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holo)되길 주장하는 성경 해설가 나홀로 목사입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을 느낄 만큼 선선한 매일을 맞이하고 있는 요즘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기분 좋은 나 홀로 목사와는 달리 이상기후다 뭐다 해서 걱정근심이 많은 분들도 있습니다.
조금 더 과격하게 해석하는 분들은 지구멸망이 다가왔다는 분들도 있으며 어떤 이들은 지난 구제역때 살생을 너무나 많이 해서 한국 땅에 재난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분들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많은 견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얼마나 다양한 인식들이 있는가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을 보면 왜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생겨났으며 같은 종교 중에도 수많은 종파가 생기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가 좋다고도 볼 수 없겠지만 나쁘다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인 동시에 우리인간들이 원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우리들의 영혼이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 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을 반복적으로 사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데 인간의 육신으로서 경험하는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하지요.
이러한 육신의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의 영혼을 근원에 되돌리기보다 객체로서의 경험을 원하는 영혼들은 다양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육신으로 존재할 때의 다양한 인식만큼이나 많은 영적인 인식들이 우리들 앞에 놓이게 되는 거지요.
하지만 개중에는 더 이상 경험을 하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많은 경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경전이 있어도 경전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정도에 따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본인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지는가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듯이 경전 또한 다른 느낌으로 와 닿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은 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들 말씀의 중요성을 많이 얘기하는데 그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우선 말씀이라는 말이 가지는 사전적 의미는 남의 말을 높이는 말이나 자신의 말을 낮추는 말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말씀이라는 말이 용비어천가에는 말(言)슴(神)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샤머니즘에 기원을 두고 있는 말씀이라는 우리말이 신이 하시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습니다.
한국어인 말씀이 성경에서는 더욱 다양한 형태의 뜻으로 나누어집니다.
히브리어 다바르(dabar)가 한국어 말씀에 해당되는데 성경에 쓰인 이 단어는 연설, 생각, 약속, 위협, 위임과 명령, 규칙과 규정, 교훈, 제시와 의논, 요청과 소원, 정보와 소식, 거절, 등의 의미로 쓰였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어떻게 사용되어지는가에 따라서 내용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바를 주장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진실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일일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진실은 아닙니다.
물론 이 같은 일은 나 홀로 목사의 말도 마찬가지임은 물론입니다.
지금껏 성경해석을 몇 가지했지만 나보다 더욱 좋은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칭찬받고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 내의견과 다르다고 그를 공격하고 미워해야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마도 어떤 분들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실 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바벨탑의 진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일에 대해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을 하며 이 세상에 이처럼 많은 언어가 생겨난 것이 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올라가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관문을 말해놓은 거지요.
우리들은 의사소통을 하기위해서 말을 사용합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조차 신은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며 귀신같이 안다는 말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신은 인간들의 말과는 상관이 없는 영역에 있음을 말하지 않나요?
바꾸어 말하면 아직도 언어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면 영과는 거리가 먼 단계라는 말입니다.
흔히들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방언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다지 좋아할 일은 아니라고 하지요.
왜 그런가 하면 아직도 자신의 언어에서만 벗어나 있을 뿐 타인들의 언어(방언)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누구는 하나님과 소통을 하려면 어떤 나라 말을 해야 하는가 궁금해 하였는데 영적으로 보자면 아주 어린영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언어의 영역을 못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궁금했던 거지요.
좀 더 리얼리티하게 설명하기위해 말씀이라는 단어를 분해해볼까요?
말씀이라는 말의 의미가 얼마나 다양한지 재삼 설명하지 않더라도 말씀에 해당하는 각 나라언어의 숫자보다 훨씬 많습니다.
다른 나라의 말씀은 그만두고 우리나라말의 말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첫 번째로 분해하면 말과 씀이라는 두 낱말이 되겠지요?
이러한 말과 씀은 말솜씨, 말총, 말구유, 말세, 씀바귀 등의 말을 만드는 재료로 쓰입니다.
다음으로는 ㅁ,ㅏ,ㄹ,ㅆ,ㅡ,ㅁ 이 되는데 분해된 각 모음과 자음은 언제든지 다른 모음과 자음과 만나면 다른 말을 만들어 내게 되지요.
조금 더 분해해보면 ㄴ,ㄱ,ㅣ,ㅡ,ㄱ,ㄷ,ㅅ,ㅅ,ㅡ,ㄴ,ㄱ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분해된 자음과 모음들은 더욱 많은 말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며 더욱더 많은 의미를 만들게 됩니다.
여기에서 좀 더 분해를 하게 되면 종횡으로 분해가 되면서 더욱더 많은 낱말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며 더 많은 뜻을 만들게 되지요.
그렇다면 좀 더 분해하면 어떨까요?
점들만 나열되지 않겠습니까?
그 점들은 자신의 크기만큼의 낱말에 끼어들어 또 다른 글자나 부호를 만들어내는 재료로 쓰이겠지요.
그 점들은 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며 더욱더 많은 곳에 관여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려지면서 어떠한 곳에도 속해지는 동시에 어떠한 곳에도 속해지지 않게 됩니다.
이 같은 과정은 언어가 달라져도 마찬가지이며 모든 물질에 적용될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혼돈이라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벨은 바로 이러한 혼돈이라는 뜻입니다.
이외에도 바벨이라는 단어에는 하나님의 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전체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전체와 하나 되는 것이 혼돈이라고 말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조금 방향을 바꾸어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들은 기도를 하지요.
이때우리는 말로서 기도를 합니다.
각 나라별로 자신들의 언어로서 기도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은 어떤 언어인들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 아신바 되지만 우리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어떠한 기도가 필요할까요?
언어의 영역을 넘어선 기도가 아닐까요?
말이 필요 없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도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몇 분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만의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타인들 에게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래서 좀 더 하나님 가까이 가는 기도란 언어의 영역도 넘어서고 형상도 넘어선 영역으로의 진입을 뜻하며 깊은 기도를 말한다고 하는 겁니다.
깊은 기도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성령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요.
물론 그 성령은 빛과 말씀(진동)으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지금 나 홀로 목사가 말씀드리는 것은 명상입니다만 사람에 따라서는 명상의 방식이 다릅니다.
명상을 한답시고 망상만 피우는가 하면 명상을 통해 신과의 합일이 자신이 신이 되어버린 경우가 숱하게 많습니다.
이 또한 바벨탑사건에서는 말해놓았지요.
진정한 신과의 합일이란 인간세상으로 내려옴이지 절대 높은 자리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들이 지금의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내면의 성령을 깨우는 순간 천국의 문이 우리 안에서 열리는 거지요.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가 여러분께 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일입니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방법이 담겨져 있지요.
그러나 결코 그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앞서 모세가 만든 모세오경에서도 보았지만 액면그대로만 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에도 곳곳에 암초투성이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미궁에 빠지도록 만들어 놓았지요.
눈에 불을 켜지 않으면 깊숙한 수렁에 떨어져 얼마나 헤매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성경을 살펴보고 있으며 심안(心眼)을 열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이 같은 일을 해냈는데 짧은 시간동안 성경을 보는 눈을 두 개나 열었습니다.
첫 번째는 담겨진 의미를 보는 방법과 두 번째는 시험을 넘어서는 방법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또 한 가지는 초점을 성령에 맞추는 방법을 말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종교와 믿음의 대상을 달리한다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첫째가 액면그대로를 믿는 것이고 둘째가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며 세 번째가 걸러서 들을 줄 아는 지혜입니다.
걸러서 듣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영적인 가르침이 그 당시 특정한 누군가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수를 비롯하여 성경속의 많은 인물들이 가르침을 펼 때 했던 많은 말들이 그 시대의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고 있을 경우가 많기에 그러한 가르침을 무조건으로 따르기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말씀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맹신적인 자세보다는 교훈이며 걸러서 들을 줄 아는 지혜가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자신 마음대로 생각하게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신내면의 성령(신)에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잘 이해가가지 않는다는 분들을 위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미4:10)
지난시간 나 홀로 목사는 이 구절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 해석을 했고 성령이 우리들 안에 들어있음을 말했었지요.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갈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과연 그분들의 성경해석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분들의 인식에서 옳은 말씀을 하시는 거겠지만 적어도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발견하려는 분들은 그 말을 올곧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말씀(언어)의 영역에 있는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세상 것으로 밖에 할 수 없으며 진정한 말씀(진동, 빛)의 영역에 있는 이의 해석은 보다 영적이며 성령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진실 되며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간 것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군요.
과연 그런지 분석해 보기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간 사실을 예언해 놓았다는 이사야서 몇 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44: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사45:1)
이사야서 44장과 45장은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에게 축복이 함께하심을 말해놓은 것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분석해보면 고레스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벨론에 끌려가는 내용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이사야가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갔다 회복되는 것을 예언했다고 주장하지요.
만약 아직도 그러한 환상에 잡혀있다면 고레스라는 인물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레스라는 인물은 바사(페르시아)의 초대 왕으로 키루스2세 B. C (559~530)를 말하는데 그가 살아있는 동안 페르시아제국의 기초를 마련한 왕으로 알려져 있지요.
특히 그가 정복한 국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성경학자들이나 현시대의 목회자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과연 정복한 국가의 신마다 인정하는 이가 성경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맞을까요?
만약 맞는다고 한다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것이 될 것이고 틀리다고 한다면 성경을 불신하는 동시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겁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실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는 타인들의 종교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방인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목회자들은 결코 고레스와 달리 이방인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 홀로 목사가 감히 말하건대 자신내면에서 성령을 발견했다고 하고 그 성령이 그의 길을 밝히고 있다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가 맞습니다.
성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내면에서 깨어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놓은 것이라 봐야합니다.
아직도 인정을 하지 못하시는 많은 분들이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혀갔던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한 에스라를 보겠습니다.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스1:1)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요(스2:64)
여기에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에게서 풀려난 일이 보입니다.
바벨론이 고대도시였다는 점을 감안해서 바사가 바벨론이라고 쳐도 이스라엘민족 전체가 잡혀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 2장 64절에 확인이 되고 있지요.
과거에 이집트에서 모세가 끌고나온 회중의 숫자와 비교해보면 나 홀로 목사의 말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의 구약에 보면 각 민족들끼리 전쟁을 벌인 예가 숱하게 많습니다.
전쟁 중에 상대편에 포로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겠지요.
그러한 포로들을 바사(페르시아)왕 키루스(고레스)2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낸 것인데 여기에는 정치적인 배경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도 있으며 키루스가 정말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이룬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에스라는 이 같은 사실을 미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난 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바사왕 키루스(B.C559~530)보다 에스라(B. C456)가 80년 정도 훗날의 인물이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사야서45장1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했는데 고레스라는 이름만 지우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훗날 키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는 것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B. C 8세기경에 활약을 펼치던 인물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혔다가 풀려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미래사가 확정이 되어져있고 그길로만 가야한다면 인간들의 자유의지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지요.
정말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인가요?
미래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담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결코 확정된 미래를 향해 무조건 끌려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 생이 아니라는 것이며 고정된 미래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물론 불가피하게 해야만 하는 일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변의 미래상이 정해져있지는 않다는 거지요.
당연히 고정된 진실 또한 없음은 물론입니다.
비록 지금 나 홀로 목사가 열심히 성경해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보다 더 좋은 해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들 모두가 나 홀로 목사와 함께 성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나시기바라며 오늘은 여기에서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편재하시는
홀리하고 홀로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의 축복아래 오늘도 성경에서
당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였나이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완전한가를
내안에 살아계신 당신께서 판단하시는 영광을
허락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옵니다.
삶을 사는 동안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당신으로 인함이며
화복길흉이라 해도 뜻이 다르지 아니하고
복화흉길로 써져도 뜻을 알아보게 허락하시며
뒤섞여진 글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알아보게 허락하신 당신은
삼라만상과 함께 현존하는 신이심을
모든 이들이 알게 허락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