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4.

배가번드 2016. 2. 23. 19:34
728x90

나홀로 목사입니다.

지난시간 우리들은 바벨론의 진실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반드시 넘어야하는 산이기도 합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성경을 통해서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나타날 것인 만큼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자제하고 진도를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이어 3장을 보도록 하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And saying,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마3:2)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3:3)

For this is he that was spoken of by the prophet Esaias, saying,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전파할 때 하신 말씀인데 이사야서에 나온 인물이 바로 요한이라는 거지요.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가 요한이며 주님은 바로 예수님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이구절의 뜻은 조금은 방향이 다릅니다.

함께 볼까요?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40:3)

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이 말씀의 뜻을 올곧게 이해하려면 이사야서 39장부터 봐야하지 않을까요?

본문은 각자가 보기로 하고 간단하게 몇 구절만 골라보기로 하지요.

 

그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사39:1)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사39:3)

Then came Isaiah the prophet unto king Hezekiah, and said unto him, What said these men? and from whence came they unto thee? And Hezekiah said, They are come from a far country unto me, [even] from Babylon.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39:6)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39:7):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사39:8)

Then said Hezekiah to Isaiah, Good [is] the word of the LORD which thou hast spoken. He said moreover, For there shall be peace and truth in my days.

 

39장의 내용을 표면적으로 보면 히스기야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소식에 적국인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를 하고 그 답례로 히스기야가 자신의 모든 보물을 보이게 되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멸망에 이르게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내용일 뿐 숨겨진 뜻과는 전혀 다릅니다.

39장의 내용은 38장22절에서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자신이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인가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천국의 사자가 방문을 한 것이며 그들을 영접한 히스기야가 천국의 사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의 모든 것이 바벨론(천국)으로 옮긴바 된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조금 더 풀어보자면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진 것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상태가 될 때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히스기야의 후손들도 천국의 문에 이르게 된다고 말해줍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사로잡혀서 환관이 된다한 것에 대해 히스기야가 재앙을 맞이한 것으로 알게 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후손들이 올라가는 천국에는 성별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높은 천국을 말하는 겁니다.

만약 성별의 구별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낮은 차원의 천국이라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히스기야가 마지막으로 답한 내용이 증명하지요.

여호와의 말씀이 좋다고 한 것은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의 말뜻을 제대로 알았다는 말이며 자신이 사는 동안 평강과 진리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38장의 내용을 조금만 들여다볼까요?

이사야 38장이 얼마나 기가 막힌 내용인가 하는 것은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다윗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육신의 보잘것없음과 한계를 완전히 알고 있었고 하나님께 온전하게 맡기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으며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조차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38:17~19)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사38:18)

오직 산자 곧 산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38:19)

Behold, for peace I had great bitterness: but thou hast in love to my soul [delivered it] from the pit of corruption: for thou hast cast all my sins behind thy back. (사38:17)

For the grave cannot praise thee, death can [not] celebrate thee: they that go down into the pit cannot hope for thy truth.(사38:18)

The living, the living, he shall praise thee, as I [do] this day: the father to the children shall make known thy truth.(사38:19)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과 환란조차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기 위해서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함으로 모든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시리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죽음이 어떠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이제는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대화내용이 얼마나 영적인 것이며 담긴 뜻이 많은지를 알겠지요?

지금 예문으로 들었던 이 내용은 정말 대단한 내용이 담긴 것이지만 아직은 여기오시는 많은 분들이 소화시킬 수 없는 내용들이라 더 이상의 깊은 내용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번역상의 오류에 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18절과 19절의 주의 신실이라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thy truth에 대한 해석이 주의 신실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주에 대한 진실이나 주의 진리정도로 해석되어져야합니다.

만약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이런 단어를 선택하게 했다고 한다면 영어 성경도 다른 단어를 선택했겠지요.

한단어도 빠트려서도 안 되고 잘못 적어도 안 된다는 성경을 어떻게 자신들 마음대로 단어선택을 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너무 심했나요?

번역상의 오류는 그들의 몫으로 넘기고 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에 집중하도록 하자는 분들이 몇 분 보이는군요.

좋습니다.

한 가지만 짚고서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유다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사38:9)

The writing of Hezekiah king of Judah, when he had been sick, and was recovered of his sickness:

 

많은 이들이 이사야서의 저자가 이사야인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위의예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직접 적었다면 이렇게 기록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고 이사야서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가지는 그렇다는 것이며 특이 이사야와 히스기야의 대화내용은 그렇다는 거지요.

이것은 명백하게 이사야와 히스기야가 나눈 대화 내용이나 역사적인 사실들을 누군가 보거나 듣고서 적었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얻어야할 것은 진리임으로 누가 적었든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이사야가 말한 것이 예언이며 장차 다가올 모든 미래가 정해져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분들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이 같은 사실을 조금 나타내 보인 겁니다.

솔직히 나 홀로 목사도 몹시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구절들이 담겨져 있었는지 또 왜 이러한 구절이 눈에 띄게 되었는지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왜 알게 하시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을 들여다보면 자꾸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마태복음을 들여다보다가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았고 그 말씀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다보니 구약 속에서 이러한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울러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예문을 제시할 때 영어를 함께 올리고 있는데 각자가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시간 관계상 번역을 붙들고 진도를 나가기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함께 올려놓은 것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어 성경과의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주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했나 봅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38장과 39장을 들여다본 이유가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이사야서 40장3절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가만히 문장의 흐름을 보니 36장부터 39장까지가 히스기야와 이사야에 관한 이야기이며 36장 이전과 40장 이후는 전혀 다른 내용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36장부터 39장까지는 끼워 넣은 것 같다는 거지요.

확인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라는 분들이 보이는군요.

좋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니만큼 더 이상 나 홀로 목사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확인해본결과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것과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대화내용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이사야서를 인용을 했을까요?

이사야서 40장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Comfort ye, comfort ye my people, saith your God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40:2)

Speak ye comfortably to Jerusalem, and cry unto her, that her warfare is accomplished, that her iniquity is pardoned: for she hath received of the LORD'S hand double for all her sins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40:3)

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그런데 이렇게 예문을 올리고 보니 35장의 내용을 연관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내용을 모두 볼 수는 없고 딱 한구절만 보도록 하지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35:1)

The wilderness and the solitary place shall be glad for them; and the desert shall rejoice, and blossom as the rose.

 

모두들 두 눈을 크게 뜨고 보시기 바랍니다.

40장 내용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사막에서 하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라고 한 부분과 35장에서 말하는 광야와 사막이 일치되지 않습니까?

한국어 성경에서는 백합화(lily)로 써진 것이 영어성경에서는 rose라고 써진 것 까지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35장에서 40장으로 연결되어 지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되면 35장에서 말한 내용을 분석해봐야겠지요?

35장은 하나님이 오시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말해놓은 것인데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말 못하는 자가 말을 하게 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해놓았습니다.

이제는 뭔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바로 이사야서 35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던 거지요.

하지만 나 홀로 목사는 약간 견해를 달리합니다.

눈을 들어 40장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하게 예루살렘을 여자로 표기하고 있지요?

지난시간 우리들이 보았듯이 예수살렘은 시온의 딸과 동일하며 영적인 수행자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여성대명사인 her라고 쓴 것입니다.

 

her warfare is accomplished

 

직역하면 그녀의 전쟁은 성취되었다로 해석되어야겠지만 앞 구절과 연관을 지어서 번역해보면 이렇게 될 겁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예루살렘)가 부정성들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그 전리품으로 하나님이 구도자의 모든 죄를 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3절의 내용도 완전히 바뀌게 되겠지요

 

시험과 고난 속에서(광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메마른 사막에(불신자, 비수행자) 하나님을 향한 곧은길을 준비하라

요한이 말한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지 세상의 멸망이 다가왔으니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만약 아직도 멸망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요한이 말한 대로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하라 한 것이 개인들의 마음속이 아니라 현실세계라고 한다면 어떻게 2천년동안 천국이 오지 않았을까요?

바꾸어 말하면 지금 지구멸망을 말하는 사람의 주장은 다시 2천년의 시간을 가지도록 만드는 주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신 안에서 성령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믿음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거쳐야할 일들이 있지요.

우선 당장은 성경을 보는 것이 중요하고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할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있는 겁니다.

사실 가끔씩은 사람들에게 현실세계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현실세계의 쾌락에 빠져 영적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을 건지려고 방편으로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 홀로(holo) 목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는 초보자들을 공부시키는 곳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기본지식을 갖춘 이들을 상대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영적인 길에 접어든 사람들이며 나 홀로 목사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분들이거나 적어도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의 의도는 남의 말을 듣고서 이해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살고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아직도 누군가의 말에 최면이 걸리고 싶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당장 나가야하며 다시는 얼씬거려서는 안 됩니다.

너무 신랄했나요?

조금은 심한 것 같긴 합니다만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만 듣고서 깨닫게 되고 자신 안에 성령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 같이 볼까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8)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온 것을 요한이 나무라는 장면인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성경을 믿어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 것이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놓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야겠지요?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오로지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천사와 내세, 부활 및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지극히 물질주의적 사고를 가진 이들로서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은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바리새인(Pharisees) 이란 율법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히브리어 페루쉼’(perushim)에서 나온 말로서 분리된 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에서 깨끗하지 못하다고 규정되어지는 것들은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로서 철저하게 안식일과 금식일 을 지키던 무리들이었지요.

이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모세오경을 믿는 동시에 육체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 등을 믿었는데 오늘날의 탈무드를 공부하는 랍비들이 그들의 정신적 후예들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요한은 에세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세례자요한이 에세네파라고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 사두개파, 바리새파와 더불어 유대 삼대 종파중 하나인 에세네파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예수도 에세네파라고 볼 수 있는데 요한과 아주 각별한 사이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지요.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에세네파가 어떤 주의를 주장하는 무리들인지 잠시 보도록 할까요?

이들은 철저한 금욕주의를 표방하며 하나님과 하나 됨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 사해주변에 공동 생활권을 만들어 지내며 재산을 공유하고 묵상(기도)과 성경연구, 육체노동을 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로 인해서인데 이들이 바로 사해의 두루마리를 만들었지요.

이들은 스스로를 ‘언약의 백성’, ‘선택된 자’, ‘참된 이스라엘’ 등으로 불렀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야말로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사는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심한 율법주의자들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을 에세네파로 보는 이유가 그가 메뚜기와 석청을 주식으로 할 만큼 생활방식이 독특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왜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까지 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을까요?

그기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무조건 현실적으로 나타난 현상만을 믿는 자는 영을 알 수가 없으며 영을 인정하고 믿는다 할지라도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와 같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예수에게 비둘기같이 내려온 하나님의 성령이 빛이라는 말이 영어성경에 나와 있지요?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열매를 맺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예수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들은 그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하나님과 하나 됨을 목표로 삼는 이들에게는 합당하지 못한 열매 맺는 일이겠지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 하는데 그들 모두가 자신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구원을 받고 천국을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구약을 믿고 있던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 요한이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알아야할 사실이 마태복음 3장에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위대한 스승이고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세상에서 똑같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5)

And Jesus answering said unto him, Suffer [it to be so] now: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Then he suffered him

 

자신이 높은 곳에서 왔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세상의 법도를 따르겠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한다고 해서 세상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거나 바꿀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진정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면 현실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지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세상을 바꾸려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요.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말에 대한 증거가 성경에는 무척이나 많이 나옵니다.

이제 오늘의 성경해석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궁금한 점이 남아있다는 분이 있군요.

예수가 에세네파라고 하는 것과 요한과 예수가 미리 아는 사이라는 것이 궁금하다는 분이 보이는군요.

그런 분들을 위해 잠시 본문을 보도록 할까요?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마3:11)

 

요한이 예수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말을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예수가 에세네파였을 가능성이 큰이유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에세네파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합일이었으니 당연히 예수가 에세네파일수가 있으며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을 이룬 분이었기에 요한이 그렇게나 극진하게 선전했던 겁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홀로(holo)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신 하나님

 

당신을 믿는 많은 이들이 당신을 하늘에 매달아놓고

천국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쉼 없이 기도를 하고 있지요.

 

제발 내려오셔서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이미 태곳적부터 인간들에게 현신하는 당신을 보내주었건만

그들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2천 년 전 하늘의 창살을 벗어던지고 내려온

육화된 당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기까지 했지요.

 

그리고는 오늘날까지 기도를 합니다.

 

제발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어떻게 그들 눈에는 지옥밖에 보이지 않으며

어떻게 그들 눈에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지요?


당신은 그들의 기도소리와 함께

그들의 마음 안에 살아 숨 쉬건만 도무지 알지 못하나이다.

  

홀로(holo)되신 나의 하나님

부디 그들에게 당신을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허락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나홀로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6.  (0) 2016.03.08
마태복음5.  (0) 2016.02.24
나홀로 목사(바벨론의 진실).   (0) 2016.02.20
마태복음3.  (0) 2016.02.16
마태복음2.  (0) 201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