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배가번드 2022. 8. 13.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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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없으며 책도 그렇게 많이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식한 장사꾼출신이며 문학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씩 문자적인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언젠가 나와 도담(道談)을 나누던 분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이요 일귀하처(一歸何處)를 물었을 때도 오답을 했지요.

그분이 일기(一己)하처(下處)라 하신 걸로 들었기에 해석을 잘못했던 겁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물음을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다시 한 몸 안에 들어간다 해석했던 거지요.

사람의 몸이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점에서는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원문을 본 사람들이 보았다면 웃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경상도사람이라 일귀를 일기로 잘못 말하고 잘못 들었겠지만 무식한 사람은 이렇게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그러나 말이 어떻게 바뀌어도 그 목적지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흔히들 도를 닦는다하면 깨달음을 얻는다 말하며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은 도를 통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도(道) 통한다는 말은 불교식을 말하면 해탈한다는 뜻이며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거지요.

이래서 득도하게 되면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하며 만법귀일과 상통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뜻은 이런 것이 아닐는지요.

내가 이렇게 무식하다보니 육조혜능을 가장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자무식이었으나 유명한 게송하나를 남겼지요.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이 게송이 나오게 된 것은 신수가 먼저 게송을 읊었기 때문입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대개의 경우 육조혜능의 게송만을 최고로 칩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수의 게송도 아주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수가 혜능보다 한수아래라고 하지만 속 깊은 내막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지요.

첫 째로 알아야 할 것은 초보자는 신수의 게송을 따라 수행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혜능처럼 불성을 본 사람이 아니라면 죽어라고 닦아야합니다.

둘째로 불성을 깨닫고 나도 지속적으로 닦아야한다는 겁니다.

한번 불성이 드러남으로 인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불성과 완전히 하나가될 동안) 묻혀놓은 업장을 씻어내야 한다는 말이며 세상 끝내는 날까지 짓게 될 업장도 씻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불성이 드러난 육조혜능은 무려 14년 동안 사냥꾼들의 시중을 들면서 살아야했지요.

이와 같은 일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Jesus saith to him, He that is washed needeth not save to wash his feet, but is clean every whit:

 

 

이미 목욕했다는 것은 성령이 임했다는(불성을 드러냄과 동일함) 뜻으로서 예수와 같이 성령이 드러난 분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깨끗해졌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발은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발은 걸어 나온 발자취이자 걸어가야 할 인생여정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이 지어놓은 업장은 자신이 씻어야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같이 이런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만법은 귀일하며 사통팔달인겁니다.

때로 사람들은 도를 지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도에 관한 책을 읽고 자신이 득도를 했다 생각하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법이 귀일하지 않고 제주장만을 일삼으면 못 깨달은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닦아야합니다.

닦을 자격도 없는 주제에 닦지 않아도 된다 말하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도 전에 불성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닦는 중입니다.

다만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며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앉아서 하는 명상보다 더욱 어려운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벗어나 동굴 속에 들어앉아 하는 좌선도 어렵지만 세상 속에서 법륜의 바퀴를 굴리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수행인지 해본사람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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