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 인디언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전해져오는 이야기하나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산다고 합니다.
한 마리는 선한 늑대로 기쁨, 용기, 희망, 친절, 자신감, 신념, 자기 확신과 믿음을 먹고 살고 다른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 분노, 질투, 슬픔, 후회, 죄책감, 열등감, 좌절, 욕망, 공포, 짜증 그리고 자아(自我)를 먹고 산다고 하지요.
이두마리의 늑대가 육신 안에서 늘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승리를 쟁취한다는 겁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전승(傳承)되어지는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인디언의 가르침은 육에 속한 것이고 성경의 가르침은 영에 대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속뜻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영육을 함께 이롭게 하는 말씀입니다.
영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삶에 임하며 자신감과 신념으로 가득 차 영생과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은 늘 불만하고 분노하며 질투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슬픔에 빠지게 만들며 그러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또다시 후회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열등감에 빠져들게 만들어 좌절하여 인생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또한 만족이 없다보니 항상 욕심과 욕망 속에 빠져 살며 그로인한 공포와 마음대로 되지 않음에 짜증을 내며 스스로의 영혼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우리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이러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육신에 초점이 맞춰진 삶을 사는 이상 선한늑대가 승리하게 만들 수는 없으며 슬픔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속의 많은 선지자들은 육신보다 영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라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었던 이가 바로 예수이며 그가 체험한 일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마4:5)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7)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4:8)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
Then the devil leaveth him, and, behold, angels came and ministered unto him.
우선적으로 우리가 볼 것은 마귀가 저 멀리 하늘이나 땅 아래 지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점을 5절은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육신을 성전으로 보고 가장 높은 인식에 도달한 것을 성전 꼭대기기에 선 것에 비유한거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과 하나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마음 안에서 육과영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마귀를 따르는 것이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육적욕망을 이루게 만드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뜻이지요.(6절)
체로키 인디언이 언급한 선한늑대는 자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어떤 욕구와 욕망에 현혹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내가 노력하여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뭔가 특별한 힘이나 간계(奸計)를 이용하여 물질적이고 육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은 모두가 마귀가 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확고히 한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용기와 희망을 가지며 타인에게 친절하기 마련이지요.
하나님이신 성령이 내재함을 아는지라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찌 이웃에게 친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물질적인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질투를 유발 합니다.
내가 타인처럼 가지지 못한 것에 화가 나고 부모를 잘못 만난 것과 못난 자신에 대해 후회하며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지요.
그래서 남들과 경쟁을 하며 조금 더 많이 차지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되며 죄책감이 생기게 됩니다.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므로 공포와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그로인해 자신의 영혼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내말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으라, 노력해야한다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얻어놓은 것들이 인생의 마지막 날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은 하되 타인들과 지나친 경쟁을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나가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할일이지만 경쟁을 하는 동안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상처주어야한다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말하듯이 모든 사람들안에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깊숙이 잠들어 있습니다.
먼저 깨어난 사람이 있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 근본에 있어 다른 점은 없는 겁니다.
다만 깨어난 사람은 현실에 만족을 하고 그렇지 못한 이는 불만과 불평 속에 살아가는 것이 다릅니다.
주어진 현실을 만족하는 이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불평과 불만 속에 사는 이는 자신의 의(義)를 앞세우고 살아가는 거지요.
이러한 점을 보게 되면 성령을 깨우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깨어나서 만족하는 것이나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성령이 깨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성령이 주관하는 삶이란 이런 것이며 천사들의 수종을 받는다는 것도 이런 겁니다.
만약 천사들이 나타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을 준다면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할 필요가 없으며 성경말씀도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수종(隨從)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이 주관하는 삶을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하며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물질적으로 풍족해지고 육신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라 받아들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만족하는 마음이 주어지기에 풍족해 지며 육신적으로도 편안하고 완전해집니다.
마음에 욕심이 없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구도자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풍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령으로 거듭나면 영육 간에 축복이 내린다 말하는 것이며 외적으로는 빈곤하나 내적으로는 풍요 속에 머문다는 표현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주관이라 할 수 있으며 객관적인 관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나 체로키 인디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선한늑대에게 먹이 주는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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