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육신을 부정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라.

배가번드 2025. 9. 26.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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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장을 상고 하는 동안 놀랍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영육이 하나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물론 바울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영적인 일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형제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자신과 함께 걷도록 만들기 위해 무척 많은 고심의 시간을 가졌음을 알게 된 겁니다.

또한 믿음의 길에 나서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실낱같은 기회를 주기위해 고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요.

모든 사람 안에 성령이 내재하고 있음을 말해줌으로서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성직자들의 타락된 마음을 경계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나 같은 경우 내 인생 전체가 바울의 말씀과 동일하였으므로 그 감동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처음 내가 영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느 날 문득 영적 체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성령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일과 같은 경험을 했던 거지요.

물론 바울은 태어나서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영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장사하는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장사를 했으므로 걸어온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종내는 빛이신 성령을 영접했으므로 종착점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숱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나 역시 무척 오랜 시간을 씻김의 과정이 필요했으므로 인생길이 별다를 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사라는 것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가리킴으로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일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다보니 씻김의 과정이 오래 필요했으며 노동일을 통해 각인된 고정관념을 버리는 시간을 가졌던 겁니다.

그만큼 물질적 가치관을 영적인 가치관으로 바꾸는 것이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힘든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라는 생각이 올라왔으며 쉽게 돈을 벌수도 있는데 이렇게 힘들게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쪽에서 일어났던 것은 이렇게 힘든 순간이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뿌린 것을 내가 거두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경험했던 기적의 순간들이 떠올랐던 거지요.

성령이 내재하심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기적의 순간들은 내가 겪는 힘든 순간과 어려움조차 성령이 주신다는 점을 인식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중도에서 포기를 했을 것이며 예전에 장사할 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영적인 체험은 강렬한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역경을 이겨내면 험난한 가시밭길이 끝이 나고 꽃길이 펼쳐진다고 생각하겠지요.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풍요와 평화로움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틀린 겁니다.

성경은 육과 물질세상을 악에 비유하고 있으므로 역경을 이겨내고 주어지는 평화와 풍요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의 전환에 따른 마음의 만족이라 봐야 합니다.

이 같은 점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성경 내용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욥1:2)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

And the LORD turned the captivity of Job, when he prayed for his friends: also the LORD gave Job twice as much as he had before.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42:13)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42:14)

 

우스의 뜻은 ‘의논’이고 욥의 뜻은 ‘울부짖는 자, 회개하는 자, 사랑을 입은 자’등입니다.

이 같은 점을 볼 때 욥은 육신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에 들어 항상 울부짖으며 회개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며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온전하고 정직하였고 악에서 떠났다 했으므로 영적으로 완전에 이른 사람이지요.(1절)

그래서 2절에서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났다 했는데 이는 완전의 숫자 7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 3을 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하신 일을(7) 확실히 깨닫고 삼위일체(3) 하나님이 실현된 인물이라는 뜻이지요.

시간관계상 욥기의 많은 내용을 올릴 수는 없지만 요약하여 보면 사탄과 하나님이 의논하여 욥을 시험한 것이 욥기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낸 끝에 얻은 것이 42장 10절에 기록되고 있는데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욥의 속박을 돌이킨다(turned the captivity of Job) 했으며 욥이 전에 가진 것보다 갑절 되게 주신다 했습니다.

이 말씀인즉 욥이 육신의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무소유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온전히 성령의 입장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인연 있는 이들을(친구들) 위해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돌이키신다 한 겁니다.

욥이 육신에 머물러 있을 때는 소유물이 제한적이지만 성령과 하나가 되면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뜻에서 소유가 배가 된다 했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의 가르침으로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이 못됩니다.

13절을 보면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다 했는데 만약 액면대로 일 것 같으면 아들 열넷에 딸이 여섯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욥이 처음에 있었던 자식들과 뒤에 얻은 자식을 합하여보면 배가 되는 것이 맞는다고 하지만 억지주장에 불과한 겁니다.

왜냐하면 낙타와 양의 숫자를 보면 정확히 배로 기록되어있으므로 그러한 주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성경해석에서 비롯된 거지요.

그러므로 14절에 언급되고 있는 딸셋의 이름을 풀어보면 이 내용은 담긴 뜻이 따로 있는 것이 맞습니다.

여미마의 뜻은 평화의 상징 ‘비둘기’이고 긋시아의 뜻은 ‘계피’로서 상상속의 나무를 가리키므로 영적인 성과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게렌합북의 뜻은 ‘아름다운 뿔’로서 욥의 믿음이 아름다웠음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욥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시험을 극복하여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욥기 내용을 인용하기를 즐겨하며 신자들로 하여금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낼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이러한 시험에 들기를 원하는 이는 없으며 작은 유혹의 손길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을 원수 삼고 악으로 여기라 했지만 본인들의 삶은 전혀 영적이지 못하여 영적인 가르침조차 장사밑천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고파는 것은 물론 자식에게 대물림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다보니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은 시간을 달리하여 지옥과 천국을 경험했던 거지요.

자식들로 하여금 교회를 사유화하게 만든 죄로 지옥을 갔던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공로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그분이 갔던 곳은 낮은 천국으로 영생의 하늘이 아닙니다.

또한 한 몸이 갈라져 하나는 지옥을 가고 다른 하나는 천국을 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생전 육신과는 별개의 내가 따로 있음을 알고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거듭났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정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자기 십자가를 질 자신이 있는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