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비유의 가르침으로 깊은 뜻이 담긴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육신적인 관계로서의 부모자식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And Adam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from the LORD.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4:2)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4:4)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8)
이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단순하게 사람이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고 형제간의 다툼으로 형이 아우를 죽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깨달아 영생을 얻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으므로 영적인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담긴 뜻을 봐야하지요.
우리가 알듯이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으로 히브리어 뜻이 사람입니다.
하와의 뜻은 “생명”이니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인간 육신 안에 생명이 담겨있음을 말하고자 설정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 1절을 보게 되면 결혼을 했다고 하지 않았으며 그저 알았다고 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Adam knew Eve his wife)
이는 인간의 육체가 영육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러한 영육간의 합체인 사람 앞에는 두 가지 인생길이 놓인다는 뜻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낳았다는 가인의 뜻은 “소유, 획득, 대장장이” 이고 아벨의 뜻은 “숨, 증기, 목장”입니다.
이러한 뜻을 대비해보면 인생길에는 물질적인 길을 걷거나 영적인 길을 걷거나 두 가지의 길이 놓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물질을 득하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가인에 비유했고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와 사람들을 영의 세계로 이끄는 목자의 길을 걷는 일을 아벨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이유로 성령이신 하나님은 가인의 소산물은 받아들이지 않고 아벨의 것만 받아들인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몇 번이나 언급했으므로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또 다른 부모자식간의 일을 예로 들어 이러한 해석이 참됨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최초로 멜기세덱의 등급에 오른 이가 아브라함이며 그 뜻은 “만백성의 아버지, 믿음의 아버지” 등입니다.
이름자체만으로도 하나님과 하나 된 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라 추앙받고도 남음이 있는 인물이지요.
심지어 코란을 믿는 무슬림도 모세와 함께 추앙하고 있을 정도이며 아들을 바친 일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담긴 뜻이 따로 있으며 정말 자식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 비웃음”으로 세상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고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 주어지는 찬사와 비난을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살다보면 온간 난관과 어려움이 닥치게 되고 그로인한 감정의 기복이 생기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을 자식을 바친 것으로 묘사한 겁니다.
성직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적인 길을 위해 물질을 등지고 살아감에 있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지만 개의치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일은 대를 이어 계속되며 이삭의 자식인 야곱과 에서의 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창25:21)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25: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창25:24)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창25:25)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창25:26)
리브가의 뜻은 “그물끈”이며 에서는 “털복숭이”이고 야곱의 뜻은 “뒤꿈치를 잡다”이지요.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물질 세상에 사로잡힌 것과 같은 사람의 인생을 뜻하는 겁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육적인 면(털북숭이, 짐승과 동일함)에 초점이 맞춰진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구도의 길을 걷게 되면 내적으로 갈등을 겪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으로 치우친 삶을 살아가려하면 그때마다 내면에서 만류하는 손길이 작용합니다.
그러한 상황을 에서와 야곱에 비유한거지요.
따라서 에서는 구도자의 내면에 자리하는 육적인 인식이고 야곱은 영적인 인식으로 성령을 뜻하는 겁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야곱은 머지않아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며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구도자의 내면에 성령이 뿌리 내리게 되면 물질을 추구하는 일을 할 때마다 방해요소가 따르게 되고 일이 틀어지는가 하면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의 시험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 냈기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지요.
23절을 보게 되면 이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은 누구나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육적인 욕구가 강한사람은 영적인 면이 사그라지게 되어있고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이는 물질적인 유혹을 쉽게 이겨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렇지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했는데 이는 육신이 영을 섬기게 되어있다는 말이지요.
육이 먼저 만들어져야 영혼이 담길 수 있으므로 육을 큰 자로 영은 작은 자로 묘사했습니다.
시간관계상 더 이상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 일어난 일에는 이런 뜻이 담긴 겁니다.
내적 갈등을 경험한 이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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