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라면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仲保者)라는 사실을 모를 수는 없지요.
중보자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대립 또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를 얻게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예수만이 유일하게 중보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며 사람은 누구나가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회자들 대부분은 다음 구절을 내밀며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2:5)
이런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14:19)
디모데전서와 요한복음이 상충되는 것 같지만 정확히 일치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라 한 것은 하나님이 빛이신 성령이라는 뜻으로 나와 하나님은 일대일의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구약에 기록된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됨으로 당연히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면관계상 예문으로 올리지는 못하지만 창세기1장26절,3장22절,6장2절에는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사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 속에는 영생의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숱하게 많으므로 하나님이 여럿인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은 빛이신 성령으로 인식되어야하며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봐야 됩니다.
요한복음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된 것으로 성령으로 돌아올 것을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 자신과 함께하던 제자들의 몸 안에 중보자로서 빛이신 성령으로 되살아남을 뜻합니다.
요한복음16절에서 언급된 보혜사나 바울이 말한 중보자가 같은 뜻으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오로지 예수만이 유일한 중보자라 말하며 그만이 사람과 하나님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는 걸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본인들이 물질적이고 육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성령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은 죄를 씻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이며 예수가 보낸다는 보혜사에 대해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다는 거지요.
사실 중보자가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틀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서로 일치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본인의 짐만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짐까지 짊어질 각오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하는 거지요.
우리를 위해 자신이 희생양의 표본이 되었으므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이렇게 될 것을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종용(慫慂)하고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육신의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을 따를 것을 주문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보혜사를 보낸다는 말과 같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을 위해 육신의 죽음 따위를 두려워 말라는 거지요.
이 같은 가르침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합니다.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이신 예수님의 몸에 빛이신 성령으로 인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본뜻이므로 우리역시 이러한 상태가 되어야하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들 목회자(牧會者)라 하면 목사나 전도사를 가리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모든 이가 중보자가 될 수 있어야 하며 희생양이 될 준비를 갖춘 자가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신도들 위에 군림하여 호령하며 호의호식하면서 희생양이 되신 예수를 따르라고 하는 짓은 그야말로 웃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마치 장수가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 몰고 자신은 안전 처에서 소리만 질러대는 꼴이지요.
일반적으로 사업하는 이들은 어음을 발행합니다.
언제 어느 날짜에 갚겠다는 약속을 증서로 만들어 거래를 하지요.
이러한 어음은 유통시장에서는 현금과 다름없이 통용이 되며 거의 화폐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업하는 사람은 자신이 발행도하고 받을 때도 있는데 항상 통용할 때는 뒤에다 이서(裏書)를 합니다.
발행인이 갚지 못할 경우에는 내가 갚겠다는 약속의 의미로 어음 뒤에다 사인하는 겁니다.
만약 어음이 부도가 나면 뒤에 이서한 사람들은 차례대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어음제도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거나 영적인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약속어음과도 같은 관계가 성립됩니다.
내 제자의 잘못은 내가 갚겠다는 것이 스승으로 나선자의 의무이며 스승의 말씀을 목숨처럼 떠받들며 따르겠다는 것이 제자의 도리입니다.
그러할 진데 스승이나 다름없는 목회자가 신도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성경말씀을 이용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그나마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생전에 지옥을 경험하여 뉘우칠 기회라도 주어지지만 끝내 뉘우침 없이 죽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요.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But Abraham said, Son, remember that thou in thy lifetime receivedst thy good things, and likewise Lazarus evil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and thou art tormented.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며 멜기세덱(의의왕)의 반차에 오른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하나 된 이로서 하나님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그가 심판을 하는지라 부자를 아들이라(Son) 부르고 있지요.
부자는 살아생전 하나님을 믿고 따랐기에 아브라함이 아들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조차 지옥에 떨어져 괴로움을 받을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 물질적 풍요와 세상의 즐거움을 향유했다면 보상을 미리 받았음을 알라는 것이며 반대로 고난과 역경 속에 있다면 받을 것은 영생의 하늘에서 누릴 평강과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구도자는 스스로 처해있는 상황과 마음상태를 항상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인이 누군가에게 짐을 맡기고 따라가는 사람인지 본인 스스로의 짐을 지고 타인의 짐까지 짊어질 사람인지를 살펴야 한다는 거지요.
한낱 작은 회사의 사장이라 할지라도 책임과 의무가 막중하거늘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의 책무가 어떠하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 홀로목사는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며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길 자처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동행 하고 싶은 이들만 들으시오.
※나사로의 뜻 “하나님이 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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