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믿음의 대상은 자신안에 있다.

배가번드 2023. 6. 27.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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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말하길 성경책은 종이가 얇아서 담배 말아 피우기 그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성경책을 들고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인지라 감히 불경스럽게 화장실에 성경을 들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책을 두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믿음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장실에 성경책을 들고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는가 하는 이들은 아직까지 성경책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성경책도 결국 사람이 써놓은 책이며 담긴 뜻이 따로 있음을 알았을 경우일겁니다.

이런 이들은 화장실 안에도 하나님이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삼라만상이 그로말미암지 않은바가 없음을 알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미 두려움을 초월한 상태가 되었다고 봐야하며 성령이 드러났다고 봐야합니다.

이것이 말로는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하지가 않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과도 결부가 되는 일입니다.

과거에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 일어났던 일을 떠올려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믿음에 따라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예수교 신자인지를 가리는 방법으로 예수님 얼굴을 그려놓고 밟아보라고 해서 건너뛰면 목을 잘랐다고 하니 믿음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삼자적인 생각으로는 그 까짓것 붓으로 그려놓은 예수님 얼굴을 밟는 것이 무슨 대순가 하겠지만 막상 자신의 마음 안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이상 이 같은 일은 엄청난 시험으로 다가 옵니다.

과거로 돌아갈 것도 없이 요즘도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보면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파룬궁의 창시자 이 홍지 선생의 사진을 찢어보라고 했을 때 신자라면 대부분 찢지 못하며 꼼짝없이 잡혀갑니다.

내가 속한 관음법문 역시 중국에서는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시험이 다르게 주어집니다.

다시는 관음법문에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라 강요받으며 고기나 계란을 먹으라고 합니다.

공안이 보는 앞에서 서약을 하고 먹는 사람은 훈방조치하고 서약을 하지 않거나 먹지 않고 버티면 풀어주지 않는 거지요.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중국살 때까지 한사람이 풀려나지 않고 있다고 했으니 믿음은 사람에 따라서는 목숨조차 좌우지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아신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And Jesus said unto them, Because of your unbelief: for verily I say unto you, If ye have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shall say unto this mountain, Remove hence to yonder place; and it shall remove;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unto you.

(없음)(마17:21)

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이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절두산에서 자신의 목이 잘린 이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현시대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겁니다.

산을 저리로 이리로 옮길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액면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담긴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시공간이 무너진 영의 세계를 뜻하며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육신과 무관한 삶을 살수 있다는 뜻이지요.(귀신을 쫒아냄)

믿음의 크기가 없음을 안다는 것은 곧 성령의 크기가 없음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며 빛의 크기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이는 장소는(yonder place) 눈에 보이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영의 세상을 뜻하는 겁니다.

창조의 영역이고 빛이신 성령의 영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21절은 기도와 금식으로 귀신을 쫒아낸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와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먹지 않고 존재하는 성령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한글성경은 번역을 하지 않았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이 같은 유는 기도와 금식으로 쫒아낼 수 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읽어보신 이들은 알겠지만 20절과 21절은 액면대로 받아들일 경우 문맥의 흐름이 전혀 맞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했는데 또다시 금식과 기도로서 쫒아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생각했기에 한글성경은 없음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믿음의 길에 접어든 누구라도 이 같은 점에 대해 알아야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육신의 판단에 따라서 안 된다는 것도 이래서 이지요.

본인의 몸으로 마음대로 믿는다는 데야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성령과 하나 되기를 원하는 이라면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이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