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는 전과 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서 첫 구절에는 “소스데네”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처럼 나와 있지만 그렇지 않음을 확인한바 있지요.
고린도의 뜻은 “뿔”로서 강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소스데네의 뜻은 “견고하다, 힘이 있다”이므로 바울이 성령으로서 강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권고하는 내용이었음을 지난시간 확인을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후서는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1:1)
Paul, an apostle of Jesus Christ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unto the church of God which is at Corinth, with all the saints which are in all Achaia: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1:2)
디모데의 뜻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며 아가야의 뜻은 “형제”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된 바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과 함께하며(디모데와 함께) 형제의 자격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with all the saints which are in all Achaia) 하나님과 그리스도예수의 은총과 평화가 깃들기를 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단순하게 누군가를 보내고 함께 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이 사도와 같은 반열의 형제가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한다 바울은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1:3)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Who comforteth us in all our tribulation, that we may be able to comfort them which are in any trouble, by the comfort wherewith we ourselves are comforted of God.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으며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라 묘사하고 있지요.(3절)
이렇게 말해놓은 이유는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이신 예수의 몸에 성령으로 임하셨음을 말하기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우리의 모든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사도들을) 위로한다했으며 그러한 위로를 가지고(the comfort wherewith) 환란 속에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 했지요.(we may be able to comfort them which are in any trouble)
즉,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많은 고난을 받았음으로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And whether we be afflicted, it is for your consolation and salvation, which is effectual in the enduring of the same sufferings which we also suffer: or whether we be comforted, it is for your consolation and salvation.
그리스도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하늘로부터 축성 받은 사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으며 성령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5절 내용은 하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려면(성령이 임하려면) 그만큼 시련을 이겨 내야하며 그로인해 위로도 커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점을 불가(佛家)에서는 번뇌(煩惱)는 보리(菩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 믿음이 더욱 강해지며 결국에는 성령과 하나 된다는 뜻이지요.(득도의 경지)
그래서 6절에서 우리가(사도들) 고난당하는 것이(we be afflicted) 너희의 위안과 구원 때문이라(for your consolation and salvation) 한 겁니다.
또한 사도들 또한 고난을 받는 것이(we also suffer) 고난을 견디는데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effectual in the enduring of the same sufferings)
사도들조차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지만 속뜻은 따로 있지요.
성령과 하나 된 이들은 육신의 고통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뜻이며 육신의 고통은 육에 속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을 일러 불가에서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똑같은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상태가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고 영이 깨어나 육신과 분리된 상태에 도달했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이사야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Surely 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did esteem him stricken, smitten of God, and afflicted.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the chastisement of our peace was upon him;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 말씀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씀을 들어본 결과 바울과 동행하는 형제들 모두가 여기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즉, 그리스도가 성령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우리 안에 내재함을 깨닫게 되면 누구라도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할 점은 자신이 당하는 시련과 고통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려면 그이상의 고난과 시련을 받아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죄조차 감당하지 못하면서 세상 죄를 모두 지겠다고 나선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거지요.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위로 자가 되고 구원을 주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부터 해결해야만 하며 시련과 고난을 자청해야 됩니다.
본인은 높은 자리에 군림하여 세상을 즐기면서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세상을 구하겠다 말한다면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과 사도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는지 밝히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지면관계상 다룰 수가 없고 여기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음시간에 이 같은 일에 대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짧은생각 긴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은혜는 양심이 증언한다. (0) | 2025.03.27 |
---|---|
극심한 시련과 고통이 주어질 수 있다. (0) | 2025.03.26 |
제사장이 입어야하는 옷의 의미. (0) | 2025.03.24 |
빛이 없으면 스위치가 꺼진 상태다. (0) | 2025.03.23 |
자비롭게(with charity) 처신하라. (2) | 2025.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