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신세 못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불쌍한 지경에 처해지거나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 밥을 빌어먹는다는 말이며 남이 먹기 싫어하는 찬밥을 먹어야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행동이 바르지 못하고 경우 없이 구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데 곱씹어봐야 합니다.
입맛이 민감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따뜻한 밥과 찬밥은 차이점이 많습니다.
다 같이 따뜻한 밥이라 할지라도 금방한밥과 보온밥통에 담겨있는 밥은 맛의 차이가 큽니다.
또한 다 같이 밥을 지어먹어도 냄비나 솥에 밥을 하는 것과 전기밥솥에 하는 밥이 다릅니다.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솥이나 냄비에 밥을 함에 있어 불을 땔 때 어떤 나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어떤 물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더욱더 깊은 인식하에서는 어떤 마음상태로 음식을 만들었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런 일을 중국살 때 직접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김치공장을 할 때 주방에서 식사준비 하는 분에게 화를 낸 적이 있지요.
김치에 머리카락이 들어갔기에 필요이상으로 내가 음성을 높인 겁니다.
나로서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심정으로 한말이었지만 당사자는 무척 서운했었나 봅니다.
그저 가정집에서 김치를 먹는 것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김치사업을 하는 공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렇지만 욕을 먹은 이는 식사 준비하는 내도록 투덜거렸고 막상 내가 밥을 먹을 때는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고 말았는데 아무리 참으려 해도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것은 물론 색깔도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동안 항상 밥은 윤기가 흘렀고 반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입맛하나는 좋았기에 이러한 경험은 그야말로 내게는 충격이었지요.
결국 내가 화를 냈던 것이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 셈입니다.
이일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일을 함에 있어 어떤 마음상태로 임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며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밝게도 어둡게도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한말과 행동은 결국 내게로 돌아온다는 점을 알게 된 겁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선의로 행동했다하더라도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아파한다면 같이 힘들어 진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지요.
이런 까닭에 스승이 제자들을 꾸짖는 행위를 두고 업장을 들어준다고 표현합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He is despised and rejected of men; a man of sorrows, and acquainted with grief: and we hid as it were our faces from him; he was despised, and we esteemed him not.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did esteem him stricken, smitten of God, and afflicted.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the chastisement of our peace was upon him;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3절에서 말하는 그는 내재한 성령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본인들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을 그로부터 감추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we hid as it were our faces from him)
삶을 영위함에 있어 가난과 고생스러움(간고)을 많이 겪고 병마에 시달리는(질고) 것은 성령이 드러나기 위한 진통인 것인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가 인식을 못해서 일뿐 성령은 몸 안에서 우리 육신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고 있는 겁니다.(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
육적인 인식의 범주아래 놓인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서라 생각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성령이 깨어나기 위한 진통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4절)
이러한 이유로 5절에서 그가 상처를 입는 것은 우리의 넘어섬을 위해서라 말해놓은 겁니다.(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육적인 감정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느낌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간고와 질고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상처받는 것은 우리의 죄업으로 인해서라 기록하고 있습니다.(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또한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벌이 그에게 가해진다 했으며(the chastisement of our peace was upon him) 그의 채찍질은 우리를 치유한다 한 겁니다.(his stripes we are healed)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내재한 성령이 드러난 이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승과 제자사이를 이렇게 설명한거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드러난 예수와 같은 분의 꾸지람은 제자들의 성령을 드러나게 만드는 질책과 같다는 거지요.
이러한 일을 위해 반드시 어떤 형식이나 격식, 또는 의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 자신의 영혼이 성령과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스승은 도처에 있기 마련이며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뿐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에서 모래알 같은 밥을 나에게 대접한 이는 한 소식을 했으며 영생을 향한 여정을 거침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이심전심이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찬밥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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