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하나 되기까지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바울이 말했으므로 오늘은 이 같은 일에 대해 상고해볼까 합니다.
왜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고 그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는 겁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성경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7)
And our hope of you is stedfast, knowing, that as ye are partakers of the sufferings, so shall ye be also of the consolation.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란(our hope of you) 성령과 하나 되어 믿음의 길에 나선 이들을 구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고통을 분담하는 것처럼(partakers of the sufferings) 위안도 분담할 줄 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신 다음말씀과 동일합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세상적인 일이나 육적 속성에 굴복하지 말고 성령을 따르라는 뜻이지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서는 성령과 하나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위로를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편하게 결실만 얻으려 해서는 성령과 하나 되기 어렵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이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For we would not, brethren, have you ignorant of our trouble which came to us in Asia, that we were pressed out of measure, above strength, insomuch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아시아의 뜻은 “해 뜨는 동쪽, 중앙”으로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되는 과정에서 고난과 시련을 겪었음을 밝히고 있는 겁니다.
우리 내면 중앙에 내재하신 성령이 드러나기 위해서 힘겹고(above strength) 측량하기 힘든 압박을 받았으며(were pressed out of measur) 삶을 포기할 만큼의(insomuch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어려움이 다가왔다 했습니다.(which came to us in Asia)
그런데 이렇게 힘든 시련의 시간이 주어진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9)
But we had the sentence of death in ourselves, that we should not trust in ourselves, but in God which raiseth the dead: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자신들이 사형선고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the sentence of death in ourselves)
여기에서 생각해볼 점은 바울이 자신이라 말하지 않고 북수 형인 우리라는 대명사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성령과 하나 되려는 모든 이, 즉 사도들과 형제모두가 겪는 고난과 시련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적속성이 무너지기 위해서는 죽음에 버금가는 시련과 고통이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러한 시련이 우리자신(육신)에게 의지하지 말고(not trust in ourselves) 죽음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을(성령) 믿게 하려 했다 합니다.(in God which raiseth the dead)
즉, 육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영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애벌레에서 깨어나는 나비가 겪는 고통을 감내해야한다는 뜻이지요.
앞서 예문으로 올린 예수님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10)
Who delivered us from so great a death, and doth deliver: in whom we trust that he will yet deliver us;
큰 사망이라 표현한 것은 육신의 죽음 너머에 있는 영혼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육신의 죽음과 함께 죽어질 우리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셨고(delivered us from so great a death) 구하시고(doth deliver) 구하시게 될 것을 믿는다고 했지요.(we trust that he will yet deliver us)
과거, 현재, 미래까지 관장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진바 육신의 사망이후에도 영생이 보장받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구도자(求道者)의 여정을 위로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1:11)
Ye also helping together by prayer for us, that for the gift bestowed upon us by the means of many persons thanks may be given by many on our behalf.
이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사도들을 숭배하고 물질적으로 도와야한다 말하게 되지만 속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우리를 위해 기도로서 함께 도우라고 했지요.(helping together by prayer for us)
이렇게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성령의 은사가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로인한 유익이(by many on our behalf) 많은 이들에게 감사로 돌아가게(many persons thanks may be given)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인즉 기도는 성령에게 전달되고 그러한 힘은 또다시 사도들의 입을 통해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성령이 어떻게 작용하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심전심법이 적용된다는 겁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영적인 내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인 동시에 영의 세계를 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신 성령이 기도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사람은 돈을 중시여기겠지만 영적인 사람은 당연히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물질보다 영을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사람이냐 육적인 사람이냐의 기준은 돈과 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사도들과 우리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강해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짧은생각 긴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름부음 받은 이 에게는 예스만 있다. (0) | 2025.03.28 |
---|---|
하나님의 은혜는 양심이 증언한다. (0) | 2025.03.27 |
사도들조차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 (0) | 2025.03.25 |
제사장이 입어야하는 옷의 의미. (0) | 2025.03.24 |
빛이 없으면 스위치가 꺼진 상태다. (0) | 2025.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