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감사하는 삶.

배가번드 2019. 6. 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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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을 기다리는 여러분!

변함없이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마가복음강해를 잠시 미뤄두고 조금 특별한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시작 전에 질문한가지를 할까하는데 혹시 여러분 중에 매일 감사기도를 하는 분이 있으신지

?

나 홀로목사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여성한분이 제공하였는데 그분은 젊은 시절 교회

를 다녔던 분입니다.

몇 달 전 평소알고 지내던 어르신께서 초대하는 바람에 대전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분

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고 서너 번 정도의 만남이 있었는데 평소 나 홀로목사와의 대화를 원

한다고 하기에 함께 모시게 되었지요.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60은 넘었고 70은 안된 중늙은이에 속하는 이분의 종교관이 궁금

해서 왜 더 이상 교회 다니지 않으시는가를 물었더니 교회에서 자꾸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

이 못마땅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성경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고 당연한일이 아닌가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그분의 입

을 통해 나왔습니다.

뭔가 고마운 일이 있어야 십일조를 하고 싶지 않겠냐며 교회를 다녀도 도무지 고마운 점을

못 느꼈다고 했지요.

딴은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는데 성경말씀자체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뭐가 고맙게 여겨질

것이며 목사님말씀에 감동받을 일이 없는지라 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으리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어떤 분들은 정말 감사한마음으로 십일조를

내고 있으며 목사님말씀에 감화(感化)되어 눈물까지 보이건만 어찌 이분은 감동받지 못할

뿐 아니라 불신감만 높이고 있을까 싶었지요.

사실 이것은 이분의 자라온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모든 가치관이 물질적인데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이지 못하다는 말씀이지요.

가난한 집의 맏이인지라 어려서부터 고생을 심하게 하며 자랐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쳐야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물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물질의 풍요로움이 삶의 최대목적이 되었으며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여겨졌을 테지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응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

며 성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니 목사님 말씀이 고맙게 여겨질 까닭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돈을 강탈당하는 기분이 들었던지라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님 설교가 듣고 싶지 않

았고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었던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말씀이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

는가를 말씀하셨지요.

그런 분에게 도대체 무엇부터 말씀드려야할지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또 다른 방향에서 우리삶속에서 신이 과연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찌 보면 성경말씀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한분은 어렸을 때부터 영의 세계를

체험해서 자신이 이미 영적깨달음에 달해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말씀으로는 사람이 죽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요.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던 해야 하며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

위 내에서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여기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죽어본 것처럼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분스스로가 자신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세계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하

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없음조차 인식하지 못해야 마땅하다는 말

이며 만약 그분말씀대로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되어보니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면 우

주와의 완전한 합일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정말 이분이 우주와 완전한 합일이 된 존재일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에게 묻는다면 글쎄올시다 라고 말할 겁니다.

이렇게 애매모호(曖昧模糊)하게 말하는 이유는 나 홀로목사가 영혼의 세계를 직접 체험해보

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많은 분들의 임사체험 때문입니다.

임사체험하신 많은 분들 중에는 천국을 다녀온 분들도 있고 지옥을 경험하신 분들도 있습니

.

나 홀로목사역시 일정부분 그분들과 공유하는 곳들이 있고 영의 세계가 무궁무진함을 알고

있으며 영적인 존재가 따로 머무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이런 이유로 누군가 죽어서 영혼이 되어 우주와 완전한 합일을 이룬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면 적어도 나 홀로목사가 언급하였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누군가는 나 홀로목사가 경험한 영의 세계나 다른 이들의 임사체험이 환상이나 꿈이

아닐까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지금의 삶이 끝이며 죽어서는 아무것도 없다 할 테지요.

하지만 앞서 증명했다시피 죽어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하신 분조차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니 그것이 그분의 영혼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영혼은 지금의 육신 안에 다시 들어와서 윤회를 하고 있다는 말이 되며 영

과 육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됩니다.

이럴 경우 불교경전에서 말하는 부처가 머무는 불국토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동시에 하나

님이 거하시는 천국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거지요.

이러한 일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불교경전인데 사람이 죽어 영혼의 세계를 이르는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해놓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사는 세상이 욕계(欲界)이고 죽음에 이르러 처음에 접하는 영혼의 세계를 색

, 그 너머의 완전한 해탈(영생)에 이르는 세계를 무색계라 구분 짓습니다.

말 그대로 욕계는 욕망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며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을 벗어

나 영이 되었으나 아직은 형상을 여의치는 못하고 욕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이곳저곳을

가게 되는 것이 색계라 할 수 있으며 무색계는 어떠한 욕망도 없어져 형상이 없어진 상태,

즉 완전한 빛의 세계를 말한다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하게 설명한 영혼의 세계에 불과하며 무수히 많은 영의 세계가 펼쳐져있

고 사람에 따라서는 무시무시한 지옥을 경험하기도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볼 때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인 영생이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앞서 말씀하신 영혼의 세계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옳은 것이 되어야하는데 이

말이 옳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선악과를 넘어 영생과를 득하여야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금상태의 인식이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지 시비를 가리고자하는 마

음상태를 넘어 인과를 벗어나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거지요.

만약 영생을 얻은 상태라면 자신의 영혼이 세상만물에 편재해 있음을 알 터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완전히 깨달아야하며 너와나의 구분이 없어져 만물동일체의 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합니다.

무턱대고 아무것도 없음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을 영생으로 이끌어줄 목자가 되는 것이며 그가 바

로 우리들을 인도하는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유월절의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볼 때 엉터리라거나 잘못 기록되었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며 완전

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면 단언컨대 인과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했

습니다.

이러한 점을 스스로 점검해보려면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금의 인식상태가 얼마나 영적인지를 보고 물질적 삶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보면 됩니다.

이모든 일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나 홀로목사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일이 바

로 이것입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나 홀로목사는 이미 20년 전에 성령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육신으로 지은 죄 때문에 수없이 많은 시련을 겪어야했습니다.

육신으로 지은 죄를 호리라도 갚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성경말씀대로 죄

악을 씻느라 무척 많은 고난의 날들을 보내야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대해 몰랐을 때였고 지금의 인식상태는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육신으로는 절대 완전해질 수 없으며 온전하게 하나님께 맡기

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때만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과를 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러한 영생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감히 말하건대 평상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하

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까요?

이각박한 세상에 생기는 것이라고는 없고 되는 일이라고는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하는 분들이 많은지라 나 홀로목사역시 함부로 감사하라는 말을 하기는 조금 미안한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보면 분명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있으며 그 내용은 지극히 영적이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감사해야하는 이유를 찾을지도 모르는바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3:1)

My son, forget not my law; but let thine heart keep my commandments: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2)

For length of days, and long life, and peace, shall they add to thee.(KIV)

for they will prolong your life many years and bring you prosperity.(NIV)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3:3)

Let not mercy and truth forsake thee: bind them about thy neck; write them upon the table of thine heart:(KIV)

Let love and faithfulness never leave you; bind them around your neck, write them on the tablet of your heart. (NIV)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3:4)

Then you will win favor and a good name in the sight of God and man.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3:5)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3:7)

Be not wise in thine own eyes: fear the LORD, and depart from evil.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3:8)

It shall be health to thy navel, and marrow to thy bones.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3:9)

Honour the LORD with thy substance, and with the firstfruits of all thine increase: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3:10)

So shall thy barns be filled with plenty, and thy presses shall burst out with new wine.

 

 

여러분들은 이 내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이십니까?

나 홀로목사는 참으로 감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이 내용이 소용없다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믿지 않는 분들이라 할지라도 제대로만 소화하면 기가 막히게 좋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구절을 보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던 그렇지 않던 태초에 우리인간들을 만든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가 있지요.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그 존재가 우리인간들을 만든 하나님아버지가 맞는다는 것이니 그 존재가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네 마음으로 내 명령을 지키라했는데 이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일단은 우리들이 억지로라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명령에 따라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2절과 같이 된다고 했는데 이 내용은 단순하게 생명을 연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놓은 것입니다.

영역본 두 개를 동시에 올린 것은 서로 비교분석해 보라는 의미인데 상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내용이 그저 오래 사는 방법을 말해놓은 것이라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장수 해야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않지요.

또한 영역본을 보더라도 그저 생명이 연장된다는(For length of days)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영생이라(long life)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그저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3절에 보입니다.

그런데 영역본 두 개를 보면 인자에 해당하는 단어를 (KIV)는 자비(mercy), (NIV)는 사랑(lov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왜 한글성경은 자비와 사랑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인자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지금껏 나 홀로목사가 한글성경 번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해 왔는데 여기에서는 칭찬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mercy에는 사면의 재량권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love는 마음(heart)안에 담겨진 신의 속성을 나타내는지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인자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지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인자에게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면의 재량권이 주어지며 성령이 드러난 분이니 그를 따르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신 마음 안에 신이 살도록 하라는 말도 되며 자신마음속에 거하는 성령을 따르라는 말도 됩니다만 아직 성령이 깨어나지 않았으니 좋은 스승이나 목자를 따르라는 말이 현실성이 있다 여겨집니다.

혹자는 성경말씀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 말하겠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모순이 있다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인식정도가 틀려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마련이며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경해석은 물질적이며 육신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영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육신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이 내용 역시 각자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종파에서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

명백히 말하건대 이 내용은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분을 통칭한다고 봐야하며 목사님이던 신부님이던 혹은 타종교의 스승들이던 제대로 된 성경해석을 한다면 그가 바로 재림예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죽어라고 믿으라는 뜻에서 목을 매달라(bind them about thy neck)는 표현과 마음 판에 새기라고(write them upon the table of thine heart) 했지요.

이 말씀은 또한 육신의 성전인 우리마음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니 그분을 감동받게 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진리의 말씀이다 싶으면 그 말씀을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쳐 믿고 따르면 성령과 하나가되니 사람과 하나님에게 공히 지지와 찬사를 얻게 된다는 겁니다.(4)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쉽지 않기에 5절에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해줍니다.

5절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믿고(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네 명철에 의지하지 말라(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했는데 달리 표현하면 일단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고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인식과 판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성처럼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우리 몸 안에 살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어떤 분들은 우리 몸이 신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인데 정말 그러할지는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상태인 경우에는 우리 몸이 신이라는 말이 맞지만 자신의 영을 깨닫지 못한 경우에는 그럴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남을 심판하는 마음으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가 인정하면(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우리 길을 지도한다(he shall direct thy paths)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결과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먼저 우리들이 이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성경말씀은 모를지라도 이세상의 생성원리(生成原理)가 인과(因果)에 의해서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알 것이라 생각됩니다.

뭔가 원인제공이 있었기에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이니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이세상의 불변하는 진리라고 봐야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선택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며 결과도 하나님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잘못된 선택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냐 하겠지만 잘못된 선택이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다만 결과만이 달라질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못된 짓을 일삼으면서 하나님핑계를 대면 어쩌나 걱정들 하시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면 절대 그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은 시험을 해봐도 명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7절 말씀에 이와 같은 일을 잘 설명해놓았는데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일을 하는 주체로 여기지 말라는 말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하다싶은 것을 선택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석한 두뇌로 판단하여 자신이 일을 한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한 후에 일하게 되지요.

그런 경우에는 악한 판단을 하지 않게 되는지라 결과 또한 하나님이 좋게 주실 겁니다.

이러한 일이 생활화되다보면 8절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 몸에 중심이 되고 골수처럼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리고 9절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법에 대해 말해놓았습니다.

재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되 늘어나는 모든 것들의 첫 수확물( with the firstfruits of all thine increase)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지요.

이는 그 당시에 적용되는 말로서 가축이나 농산물을 가리킨다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십일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창고가 차고 수확물이 넘쳐난다는 말이지요.

사실 이 같은 내용을 과거에 나 홀로목사는 무척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느끼는 것인데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정말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되면 물질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건강 또한 주어집니다.

요즘 나 홀로목사는 매일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장에서 처음일할 때만 하더라도 오십견 때문에 무척고생을 했습니다.

체조시간에 팔을 제대로 못 들어 올릴 정도였는데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부터 어깨가 낫기 시작하더군요.

어깨가 아픈 것을 너무 심하게 일하지 말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몸이 허락하는 만큼 일하고 감사드렸더니 점점 좋아졌으며 이제는 거의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을 실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교회 다니는 여동생도 이러한 말씀을 자신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팔순노모가 뇌경색으로 입원하는 통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병간호를 도맡아하고 있는데 제게 전화를 걸어와서 말하더군요.

 

오빠!

요즘 내가 무엇을 감사하며 살아야할까를 생각해보니 오빠가 있어 너무 감사하구나 생각되었어.

오빠가 없었으면 어머니 병원비를 우리가 모두 내야 했을 텐데 너무 감사한 일인 것 같아.

 

교회를 정말 열심히 다니는 동생인데 교회 다닌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동생에게 말했지요.

 

나로서는 네가 도리어 감사한 일이지.

내가 장남으로 모두 책임져야할 일을 너희가 맡아서 해주니 미안하고 감사하다.

 

사실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어머니께 모두 감사했습니다.

지금껏 어머니께 효도한번 못해보았는데 이렇게라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으니까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지 찾는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라도 인생에서 한번쯤은 행복했던 날이 있었을 겁니다.

그 행복을 기점으로 그전에 살았던 일들은 그 행복을 만들어낸 재료들입니다.

이세상이 인과의 세상인지라 지금의 기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의 삶들이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과 일들은 지금의 순간을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들이 됩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슬픔들도 또다시 기쁨을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들이 될 터이니 그 슬픔조차도 미래의 기쁨들인지라 감사할 수 있지요.

이래서 슬퍼도 감사하고 기뻐도 감사하고 좋아도 감사하며 싫어도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거짓말처럼 인생이 바뀝니다.

알고 보면 너무나도 쉬운 일을 우리들은 자신의 강퍅한 마음 탓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겁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 홀로목사는 야근을 싫어했고 일요일 일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습니다.

그때는 글을 쓰는지라 퇴근시간만큼은 지키고 싶었고 일요일은 아예 일하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야근을 물론 일요일 일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요구하면 언제든지 함께 해줍니다.

그다지 안하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다않고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을 많이 벌 기회를 주시는구나하고 감사하며 일했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다른 이들은 야근을 시키면서 나만 시키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라 여기며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녁시간에 명상도하고 성경 연구할 시간을 주시나보다 여기며 감사를 드렸지요.

매사에 이렇다보니 나 홀로목사의 삶은 감사할일들로 넘쳐납니다.

반드시 종교인이 아닐지라도 자신 삶에서 감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왜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어찌 짜증나는 일이 없겠는지요.

슬프고 힘들고 괴로운 일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만 빠져있으면 점점 더 악화됩니다.

어떻게든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와야하고 삶이 행복해져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감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서 흡족할 때 생깁니다.

만족은 곧 행복을 불러오지요.

이러한 마음은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적인 사람을 상대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과거에 내가 잘못한일을 이 사람을 통해 씻어내고 있구나하며 감사합니다.

또 누군가에게 봉사하고 헌신해야할 때면 내가 사랑이 부족하여 사랑공부를 시키시나보다 여기며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가도 혼자지내는 홀가분함을 즐기는 시간을 주시나보다 여기며 감사하며 또다시 돌아오면 못 다한 사랑을 제대로 할 기회가 왔다 여기며 감사합니다.

하던 장사가 시원치 않아 접어야할 경우에는 육체적인 노동일을 하며 땀 흘려 일하는 시간이 왔음에 감사하고 그조차도 못하게 되면 이제는 쉬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하며 심지어 살아 숨 쉬는 것조차도 감사할일입니다.

나 홀로목사 주위에는 자원봉사를 즐겨하는 여성한분이 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야학당 등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원봉사를 했고 여러 단체에서 이런저런 자원봉사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가끔씩 자신의 자원봉사에 대해 사람들이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르긴 해도 이분만이 아니라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나 수행자들 역시 자신들이 행한 신을 향한 봉헌과 봉사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 없다 불평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인과의 세상에서 심은 대로 거두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지금 이분 앞에는 엄청나게 귀한시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정작 본인은 제대로 못 느끼고 있지만 신이 엄청나게 축복을 퍼부어주고 있으며 조만간 피부로 확연하게 느끼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앞에 다가온 축복의 순간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평한다면 신의축복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뭔가 즐겁고 행복한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를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좋지 않은 것을 많이 심어놓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들은 우주의 법칙과도 같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기도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인과를 뛰어넘는다는 말을 아는 분이 있습니까?

인과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인과의 세상인 이세상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법칙에 순응하며 좀 더 나은 인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감사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좋은 인()을 맺어 다음에는 더욱 좋은 과()를 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야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을 때는 야근하지 못하는 것이 안 좋은 일이 되겠지만 성경연구를 하는 것이 목표가 되게 되면 야근하지 못하게 된 것이 너무나 잘된 일이며 그렇게 만든 사람까지도 고마운 사람이 됩니다.

달리표현해 보자면 물질의 풍요로움이 오지 않는다 해도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다시 이 같은 일을 바꾸어보면 야근을 해서 영적인일인 성경해석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라는 구나로 인식을 바꾸면 또다시 감사할 수 있게 되지요.

이래서 불가에서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감사할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신의 목표점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래야만 하는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시는 많은 분들은 누구라도 인생에서 목표와는 전혀 별개의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속상해하고 가슴아파했겠지요.

그러니 어찌 감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 홀로목사역시 과거에는 여러분과 같이 속상해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원하는 것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니 좋게 보면 그것이 나에게 좋지 못한 것 일수 있다는 것이며 나쁘게 보면 내가 뭔가 좋지 못한 일을 했기에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지라 감사할 밖에요.

이래서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타인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내가 상대하는 그 어떤 사람의 잘못도 내가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될 때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내가 감사하는 일을 행한 것이 되지요.

그런 이유로 나 홀로목사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화를 내고 미워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뉘우치며 반성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늘 이용만당하지 않겠냐하며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두 번 정도 이용당해주는 것을 허락하시겠지만 두 번 다시 그 사람과 상대하지 못하게 만들 것 입니다.

심할 경우 상대방에게 심각한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한두 번 정도 이용당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이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지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이 같은 일을 나 홀로목사의 인생길에서 숱하게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이용만당하고 피해만 당했다 하소연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스스로의 마음 안에 얼마나 많은 탐욕이 들어앉아있으며 욕심이 화를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순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면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어진 오늘에 감사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동안 여러분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길 기원하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시간에는 누가복음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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