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사랑은 변함이 없다.

배가번드 2022. 10. 15.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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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13:4)

Charity suffereth long, and is kind; charity envieth not; charity vaunteth not itself, is not puffed up,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13:5)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13:6)

Rej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13:7)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고린도전서 13장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도들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신들은 하지도 못하는 일을 타인에게 권유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조차 이 내용 관련해서 설교하실 때는 조심하는 겁니다.

이 내용을 속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를 우리들에게 화두로 던진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4절을 보게 되면 사랑은 한없이 참고 온유하고 투기(부러워)하지도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envieth를 투기라고 번역했지만 envy의 고어로서 부러워하다 선망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깨닫게 되면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속의 우리모습을 보면 완전하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신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성령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깨닫게 되면 오래 참을 수 있고 온유해진다고 한 겁니다.

4절 앞부분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 한 것을 보면 성령이 드러난 사람은 오래 참을 수 있기는 하지만 영원히 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Charity suffereth long)

즉, 성령(사랑, 신)이 드러나게 되면 참을성도 많아지고 친절해지며 부러워하지도 않게 되지만 항상(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성령)자체는 자랑도 교만도 아니 한다 했지요.(charity vaunteth not itself, is not puffed up)

마찬가지로 5절에서 성령(사랑)자체는(itself) 무례히 행치도 자신의 유익을 구치도 아니하며 쉽게 화를 내거나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겁니다.

만약 성령을 드러낸(깨달은) 사람이 완전하게 이렇게 될 것 같으면 구태여 쉽게 화를 내거나 악한생각을 않는다고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화를 내거나 악한 생각을 하지만 쉽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6절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rejoiceth in the truth)

이 말인즉 성령을 드러낸 사람은 쉽게 화를 내거나 악한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간혹 그렇게 하더라도 불의하거나 악한 생각에 빠져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령 예수님 같은 분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화를 내고 악한 감정을 일으키더라도 정의를 위해서이고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해놓은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실체에 대한 가르침이며 우리스스로가 성령과 하나 되는 방법을 말해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을 담고 있지 않은 육신은 없으므로 누구라도 성령이 담겨있음은 분명한데 과연 자신의 행동이 불의와 타협을 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악한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7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딘다 한 겁니다.

이 내용은 성령의 실체를 말해놓은 것으로서 삼라만상 안에 담겨있는 성령을 뜻합니다.

모두는 전부라는 뜻이며 전체를 말하는 것인데 스스로가 이런 상태를 수용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거지요.

자신의 행동이 성령을 깨달은 사람의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도들이라면 육신의 감정에 따라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진리(영생)를 위해 불의에 맞서고 악에 대항해서 화를 내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비춰보면 알게 됩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성경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판하고 잘못행동하게 됨으로 7절을 말해놓은 겁니다.

공한 이치를 깨달아 시공간의 영역이 무너진 상태(영생)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령과 하나 됨을 가리키는 것인데 과연 우리들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는가를 되묻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체유심조의 뜻을 아느냐 묻는 거지요.

따라서 위내용은 성령이 드러난 상태에서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스스로를 불의함과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경고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일러 어설프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불법은 세간 법을 떠나지 않는다 하는 것이며 예수님역시 율법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온 거라 말씀하셨지요.

진정 깨달음을 얻었다면 세상 법조차 쉽게 어기지 않으며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금쪽같은 가르침입니다.

지난번에도 이 내용을 다룬 적이 있지만 오늘 또 다시 보게 된 것은 똑같은 내용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으며 수행자들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입에 달고 살지만 막상 자신의 삶에서는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성령)은 변함이 없으며 진리와 함께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