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앞두고 엄청나게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슬라브를 타고 오후에는 벽체작업을 하는 일이 빈번하며 매일같이 슬라브 타는 일을 합니다.
정해진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은 실종 된지 오래고 그저 밥 먹고 잠시 쉬었다가 일하는 일상이 반복되는 중입니다.
현장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불평과 불만을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이지요.
개인적인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함께 일하는 팀장이 받아야하는 정신적인 압박감을 생각하면 불평할 수가 없는 겁니다.
나 역시 과거에 사람들을 데리고 일을 해보았고 그 애타는 마음을 알기에 될 수 있으면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게는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세상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 사람들의 이중성을 너무나 확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완성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이세상의 불합리성과 이중성은 나로 하여금 내가 걸어가는 길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 이런 점을 너무나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햇빛아래 일하는 것만 해도 죽을 맛인데 작업 장소 둘레를 안전 막으로 막아놓았기에 동료작업자 한사람이 걷어 올려놓자 금방 안전요원이 와서 다시 내리는 겁니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공기가 소통이 되어야 조금이라도 더위가 가실 것인데 작업자를 찜통 속에 밀어 넣는 짓을 한 셈입니다.
위험하기 때문에 걷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정말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사람들의 이중성을 생각하게 만들었지요.
오로지 전기 작업자들만 일을 하고 있었고 단부 쪽으로는 갈일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한증막같이 만든 것은 윗사람이 지시를 했기 때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본인들은 에어콘 바람 앞에 앉아서 그저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 보니 현장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지시를 내린 겁니다.
안전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겠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햇빛아래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보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작업자들이 미치거나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단부 쪽으로 가서 떨어질 일이 없음에도 이런 지시를 한 것은 신이 그 머릿속을 이상 작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사다리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킨 것과 같은 짓을 한거지요.
사고가 날 경우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아야함으로 이런 지시를 했겠지만 정말 안전을 위한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작 안전을 생각해서 할 일은 따로 있는데 계단을 올라가다보면 작업을 위해 발판을 미리 설치하는 것이야 말로 위험합니다.
모서리부분이 튀어나와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머리나 어깨를 부딪칠 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안전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마치 겉으로는 작업자들을 생각하는 척 하지만 실지로는 작업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욕심을 관철시키고 있는 겁니다.
현장 곳곳에는 안전을 위한 표어가 많이 붙어있는데 정말 그럴싸한 글귀가 많습니다.
“우리현장에는 당신이 위험에 빠지면서까지 해야 할 그 어떤 일도 없습니다.”라는 글귀를 비롯하여 근로자들의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기는 글귀가 여기저기 보이며 더운 날씨에 쉬어가면서 하라 말은 하지만 작업일정을 보면 거의 살인적입니다.
정해진 인원으로 쉼 없이 일을 해도 소화시키지 못할 일정을 정해놓고 쉬어가면서 일을 하라 말한다는 것은 사람을 놀리는 짓이지요.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그 일이 당신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며 앞으로 당하게 될 일을 예고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런 일을 통해 나 자신의 과거모습을 보고 있으며 앞으로의 미래상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모순된 짓을 했는가를 확실하게 보고 있으며 이일을 통해 지난 과거잘못을 갚고 있다 여기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손길을 느끼고 있지요.
내가 말하는 신은 특정종교가 말하는 유일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내재하신 성령을 뜻합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잘못된 행동을 악행이라 말하며 착한행동을 선행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행동을 다르게 함으로서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는 것은 내재하신 신을 성령으로 만들 수도 마귀로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불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업지시를 내린 사람의 마음을 마귀가 움직였다 할 것이고 성령을 깨달아 하나님과 하나 된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였다 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4:1)
Then was Jesus led up of the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of the devil.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마4:5)
Then the devil taketh him up into the holy city, and setteth him on a pinnacle of the temple,
이 내용을 만약 물리적인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마귀가 성전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농락하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마귀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마귀가 높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예수님의 내면에서 일어난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봐야 하며 우리들의 몸 안에 성령과 마귀가 동시에 들어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객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 마귀같이 되기도 하고 성령과 하나 되기도 한다는 뜻이지요.
인생의 목적을 물질에 두게 되면 남들과의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려하고 권모술수를 동원해서라도 목적물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살기 마련입니다.
타인의 불편함보다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마귀 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이 같은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는 것을 내가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구도의 길을 걷고 있거나 걷고자 마음먹는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해야합니다.
성경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물질을 목표로 삼고 살라는 말은 없으며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라는 말도 없지요.
시간관계상 마태복음 4장의 일부분만 올렸지만 전체내용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물질세상의 영화(榮華)보다 영생을 더 높이 평가하고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내용이 기록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두고 오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성령이나 마귀가 동일하게 내재하는 영혼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거부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과 함께 구원의 필요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설혹 마귀 같은 짓을 할지라도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또한 이런 식의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 틀리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마귀 같은 짓을 한 것만큼 누군가로부터 같은 일을 당할 거라는 점은 명심해야합니다.
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영의 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니 보이지 않는 영이 주어질 것은 당연한 것이며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살았으니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이 주어질 거라는 말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이용하고 다음에는 네가 나를 이용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할 것이라는 말이니 이보다 더 합리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시험과 함께 선택의 순간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주어집니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내 삶과 인생은 물론 영혼의 앞날까지 달렸으니 순간의 선택은 영생을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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