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을 알았으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배가번드 2025. 9. 24.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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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내재하심을 안다는 것은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은 돈을 모아둔 채 불에 타 죽은 거지와도 같습니다.

일평생 거지로 살면서 움막집 곳곳에 엄청난 돈을 모으고 살다가 어느 날 불이 나서 죽고 나자 거액이 발견된 적이 있지요.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한 채 모으기만 한다면 그 돈은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내 돈이라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다간 선각자들은 모두가 나름의 방법대로 자신이 득한 바를 세상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많든 적든 본인이 얻게 된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는 점을 알아서 아낌없이 주고자 했으며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오늘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은 선지자의 말씀은 우리에게 쏟아지는 하늘의 보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눈이 가려져 있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돌처럼 보일 것이고 꽹과리 소리로 들릴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이 예수께서 두 눈을 하나로 만들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 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며 하늘의 보화를 받기위해 바울을 쫒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What then? notwithstanding, every way, whether in pretence, or in truth, Christ is preached; and I therein do rejoice, yea, and will rejoice.

 

지금 이 말씀은 지난시간의 연장으로 말씀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본인이 성령과 하나 되었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otwithstanding) 가식적이거나 참되거나(whether in pretence, or in truth) 모든 방법으로(every way) 그리스도가 전파된다(Christ is preached) 했으며 그 행위 안에서(I therein do rejoice) 내가 기뻐할 것이라(will rejoice) 한 겁니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상관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자선을 베푸는 것과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 그자체로 성령이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은 온전히 성령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확실히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1:19)

For I know that this shall turn to my salvation through your prayer, and the supply of the Spirit of Jesus Christ,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According to my earnest expectation and my hope, that in nothing I shall be ashamed, but that with all boldness, as always, so now also Christ shall be magnified in my body, whether it be by life, or by death.

 

너희의 기도와(your prayer) 예수그리스도의(of Jesus Christ) 성령의(the supply of the Spirit) 공급을 통하여 나의 구원이(my salvation) 향할(전환될) 것이라는(shall turn to) 점을 내가 안다고(I know that this) 합니다.

간절한 기도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일직선상에 두고 있으며 바울의 가르침까지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말씀이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으로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0절에서 아무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in nothing I shall be ashamed) 항상 담대할(with all boldness) 것이라 했으며 살든지 죽든지(whether it be by life, or by death) 내 몸 안에(in my body) 그리스도가 확대되어 진다 한 겁니다.(Christ shall be magnified)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성령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빌1:22)But if I live in the flesh, this is the fruit of my labour: yet what I shall choose I wot not.

 

때문에 나에게 있어(For to me)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라고(to live is Christ) 했으며 죽는 것도 득이라고(to die is gain) 했습니다.(21절)

사는 동안도 그리스도(성령)와 함께하지만 죽게 되면 자연스럽게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라는 찬송가와 같은 말씀이지요.

하지만(But if) 내가 육신으로 살아가면(in the flesh)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라고(the fruit of my labour) 합니다.(22절)

육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성령을 깨닫는 것이 결과물이 될 것이지만 성령과 하나 되고 나면 영육간의 구분이 없어짐으로 바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I shall choose I wot not)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성령과 하나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영육의 합일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1:23)

For I am in a strait betwixt two, having a desire to depart, and to be with Christ; which is far better: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4)

Nevertheless to abide in the flesh is more needful for you.

 

자신을 둘 사이에 끼인 해협(海峽)에(a strait betwixt two) 비유하고 있습니다.(23절)

해협은 육지 사이에 낀 좁은 바다를 뜻하므로 바울이 육신과 영의 정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영육이 하나 되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원래는 그리스도(성령)와 함께 있는(to be with Christ) 것이 더 좋아서(far better)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having a desire to depart) 있지만 육신 안에 머무는 것이(to abide in the flesh)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다(more needful) 말한 것은 자신이 맡은바 임무에 따라 세상에 좀 더 머무르고 있을 뿐 영혼은 이미 영생의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직도 성령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 육신에 좀 더 머무는 선택을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령과 하나 되었다 해서 모두가 영생의 하늘로 올라가버리게 되면 성령의 불씨를 전해받을수가 없으므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거지요.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될 경우에는 스스로 서고 걸어야함으로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떠나야만 했던 것이며 아직 걸음마 수준에 머무는 이들에게는 바울과 같은 스승이 있어야함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방문하는 여러분모두가 스스로 비상(飛上)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시간을 기약(期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