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렇게 오래 다니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아는 얼굴들이 제법보이며 다들 반갑게 맞아주셨지요.
모처럼 약속도 없고 때마침 형제한분이 전화를 걸어오셨기에 나가게 된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목사님의 설교는 나로 하여금 상고(相考)의 욕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목사님이 인용하신 성경구절을 상고(詳考)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10:38)
Now it came to pass, as they went, that he entered into a certain village: and a certain woman named Martha received him into her house.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And she had a sister called Mary, which also sat at Jesus' feet, and heard his word.
이 말씀은 4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과 하나 된 메시아(사마리아인)라는 말씀을 하신 이후에 나온 내용이지요.
10장 전체를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성령이 육신과는 무관한 존재임을 알라는 뜻으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며 그 연장선에서 이 내용이 해석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38절에서 마르다가 자신의 집으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은(Martha received him into her house) 성령을 영접했다고 봐야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령과 하나 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들여 성령의 불씨를 마음 안에 심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이름에 담긴 뜻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의 뜻은 “여주인, 숙녀”로서 육신을 비유한 것이고 마리아의 뜻은 “존귀한분, 가장 귀한 분”등으로 영혼을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비유의 가르침이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인과 아벨이고 야곱과 에서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구약에서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르다는 육적인 면이고 마리아는 영적인 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39절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다 한 겁니다.(sat at Jesus' feet, and heard his word)
발에 앉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지라 발치에 앉는다 해석했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발자취, 즉 예수님의 걸어오신 길을 통해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해석이 아주 타당하다는 내용이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10:40)
But Martha was cumbered about much serving, and came to him, and said, Lord, dost thou not care that my sister hath left me to serve alone? bid her therefore that she help me.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는 달리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로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Martha was cumbered about much serving)
급기야 마르다는 내 동생이 나 혼자 접대하는 것을(my sister hath left me to serve alone) 상관하지 않으시냐(thou not care) 주님께 불평을 호소하고 있지요.
이 상황을 육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누군가는 예수님을 영접하느라 노동을 해야 하고 누군가를 말씀만 듣는다 생각하게 되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이 맡은바 직분에 따라 육신은 일을 해야 하지만 내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음을 알라는 뜻입니다.
이미 내 집(육신=마르다)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영접하였음을 확신하라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지라 사람들은 불평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걷고 있는 영적인 길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비유로서 말해주고 있는 거지요.
또한 이 말씀은 성령을 영접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많은 수고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일처럼 분주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성령을 영접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10:41)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er, Martha, Martha, thou art careful and troubled about many things: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But one thing is needful: and Mary hath chosen that good part, which shall not be taken away from her.(KJV)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NIV)
41절은 육신이 자신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씀이지요.(마르다의 뜻: 여주인, 숙녀)
성령을 영접하기위해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걱정과 근심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라 본인만이 고생을 한다고 여기겠지만 실상은 이미 내면으로 성령과 연결이 되고 있으므로 걱정근심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2절에서 한 가지만 필요하다 말씀하신거지요.(one thing is needful)
한글성경은 몇 가지만 하든지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영어성경 두 곳 모두 한 가지만 필요하다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성경이 이렇게 해석해놓은 것은 이 내용을 육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유지되려면 많은 이들의 수고가 필요한데 오로지 말씀만 들어야한다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해놓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KJV성경을 보면 마리아가 선한 편을 선택했다(Mary hath chosen that good part) 했는데 한글성경은 NIV를 번역한지라 좋은 쪽을 선택했다(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적고 있습니다.(선함=하나님=성령)
그러므로 이 내용은 존귀에 처해지려면(성령을 영접하려면) 육신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내재하신 성령에 초점을 맞춰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목사님과 내가 같은 성경을 다르게 본다는 점을 상고하였거니와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성령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안에 영접해야한다는 목적은 같다는 말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누가복음 상고(相考)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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