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부처로 보아야한다는 가르침을 머리에 이고 산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가 부처로 보이지 않는 현실을 해결하기위해 고민하고 있었지요.
98년의 어느 날 호주에서 버스를 타고 펍(선술집)을 지날 때 이었는데 취객하나가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모든 이를 부처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어찌 저런 사람을 부처로 볼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네가 보는 저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일 뿐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이세상은 연극무대이고 우리는 연기자이며 아직 연극의 막이 내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그 당시 하게 되었지요.
그날은 교회와 우리단체에서 공동으로 주최하는 홈레스 피플이나 마약중독자들에게 식사 제공하는 날이었는데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겁니다.
그동안 매일같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이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었는데 한꺼번에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마약중독자들이나 노숙자들 모두는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위해 그러한 역할을 스스로 맡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갑자기 그들이 고맙게 여겨졌지요.
그날부터 내입에서는 그분들이 식사하러 오면 감사하다는 인사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었고 이러한 인사말에 그들도 무척 좋아하며 내게 화답을 하거나 악수를 청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며 지금도 경험 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이러한 일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은 물론 삼라만상이 제 역할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일 뿐 더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이세상이 연극이라는 것을 알아서 일반인들과는 달리 관조자적인 시각을 가질 뿐이며 맡은바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갈 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극히 제한된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는 동안은 다양한 연극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으며 이런 연극무대에 섰다가 저런 연극무대에 서는 등의 경험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에 장자는 “호접몽”을 말했던 거지요.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나비가 된 장자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 자신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하며 꿈에서 깨고 난 후 도대체 나비가 인간의 꿈을 꾸는 것인지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구태여 우리가 장자의 호접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 꿈을 꾸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을 깨버리거나 꿈을 인식해버립니다.
꿈 내용이 그럴듯하면 계속해서 지켜보지만 어처구니없게 여겨지거나 기분이 몹시 나쁜 꿈이다 싶으면 이것은 꿈이구나 하고 인식을 한다는 말입니다.
잠을 깨버리면 또다시 잠을 자야하고 다른 꿈을 꾸어야 하기에 번거로우므로 꿈속에서 이것은 꿈이구나 하고 인식하게 되면 꿈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곧바로 깨었다가 새로 자게 되면 꿈을 기억하지 않게 되지요.
이것은 꿈에만 적용될 말이 아니라 세상살이에도 적용되는 겁니다.
어차피 이세상도 연극무대인만큼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나듯 일어나 버립니다.
인생에 있어서 만남과 헤어짐이 이래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지간하면 인연을 이어가는 선택을 하며 꿈을 지속적으로 꾸는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심한 악몽이다 싶으면 한순간에 깨어나 버립니다.
나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한 압박감을 주는 것은 악몽을 꾸게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며 나로 하여금 꿈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종교가 되었건 직장이 되었건 사람과의 인연이 되었건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이 세상 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영혼이 꾸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는 것이며 나에게 다가온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점에 대해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3:18)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전3:19)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3:20)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3:22)
움직이는 생명체는 모두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죽게 되면 몸체는 동일하게 흙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간다고 했지요.
혹자는 짐승의 혼과 사람의 혼은 다르다고 하겠지만 동일한 호흡이 있다 기록한 점을 볼 때 그렇게만 봐서는 안 됩니다.
호흡이란 단순하게 숨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18절을 보다시피 육에 속한 이는 짐승과 다름이 없으며 그러한 이의 영혼은 짐승의 혼과 같아서 땅으로 내려갑니다.
본인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아직 연극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인지라 꿈을 더 꾸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영적 스승은 “잠에서 깨어나듯 삶에서 깨어나라” 말했던 거지요.
앞서 호접몽을 꾼 장자처럼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짐승이라 해도 그 영혼은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쓰고도 짐승 같은 짓을 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내말은 타당성을 넘어 진리입니다.
또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짓이 성인의 품성을 닮은 동물들도 상당수 있음을 볼 때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하는 짓에 달렸다고 봐야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인터넷 서핑 중에 누군가 글을 올렸는데 유명한 조폭에 관한 이야기 이었지요.
고인이 되신 이 사람은 너무나 유명한 조폭으로 말년에는 목사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목사님이 된 이후에도 이런저런 사건으로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고 또다시 교도소를 갔다고 합니다.
결국 목회자(牧會者)가 된 것은 범죄자로서의 면피용이었고 내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런 이가 평소에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내용의 찬송을 열심히 불렀고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이분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니 모두가 부정적인 말들이었지요.
어제까지 사람을 죽이다가 오늘 갑자기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은 육신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가는 것이며 영혼도 일반적인 영혼이 아니라 성령과 하나 된 영혼이 갈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이 깨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신후사에(죽임이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내 앞날만 걱정하면 됩니다.
입으로 아무리 영생을 얻었다 말해봐야 소용이 없으며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씀만 드립니다.
삶에서 깨어나고 싶은 영혼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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