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을 끝낸 지가 1년이 넘어가는데 이제야 마가복음의 해석을 시작하게된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이겠지만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국방부호텔일이 14년 10월로 끝남으로 인해 지방을 내려가야 했고 그곳에서 올 4월까지 지내야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다보니 남의 집에 얹혀살다시피 했고 노모가 계시는 집에서는 작업을 할 수가 없는지라 이래저래 차일피일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
이제는 그만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아직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고 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성경해석에 동참해줄 인재(?)를 찾고자했는데 아직은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미뤄 둘 수는 없기에 오늘 시작을 알리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다.
대게 일요일은 명상센터를 가는데 개인적인일로 가기가 싫어졌고 미뤄두었던 마가복음의 해석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물심양면으로 명상수행을 해나왔는데 요즘처럼 실망스런 때가 없다.
20년 이상 명상을 해서 매일같이 내면의 신을 만나는데 불구하고 물질적판단과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볼 때 실망감을 넘어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모두가 육신을 가진 탓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한편마음으로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미 마태복음을 통해서 알아보았듯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
세상을 살기위해서는 금전과 권력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만이 필요한 것이다.
가끔씩 명상을 하는 친구들이나 타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입으로는 모두들 영적인 길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영생에 대해 갈망들은 하지만 자신의 물질적 이익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일이 생겼는데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그 일에 대해 말하지는 않겠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보면 정확하다.
솔직히 이 같은 일에 대해서라면 나라고해서 자유롭다 말할 처지는 아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성경을 들여다볼 때와 일반적인 영화를 볼 때의 인식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느껴 볼 때 성경을 연구하고 영적인일에 대해 생각할 때 느껴지는 인식상태와 영화내용에 빠져들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감성에 젖어 있을 때의 인식이 완전하게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선택하고 있는 지금의 일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파악해야한다는 말이며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목표는 뚜렷하게 정해져있으며 나 홀로 목사로서 여러분과 함께 영생을 향해 걸어갈 길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최근에 만난 여러 사람 중에 영적인 일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나타낸 분이 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 영적인 세계에 대해 눈을 떴고 영생에 대해 모두 안다했는데 이야기를 들어본즉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은 사실인 것 같았지만 영생의 하늘에 대해 말하기는 이른듯하였다.
육신을 벗어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으며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정답이라 했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야말로 최고의 방법이라 주장했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만약 죽음에 이르러 저세상이 없다고 한다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혈투를 벌여 가장 강한 자만이 득세를 해야 하고 약삭빠르게 사는 자들만이 성공하겠지만 결과를 보면 이세상은 절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모순은 그분 자신의 입을 통해 뱉어졌다.
자신의 눈에는 사람들 영체의 아름다움이 보인다했는데 그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영적인세상은 물질적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명확한 것이다.
만약 그분의 말씀대로 죽음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 사람들 모두에게 빛이 있어야 마땅하며 영적인 길을 걸어가거나 물질적 삶에 심취해 살아가는 사람들 공히 빛이 같아야한다.
하지만 그분자신이 말했듯이 사람들마다 같지 않다했으니 평상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할 것이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과 물질적 삶을 살아가는 데는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타적이며 상대방 배려하는 것을 덕목(德目)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만약 이두부류의 사람들 삶의 결과가 같다고 한다면 누가 이 타행을 실천할 것이며 사랑을 실천하려 할 것인가?
나 역시 오래전 물질적 세상에 충실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고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어느 정도의 성과 또한 주어졌으며 육신적 쾌락에 빠져 살았던 적도 있다.
그렇게 살았을 때의 특징이란 먼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다음에는 남에게 이용당하지 말고 오히려 이용을 해야 하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법위반이나 비굴한 짓도 스스럼없이 해야 한다.
늘 세상정보에 밝아야하고 지식적으로 중무장을 하고 살아야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살수있다했으니 항상 세상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단 한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가운데 영적인 체험이 주어졌고 그날 이후부터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러한 마음변화는 영적인 삶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내 운명을 제시해주었고 그때부터 물질적 멸망이 다가왔는데 그 세월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처음 나에게 물질적 멸망이 다가왔을 때 엄청난 지복(至福)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면으로서 물질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팁을 줄 수는 있는데 과중한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짐을 내려놓았을 때의 기분이라 하면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불가(佛家)에는 백정이 칼을 놓으면 더 이상 백정이 아니라 부처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설해놓은 것이다.
사실 말은 이렇게 가볍게 하고 있지만 실천을 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질적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을 벗어난 인식을 갖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영생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분명 세상을 역행하는 일이며 타인들로부터 비난이나 조롱을 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어지는 무엇인가는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영혼의 빛인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여기에 대해 불만이 많은 줄 안다.
특히나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데 대해 실망감을 토로(吐露)할 것이 분명하며 항의까지 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또한 이러한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영생이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왜 예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이나 예언자들이 순교를 해야 했으며 타종교의 많은 구도자들 역시 그렇게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을까 말이다.
지금 우리가 함께 연구해야할 마가복음의 저자역시 순교를 했다고 하니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멸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싶으며 영적인 부활과 영생이란 세상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나 자신의 일을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97년 호주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인데 이불공장을 만들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영업을 위해 외부로 나갔다가 잠시 들어왔을 때 누군가 공장에 들어와 있기에 인사를 나누었는데 며칠 후 또다시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내게서 빛을 보았다고 했다.
이분은 호주사람으로서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일반인이었는데 내가 호주를 떠나오고 난 후에도 공장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 왔다고 훗날 사촌동생이 말해주었다.
이 같은 일은 수차례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며 이정도로 볼 수 있으려면 적어도 육신적인 차원에서 한 단계 올라서야하며 서로 인연이 있어야한다.
처음 나 홀로목사로서 글을 올린 것이 2011년이었으니 벌써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지만 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들은 몇 안 된다.
그만큼 영생을 얻기가 어렵다는 말이며 물질과 육적인 멸망 없이 영생을 얻기란 힘들다는 말이다.
앞으로 주어진 1년 반의 시간동안 마가복음을 완독하게 될 것이며 그동안 몇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보일 거라는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수없이 많은 망설임 끝에 마가복음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망설임이란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제발 멀리 가버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괜히 서성거리지 말라는 말이며 공감대가 생기지 않으면 이곳을 얼씬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말하며 마가복음의 시작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