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육신의 고통이 영혼의 안식을 준다.

배가번드 2025. 1. 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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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에 대해 말하면 기분나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를 많이 지었으므로 당연히 싫어하지요.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억지로 돌려서 말하기도 힘듭니다.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직접 살아본 결과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기분나빠하는 이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어쩌다 실수로 죄를 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죗값을 받아야한다면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하얀 도화지에 먹물을 떨어트렸을 때 흔적이 남는 것과 같이 죄를 짓게 되면 영혼에 얼룩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생긴 얼룩을 지우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러한 일을 두고 인과를 넘어선다, 혹은 구원을 받는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과를 넘어선다는 말의 뜻과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을 겁니다.

심었으니 당연히 거두는 것인데 이러한 법칙을 거스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다만 심은 것을 달리함으로 결과가 달라지게 만들 수는 있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 수박을 심었다고 했을 때 당연히 수박을 수확하게 되겠지만 수박이 알고 보니 호박이었음을 알았다면 그것은 호박을 심은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치관이 바뀐다는 말로서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짐으로 원인 또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더라도 영혼이 성령과 하나 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면 그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조폭으로부터 장세를 뜯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야밤에 숨어 있다가 조폭의 뒤통수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수십 년을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절에 다니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다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아마도 어떤 목사님은 자신 있게 구원받게 해주겠다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보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여겨집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이 말씀을 보건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모두가 깨끗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구원받은 이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지은 죄는 씻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목욕이란 영혼의 구원을 가리킨다는 점이며 예수와 같은 메신저를 만나면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는 것이며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일이지요.

우리가 바울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저 말로만 믿는다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발을 맡긴 것 같이 일단 죄 사함의 의식을 통해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지나간 죄에 대해서도 씻었지만 앞으로 걸어가면서 죄를 짓게 되면 여기에 대한 벌은 받아야하며 용서받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앞서 예를 들은 살인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없고 그로인한 벌을 받지 않을 수 없지요.

살아가는 동안 기가 막힌 일을 수없이 당할 것이며 그때마다 뼈저리게 과거를 후회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어서 구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에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인겁니다.

양심이 죽어버린 사람은 사람을 수없이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죽어서는 영혼이 심판을 받게 되지만 양심이 살아난 사람은(구원을 받은 사람) 살아생전 씻김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므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마다 내 죄를 씻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다가와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무슨 수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겠냐는 말입니다.

자신은 수시로 실수를 연발하면서 타인의 실수는 용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실수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겁니다.

지금당장 생각해보더라도 이 같은 점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때 본인이 영혼의 세계에 대해 아는가를 들여다보라는 말이지요.

죽어서 영생의 하늘에 오를 자신이 있다고 한다면 내말의 뜻을 알 것이며 그럴 자신이 없다면 영혼을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고자 마음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어야하며 언제나 용서와 이해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불공평함과 불공정한 일을 겪지 않을 수가 없으며 언제나 정의에 목말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판단은 내 기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것은 아닙니다.

본인 안에 성령이신 하나님이 거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잘 알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것은 성령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성령이 잠들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앞서 예를 든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언제나 타인과의 접촉에서 자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불이익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았기 때문에 항상 악몽에 시달렸던 것이며 죄가 사해지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알고 보면 꿈으로 업장이 해소되고 있는 것이며 지금쯤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경우 불이익의 순간이 다가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묵묵히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뻐합니다.

육신은 비록 고통을 당하지만 영혼이 대 자유를 얻게 될 것을 확신하는지라 이렇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지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흔히들 구원을 받는다하면 천국 가는 것으로 알지만 속 깊은 뜻은 예수와 같이 인자가 되어 영생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한 내용이 예수만의 전용일 것 같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이 내용을 우리 삶에 제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멸시를 당하고 귀하게 여김 받지 못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괘념치 말며 육신의 고통이 영혼의 나음과 안식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거지요.

또한 육신이 비록 잘못 판단하여 죄를 남발하더라도 성령이 죄 사함을 담당하여 여러 가지 상황을 주실 것이 분명한지라 주어진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힘들어도 불평하지 않고 감내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이의 경우는 내가 알 수 없으나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