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배가번드 2024. 1. 18.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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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시작된 추위가 아직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년 같으면 구정을 전후로 추위가 가시는데 이번추위는 시작이 늦은 만큼 꼬리가 길게 늘어지고 있나봅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리 추운날씨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일교차가 서서히 벌어지면서 낮에는 영상의 날씨가 되곤 하지요.

그러다보니 땅이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얼었다가 낮 시간에는 녹아내리다보니 작업시간에는 진흙을 밟으며 일을 하게 됩니다.

십 수 년을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이렇지 않은 해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은 반복될 겁니다.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계절이 바뀌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일이지요.

계절이 바뀔 때면 언제나 징조가 나타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겨울의 시작도 이러한 과정을 겪었으며 여름의 시작에도 이런 일은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가을비가 자주 내리고 나면 추운겨울이 오고 봄비가 잦으면 여름이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계절이 이러한 과정을 겪는 것과 같이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이 언제 시작되고 겨울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정해진바가 없으며 그 끝도 명확히 정해진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4계절은 존재하며 인생의 시작과 끝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번 생에 한정짓게 되면 시작은 탄생을 가리키고 끝은 죽음을 가리키겠지만 영혼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생의 시작과 끝은 명확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24:32)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마24:3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24장 전체를 읽어보면 이 내용이 세상 멸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될 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술(敍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살이를 통해 좀 더 겸손해지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유연해질 때 잎사귀가 나오듯이 성령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지요.

겨울에 얼음이 어는 것처럼 굳은 마음에는 성령의 불꽃이 피어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구도의 길을 걷노라면 반드시 시험이 다가옵니다.

물질적으로나 육신적으로 힘든 일이 닥치게 되면 믿음은 사정없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럴 때면 누군가 옆에서 잡아주는 힘이 필요합니다.

흔히들 이런 사람을 일러 소울 메이트라 하지요.

사실 사람들의 인생자체가 구도의 길이라 할 수 있으며 내 옆에 자리한 배우자가 소울 메이트입니다.

구태여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라는 점만 안다면 도(道)는(진리의길) 사방에 널려있으며 소울 메이트 역시 주변에 가득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여러분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지요.

아마 나와 함께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이나 영원한 해탈이 목표라 말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얻은 사람은(성령을 깨달은 사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미 몇 년 동안을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성령의 씨앗이 심어졌을 것이며 일부사람들은 성령의 불꽃이 살아났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을 되살리기보다는 성령이 드러난 사람답게 살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8)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37절 말씀은 신명기6장 5절을 인용하신 내용이며 39절 말씀은 레위기19장 18절을 인용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동일하다는 것은 성령을 볼 수 있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볼 수 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둘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이미 우리는 사람 안에 성령이 들어있음을 알았으므로 이제 사랑을 실천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됩니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 금식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베풀기만 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And now abideth faith, hope, charity,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charity.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이 내용은 노래가사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사랑을 뜻하는 lov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비와 너그러움과 관용을 뜻하는 charity를 사용했을까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겨집니다.

우리가 흔히들 사랑이라 하면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말하기 쉽지만 성경상의 사랑은 사람과의 사랑뿐 아니라 신과 사람사이의 사랑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이런 단어를 사용했을 걸로 짐작됩니다.

love는 에로스적인 느낌이 많이 나고 charity는 아가페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는 거지요.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가진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내용을 어떻게 우리 삶에서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사람들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으며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마찰과 다툼은 흔히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런 일로 인해 사람의 영혼이 영향을 받게 되는 거지요.

영생을 얻는데 치명적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 이를 경계하기위해 이러한 말씀을 남기신겁니다.

피할 수 없이 마찰과 다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가진 의미를 파악한다면 보다 쉽게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반복된 훈련을 통해 우리의 영적완성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언 땅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며 봄이 오듯이 우리삶에서도 다툼과 마찰을 통해 영적성장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오히려 평탄하고 안락한 삶은 영적으로는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운동이 되듯이 힘든 인생살이를 겪지 못하면 사랑의 확장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거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반드시 경험을 통해 일어날 수 있으며 자비와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온하고 풍족한 삶을 버리고 험하고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영생을 얻은 자의 특권임을 깨닫고 자비와 자선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움켜쥐고만 있는 것은 육적인 욕심 때문이며 주고자하는 마음은 사랑의 실천이니 나누면 배가 됨을 알았으면 합니다.

 

두들겨 패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소울 메이트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