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는 교구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동생의 권유에 따라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동안 전도활동을 한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였지요.
나도 모르게 교회에서는 나를 문제아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극성스러운 동생이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 여기고 있기에 구역식구들에게 기도부탁을 했고 그로인해 같은 교구 식구들에게는 유명인사가 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동생과 함께 교회를 다닌 지 20년이 다되어가고 침례를 받은 지도 십 수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제자리라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성경 내용과 내가 보는 성경 내용의 차이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전도사님이 말씀하신 성경내용을 예로 들어 보고자 합니다.
수일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막2:1)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2:2)
And straightway many were gathered together, insomuch that there was no room to receive them, no, not so much as about the door: and he preached the word unto them.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2:3)
And they come unto him, bringing one sick of the palsy, which was borne of four.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2:4)
And when they could not come nigh unto him for the press, they uncovered the roof where he was: and when they had broken it up, they let down the bed wherein the sick of the palsy lay.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5)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unto the sick of the palsy, Son, thy sins be forgiven thee.
전도사님은 이 내용을 예로 들어 협력을 말씀하셨으며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노력을 말씀하셨지요.
말로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 할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남의 집 지붕을 뜯을 정도의 열성과 협력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꿈보다 해몽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며 실질적으로 말씀은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들을 교회에 데려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내용은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니라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가버나움의 뜻은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의 뜻은 “위로자,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1절 내용은 예수님이 위로자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봐야 하며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 왔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2절에서 일직선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straightway many were gathered together) 그들을 받아들일 방이 없었고(there was no room to receive them) 문조차도 없었다고 하며(not so much as about the door) 그런 가운데도 예수님은 도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방도 없고 문도 없는 집은 없으므로 여기에는 담긴 뜻이 있는 겁니다.
즉, 위로자로서 예수께서 진리에 대한 설법을 하셨지만 성령이신 예수님을 담을 방도 없었고 문을 열어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네 사람이 중풍환자를 데려왔다 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해석 됩니다.
중풍환자를 데려온 것은 맞지만 네 명의 탄생됨이라 적고 있습니다.(which was borne of four)
성경적으로4는 사람의 숫자이자 인자의 숫자입니다.
그리고 중풍은 피가 막혀서 발생함으로 생명의 흐름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로서 성령과 하나 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성령을 깨닫지 못하던 사람이 인자로서 거듭났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 방법이 기가 막힙니다.
4절에서 지붕을 뚫어 침상을 내렸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압박으로 인해 예수께 다가갈 수 없다 했는데(not come nigh unto him for the press) 이는 고정관념이나 기존의 인식 및 환경을 가리킨다고 봐야합니다.
성령과 함께 하려면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들과는 결별을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내었다고 했습니다.
가장 높은 인식 세계를 지붕에 비유했으며 하늘과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뜻이지요.
중풍으로 누워있는 환자를(the sick of the palsy lay) 그곳에다 내렸다 했으니(they let down the bed wherein) 잘못된 인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믿고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는 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5절에서 예수님은 중풍환자에게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며 죄가 용서받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가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할 대목이 나옵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신다고 했으니(Jesus saw their faith) 중풍환자만의 믿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중풍환자를 아들로 표현하고 용서하는 걸로 봐서는(Son, thy sins be forgiven thee) 예수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신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즉, 육신의 예수가 아닌 성령으로서 말씀하신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 내용은 예수를 구원자로 생각하고 직통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아왔지만 육적이고 물질적인 인식으로는 성령과 하나 되지 못하며 높은 인식에 도달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봐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을 낳지 못한다면 아주 심각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어가면서라도 사람들을 교회로 끌고 와야 한다 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을 불사하며 사람들을 끌고 와야 한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가 되어 오로지 자신의 욕심에 의해 사람들을 심판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이 행동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더라도 이 내용은 액면대로 볼 것이 아닙니다.
인파로 인해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면 네 사람이 환자를 지붕위로 들어 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남의 집 지붕을 뜯을 정도면 사람들이 비켜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치적으로 따져 봐도 금방 드러날 일을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니 믿으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이러니 나같이 빛이신 성령을 경험한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정도로 여기게 되는 겁니다.
나로서는 성경 속 하나님의 권유에 따라 청하기만 하면 무조건 교회를 나가고 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야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영혼의 안식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거지요.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는 개인의 역량에 달린 문제인지라 뭐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 제자들의 시각도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마태오는 시각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단순 비교 해봐도 두복음서의 내용을 액면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내말을 믿고 안 믿고는 본인에게 달렸겠지만 성령이 되살아났다면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알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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