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을 읽는 동안 순간순간 놀라게 되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 봅니다.
영적인 길을 걷게 되면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고 많은 시련과 시험들이 주어집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믿음이 커지고 믿음이 커져야 성령의 불꽃이 타오를 수 있기에 이 같은 일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말에 반대를 하겠지만 원하는 대로 주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병을 낫게 해달라면 낫게 해주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믿어서는 어린아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구원을 받는다거나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과 하나 되려는 이가 은총과 축복만 바라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항상 젖을 먹는 아이와 같이 바라기만 하는 신앙은 제대로 된 신앙이라 할 수 없으며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이 지향(志向)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하나 되려는 이들은 요나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음을 배워야 합니다.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먼저 영적인 완성을 이룬 사도들을 따라 배워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도 변함없이 사도들이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행16:35)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행16:36)
And the keeper of the prison told this saying to Paul, The magistrates have sent to let you go: now therefore depart, and go in peace.
날이 샜다는 것을 빛이 밝았다는 뜻이며 성령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감옥을(물질세상=육신) 관장(管掌)하는 치안판사가(the magistrates) 사도들을 놓으라 한 겁니다.(영적인 길을 포기하라는 내면의 소리)
이것은 인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 구도자가 빛(성령)을 보게 되면 물질세상과 멀어지게 됨으로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예수님은 몸소 체험한 적이 있으며 사람들안에 성령과 마귀가 공존함을 보여줍니다.(마태복음 4장 1~11절)
이러한 시험을 예수님은 이겨냈지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36절에서 간수가 바울일행에게 편안하게 떠나라고 했습니다.(go in peace=성령은 영원한 안식 속에 있음)
표면적으로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바울을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앞 시간에 본 내용을 보면 그렇게 볼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보았다시피 간수가 침례를 받고 온가족과 함께 기뻐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평안히 가라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구도자(간수=육신)에게 시험이 주어지자 영적인 길을 포기하려 한다는 뜻으로 봐야 하는 거지요.
이렇게 되자 성령의 입장으로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하리라 한 대(행16:37)
But Paul said unto them, They have beaten us openly uncondemned, being Romans, and have cast us into prison; and now do they thrust us out privily? nay verily; but let them come themselves and fetch us out.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행16:38)
And the serjeants told these words unto the magistrates: and they feared, when they heard that they were Romans.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행16:39)
37절은 직역을 해봐야 제대로 된 뜻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But Paul said unto them) 그들이 공개적으로 탓할 데 없는 우리를(사도들=성령과 하나 됨=완전함) 억제하였고(They have beaten us openly uncondemned) 로마사람이 되도록 했다가(being Romans) 감옥에 집어넣었다 했습니다.(have cast us into prison)
※[beaten:형용사로서의 뜻은 두들겨 맞다. 동사로 쓰였을 때는 통제하다, 억제하다]
처음에는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불씨를 받아들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치니까 남몰래 성령을 밀어 내려 한다는(they thrust us out privily) 말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참으로 그것은 안 된다 하며(nay verily) 치안판사가 직접 와서 데려가라 말합니다.(let them come themselves and fetch us out)
이 내용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면 반드시 내면에서 반대되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삶이 평탄하면 별일이 없지만 고난과 시련이 지속적으로 닥쳐오면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그럴 때 과감하게 이겨내지 않으면 마귀에 굴복하는 것과 같아진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겉보기에는 치안판사가 와서 데려가라는 걸로 보이지만 심하게 표현하면 마귀더러 성령을 쫓아내라 말하라는 거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38절에서 치안판사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로마사람(이방인)이라고 하는 말에 두려워했다는 것은 성령과 하나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이방의 마음에 성령이 자리하게 되면 마귀는 설자리가 없는지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9절은 힘든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구도자의 연약한 마음을 표현한거로 봐야 하는 겁니다.
당면한 어려움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지라 영적인 길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볼 수 있지요.
이렇게 되면 성령은 두말없이 떠난다는 것을 다음 내용은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진정으로 현실을 힘들어하면 성령은 떠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이것은 성령이 떠난 것이 아니라 잠들거나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달리표현하면 내재하신 신의 품성을 마귀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빛이신 성령이 육신(감옥)에 머물게 만들면 온몸이 밝아지고 마귀가 머물게 되면 어둠에 휩싸이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남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에게 위로를 주고 떠난다 한거지요.
루디아의 뜻은 “생산”이므로 성령을 잉태하여 생산해 내지 못하면 성령은 떠난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에게는 위로가 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 성령을 감옥에 가두는 꼴이 된다는 것을 16장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질로 내 주변에는 이러한 이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길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수행을 포기하겠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닥친다는 것은 생각에 따라서는 나쁘다고만 볼 수 없는 거지요.
어린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견디기 힘든 짐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감당할 만큼의 짐을 주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태산 같은 욕심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되지요.
그러므로 버릴 것은 성령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16장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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