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강연회 마지막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였으므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오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서를 작성할까 합니다.
한 가지는 부정적인 면이며 다른 한 가지는 긍정적인 면입니다.
부정적인 면은 이번강연회에서 전해주고자한 성경말씀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이며 긍정적인 면은 그럼에도 믿음이 생활을 바꾼다는 겁니다.
우선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구원과 영생을 둘로 본다는 점이지요.
지난 시간에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영생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고 영생인데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하늘 어느 곳에서 머물러 있다가 예수의 재림 때 다시 되살아나 예수가 영생의 하늘로 올라갈 때 함께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같은 말씀은 모순을 넘어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이는 육신을 넘어 존재하는 영의 세계를 오해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서 시공간에 매여져 있는 육적인 범주아래 놓여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오래전에는 하늘 저편에 머물러 있다가 예수의 재림 때 되살아난다고 하더니 요즘은 낙원에 머물러 있다가 온다는 말로 바뀌어 있을 뿐 여전히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무려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말하고 있으므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엉터리 교리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건만 신기하게도 구원받았다는 분들은 확신을 하고 있지요.
자신들이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을 하면서도 이러한 모순점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눈과 귀가 가려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모순점을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엉터리 교리를 타인들에게 강요한다는 겁니다.
강요를 넘어서서 자신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 때문이라 말하고 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구절을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Jesus saith unto him,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man cometh unto the Father, but by me.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9)
예수의 이 말씀은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육신 예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육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꼼짝없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보혜사를 보낸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야하며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겁니다.
즉, 빛이신 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며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14장 전체를 읽어보지 않고 이구절만 보면 예수만이 구원자라 받아들이게 되겠지만 전체를 읽어보면 빛이신 성령만이 영생을 얻게 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예수교 신자들은 내말을 믿지 않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내말을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모순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이런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마16:2)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마16:4)
자연현상을 보더라도 하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인데 성령이 드러난 인자를 몰라본다는 점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육적속성을 죽이고 성령으로 되살아나는 퍼포먼스를 하겠노라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을 고쳐주기 위해 몸소 십자가에 육신을 매달아 죽고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거지요.
정말 요나가 고래뱃속에서 삼일을 지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세상유희에 빠져 살다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요나서의 참된 뜻이라는 점을 알기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무지한 자들을 위해 자신역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삼일 만에 되살아나겠다는 말입니다.
즉, 십자가 부활이 육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남을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거지요.
이러한 점을 두고 오늘날의 일부 예수교 신자들은 예수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 말하고 있으며 예수의 피만이 구원이라 말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되게 만드는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피를 흘림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가 사해졌다면 어째서 죄가 이 세상에 만연한지 설명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세상 죄는 그렇다 치더라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큰소리를 치는 성도들 역시 여전히 죄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지요.
징계가 있다는 것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며 벌을 받는다는 뜻이므로 영원히 죄를 사했다는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으며 하나님 법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과의 법칙아래 놓인 세상의 법도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며 본인의 삶에서조차 적용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사해놓았다면 징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흘림이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것은 생명을 깨닫고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육신과는 별개의 내가 있음을 아는 것과 같아서 육신은 벌을 받지만 영혼은 이미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여기에서 말하는 발은 족적(足跡)을 가리키는 것으로 살아있는 동안 지어놓은 죄에 대해서는 씻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내가 말해봐야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이들은 믿지 않겠지만 사람이 죽는 과정을 보면 이 같은 내말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거듭나고 나면 그동안 지었던 죄가 한순간에 없어질 것 같지만 사는 동안 각가지 사건사고를 통해 돌려받게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내가 지은 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 순간 괴로워하는 것이며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아래 있는 이들은 일반인들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좀 더 편안하고 순조롭습니다.
사는 동안 회개하고 뉘우치며 매순간 갚아 나왔기 때문이지요.
긴말 필요 없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보면 압니다.
참고삼아 말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죽었고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육신은 벌을 받는 중이며 영혼은 영원의 세계와 이생을 오가며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말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으며 마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음시간에 긍정적인 면을 말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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