해.

그분은 구약을 부정적으로 봄으로서 구시대의 유물을 타파하고 새로운 기독교 사회를 열어 가자는 것이며 나는 구약의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실은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금쪽같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말함으로서 기독교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거야.

이것은 모두가 똑같은 결론을 얻기 위해 방향을 달리한 것뿐이거든.

이래서 "신과 나눈 이야기"의 저자 윌쉬는 인생을 "위대한 전망에 숭고한 해석" 이라 말을 했나 보았어.

나 역시 그 교수님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그러한 구약이 말도 되지 않는다 생각을 해본 적이 있기에 그분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거든.

다만 그러한 해석도 있지만 이러한 해석도 있다는 것으로 기독교 사회의  변화를 모색 하자는 거야.

구약이 신약을 있게 만들기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고 신약이 존중 받기 위해서라도 구약 역시 인정을 해 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구약자체를 부정만 한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없는 자식을 존재토록 만들려는 것이나 다름  없어.

그분의 말대로 구약을 없애 버리고 신약만을 믿게 되면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이 되거든.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구약을 없앤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도록 만든 기초를 무너뜨리자는 소린데 이래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노릇인거지.

이러한 인식 역시 하나의 통합된 인식을 가지기 위한 발판 마련에는 도움이 될 테지만 근본적인 치유에는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는 것 같아.

이러한 것은 이세상의 어떠한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거야.

내가 속한 단체의 일만 하더라도 내가 부정적으로 묘사할 부분이 무척이나 많이 있고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어서 너와의 대화에서 가끔씩 그러한 부정성을 내 비춘 적도 있어.

내가 그와 같이 부정성을 내 보인 것이 바로 똑같은 상황을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었고 그 어떤 경우에도 긍정에 머물러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던 거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거든.

비록 내가 말한 부정적인 말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일하거나 불변하는 진실일수는 없다는 거지.

하나의 또 다른 시각을 표현하기 위해서일뿐 얼마든지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겠어?

이것은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네 자신을 위해서이고 나 자신을 위해서 인거야.우리들은 구약의 시대를 살아 보지도 못했고 그 시대의 풍습이나 개념들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그 같은 구시대의 일들을 지금의 인식으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조차 인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더 말해야 무슨 쓸데가 있겠니?

그렇지 않니?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들은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거야.

지금까지 일어났던 그 어떤 순간이나 지금 맞이하는 그 어떤 순간들에서 조차 사실인가의 여부를 판명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일을 어떠한 사실로 내가 인식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거지.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밝혀 놓은 책들이 줄을 잇고 있어.

성경에 기록된 부분 외, 즉 13세 부터 29세까지 16년간의 잃어버린 성경상의 예수님 행적들이 어찌된 일인가를 밝혀 놓은 것들로 이것들의 사실 여부를 놓고서도 왈가왈부 말들이 많아.

심지어 일각에서는 기독교 단체의 압력으로 그러한 책들이 절판되는 사태까지 발생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 역시 언젠가는 모두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비밀이 될 수조차 없게 되고 있거든.

이것이 바로 세상이 빠른 속도로 문명화됨에 있어 보급된 인터넷의 영향 때문으로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사회가 의도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 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거야.

언젠가 내가 본 "인도로 간 예수" 라는 책에서는 예수님께서 인도의 왕자를 따라 유학길에 오른 예수님의 행적들을 묘사해 놓았었는데 그곳에서 신비한 공부를 많이 한 것과 실지로 어떠한 지방의 불교사원에서 공부를 했던 기록을 볼 수 있었어.

그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후 부활을 한 예수님께서 지금의 캐시미르 지방(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추정)에서 120살 가까이 살다 돌아가신 무덤의 사진까지 볼 수 있었거든.

비석에 발바닥의 흉터까지 새겨 놓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생긴 상처자국을 묘사해 놓은 듯 했지.

이것을 볼 때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의 기독교 사회가 얼마나 엉터리 사실에 현혹되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지 않겠니?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무척 많이 달라졌어.

내가 왜 이렇게 생각을 급하게 수정하게 되었나 하면 말이야.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난 몇 해 후 또 다른 사실을 내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어.

언젠가 네게 말을 한 적이 있었듯이 1984년쯤인가 영국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이것과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거든.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해서 후손을 남겼다는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재판을 벌인 결과 그 같은 일이 사실로 밝혀져 버린 거야.

그 당시에는 이 같은 사실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다가 무언가 알 수 없는 힘들의 작용으로 유야무야 해버렸는데 이 같은 사실이 실지로 있었음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우리나라의 3대 신문(조, 중, 동)의 1984년 판의 신문 내용 중에 기재 되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접하게 되었던 거지.

이 같은 내용이 내게 사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그 재판을 관장했던 재판장이 몇 대째 내려오는 크리스천 이었다는 것이었어.

그 당시 재판장에는 목사님들이나 수녀님, 신부님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판결이 나는 순간 옷들을 찢고 난리가 났다고 하더구나.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데 대한 실망감이 그들로 하여금 그 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든 거야.

아들아!

너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어떠한 생각을 하니?

아마도 너는 그 같은 일들이 전혀 사실이 아닐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했으리라 여겨지는구나.

예수님의 행적이 같은 시대에 하나는 프랑스에서 다른 하나는 캐시미르 지방에서 일어났다고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것 또한 유일한 진실이라고 할 수만은 없어.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언제나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이원성의 선택의 순간들을 눈앞에 두고 있거든.

그 같은 일이 정말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지금의 우리로서는 전혀 없다는 거지.

여기에는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고 절대적인 거짓이라는 개념도 있지 않아.

이것을 언젠가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말한 적이 있었어.

성경에 나온 내용을 목사님께서는 확인을 하셨는가 하는 내 물음에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우리들은 성경에 나온 내용이 앞뒤가 명확하게 맞아 들어가기에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겠니?

앞뒤가 맞아 들어가기만 하면 진실이라는 말이며 누군가의 주장하는 바가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면 맞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야.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받아들이는 진실이라는 것의 참된 모습이거든.

이러하기에 아무리 내가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만 진실일 뿐 세상 사람들의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

아무리 사실을 내가 말을 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실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사실이 될 수 없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일찍이 말해주지 않았니?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인식만이 존재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야.

바꾸어 말하자면 이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진실일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내가 아는지라 더 이상 내가 아는 사실만이 유일한 사실이라 주장 할 수도 없고 주장하지도 않아.

다만 나는 이와 같은 일들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만 할뿐이지.

바로 이러하기에 오늘 너에게 성경을 보거나 그 어떤 일을 마주하던지 보다 긍정적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는 거야.

우리들은 언제든지 부정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부정성을 몸에 지니고 살고 있거든.

어떠한 순간도 그러한 부정성을 무시할 수는 없어.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40일간의 기도를 할 때 나타났다는 마왕은 바깥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존재하는 부정성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야.

이것을 기독교인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이 같은 일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절대 신과의 합일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해.

구약의 상황들을 우리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우리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장막이 찢어질 수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우상화 시켜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가질 수 없거든.

 

예수님이 어째서 우상화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이 세상을 오셨고 육화된 하나님인데요?

이것은 엄연하게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어져야 할일이 아닐까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능한 일이지 절대 그와 같은 일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자유겠으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떻겠니?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서 이제 바야흐로 시험관 아이가 탄생하고 있거든.

이 같은 일 역시 과거에는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어나는 일이며 예수님처럼 동정녀에게 태어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 아니겠냐는 거야.그렇지 않니?

이 같은 일을 만약 네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네가 주장하는바 역시 타인들로부터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해.

내가 앞서 말을 했지?우리들은 사실이라고 여길 수 있을 때만 사실일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이 같은 일을 우리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은 있거든.

그것이 뭐냐 하면 말이야.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될 때 그와 같은 구약의 말씀들이 하나같이 이해가 되며 있는 그대로 완벽한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비록 성경속의 하나님일지라도 우상화를 시켜서는 절대 하나님과의 장벽을 허물수가 있어.

아들아!

이것은 말이야.

종교를 달리하더라도 마찬가지의 개념이라 할 수 있어.

우리들이 만약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들 안에 내재하는 불성을 믿어야지 부처라는 형상을 따르게 되면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고 말거든.

우리들이 구약을 보면 모세가 나오는데 모세의 행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같은 내말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어.

그는 물도 먹지 않는 단식을 수차례 하는데 그때마다 자신 내면의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와 같은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받게 해.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겠니?

그가 우리들안에 내재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 역시 사막에서 40일간의 단식기도를 하는 것과 연결되어 지는데 이것이 바로 내재한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누구라도 내면의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대변자이자 예언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말이야.

물론 이 같은 일도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 사실일수 있겠지만 만약 우리들의 목표가 구약을 보다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말이 사실로 인정되어지는 것이 보다 좋은 선택이이라 할 수 있어.

아들아!

언제나 말을 하지만 말이야.

긍정적일수도 있고 부정적일수도 있는 자유선택을 신은 허락을 하였고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자유선택을 이용해서 신과의 합일을 창출해내야 해.

따라서 우리들이 긍정적 이어야 하는 이유가 우리들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

성경이나 불경 등의 진실성을 파헤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얼마나 내가 그 같은 내용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네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며 이 시간을 마치자꾸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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