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선행은 자신을 천국에 이르게 한다.

배가번드 2023. 11. 18.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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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교차가 심한지라 독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독감으로 며칠간 고생을 했지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독감에 걸리곤 합니다.

주사를 맞고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으며 몸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육신을 악으로 규정짓고 있다할지라도 육신이 없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요.

몸이 심하게 아프면 영감이 떠오르지가 않으며 내재하신 신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수행자는 육신을 달래가면서 구도의 길을 걷습니다.

사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쉬어가라는 신의 메시지나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몸을 혹사시키기에 신이 발길을 무겁게 만드는 거지요.

그래서 요 며칠간 취침 시간을 늘렸고 가끔씩 글 쓰는 일도 쉬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올리던 것을 멈추고 가끔씩 건너뛰기도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로부터 성현들은 영적인 여정을 절벽 길에 비유한 겁니다.

중용지도(中庸之道)라는 말도 이래서 생겼을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자신 안에서 성령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어야 인생여정이 끝나고 나면 성령이 드러나 영생의 하늘로 들어 올림 받게 된다는 거지요.

본인의 믿음정도에 따라 이번 생에서 영생을 얻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말아야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 확신을 하지만 그렇게 쉽게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눅16:19)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눅16:20)

And there was a certain beggar named Lazarus, which was laid at his gate, full of sores,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16:21)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16:22)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16:23)

And in hell he lift up his eyes, being in torments, and seeth Abraham afar off, and Lazarus in his bosom.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16:24)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천국에서 거듭났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뜻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입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여 읽어보면 이 내용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지요.

우선적으로 볼 것은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생활을 호화롭게 영위(營爲)했다는 겁니다.(19절)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덜 아문 상처가 가득한 몸으로(full of sores) 부자의 문 앞에서 살았다고 합니다.(20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을 이렇게 비유한거지요.

우리가 취직을 하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부자의 문 앞에서 사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며 짐승 같은(영적이지 못한) 이들에게 능욕당하는 일을 개가 상처를 핥는 것에 비유한 겁니다.

이렇게 가난한자와 부자가 엇갈린 인생을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죽게 됩니다.(22절)

그렇지만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다고(in hell) 합니다.(23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나사로의 손끝에 물을 묻혀 혀에다 닿게만 해 달라 간청하고 있지요.(24절)

그런데 부자가 이렇게 지옥에 떨어져 불속에서 고통 받는 이유가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16:25)

But Abraham said, Son, remember that thou in thy lifetime receivedst thy good things, and likewise Lazarus evil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and thou art tormented.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16:26)

And beside all this, between us and you there is a great gulf fixed: so that they which would pass from hence to you cannot; neither can they pass to us, that would come from thence.

 

부자가 지옥 속에서 고통 받는 이유는 살아생전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므로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25절)

지금껏 수차례 말해왔듯이 부자가 되려면 남을 잘 이용해야하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함으로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현들은 항시 선한 일을 많이 하라 말하고 있으며 성경에도 이런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마25장 참조)

그런데 25절을 보면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Abraham said, Son)

이 같은 점을 볼 때 지옥에 떨어진 이가 살아생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과 하나 되어 멜기세덱의 등급에 오른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고 기도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생전 좋은 일을 얼마나 했는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는 거지요.

또한 삶에 지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구도자들은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늘 남들에게 양보를 하고 이용만 당한 당신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신다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살아생전 좋은 것을 받은 부자는 이 세상에서 누릴 것을 모두 누렸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높이 쌓아놓은 업장을 녹일 공덕 또한 없으므로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는 살아생전 갚아야할 업장을 모두 갚았으므로 천국으로 들어 올림 받게 되는 겁니다.

아마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 이 내용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자로 살아가는 분들은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러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내재하신 성령이 되살아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도우실수 있는 겁니다.

무턱대고 성경말씀을 믿습니다만 외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답은 나오기 마련이지요.

성경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바와 같이 선행은 자신을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소화시킨 사람은 행동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