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나홀로 목사의 출범(出帆).

배가번드 2015. 11. 9. 16:29
728x90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가끔씩 나를 부를 때 0목사라고 한다.

오랜 시간 명상을 하던 내가 근래 들어 성경내용을 자주 입에 담다보니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입을 열면 명상에 관한 얘기만 하다가 요즘 들어 성경내용을 대화주제로 삼다보니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나만의 병이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병이기도 하다.

한곳에 몰입이 되기 쉬운 성격이다 보니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인데 평상시 어떠한 정보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 되다 여겨진다.

이러한 일들도 사람에 따라서는 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최근 들어 교회 다니는 횟수를 줄이고 성경을 보는 일도 줄였지만 가끔씩이라도 대화를 할라치면 성경내용을 들먹이게 된다.

나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분들이라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어쩌다 자리가 주어지면 어김없이 성경말씀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멀리해도 그 말씀의 중요성과 더불어 참된 진리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줄곧 영적인 일에만 몰두해온 내 삶에 있어서 성경이란 보물창고나 다름이 없다 여겨지며 우리들의 삶 전체가 기록되어있으며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타종교의 경전들도 다름이 없는데 인생살이의 환경과 배경이 달라도 기본적인 삶의 형태란 다를 수가 없으며 그러한 삶의 끝자락은 죽음이며 죽음너머의 영혼의 안식이란 신과의 합일을 통한 영생(永生)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성경을 볼 때마다 엄청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감동이 많은 이들을 만났을 때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다 같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라 누군가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일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야하는 엄청난 변화를 요구받게도 된다.

이 같은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끊임없이 일어날 일이기도 하다.

구약의 시대에 홀연히 나타난 젊은 청년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신약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앞으로 누군가의 또 다른 혁명(?)으로 인해 또 다른 성경이 만들어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무엇이라는 철학적인 해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통해 우리들은 변화의 과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만약 이 같은 말이 진실 되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굳세게 믿고 있던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나타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껏 전해져오던 구약의 내용들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수가 말을 해줌으로써 몇몇의 예수제자들은 성령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며 참된 영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변화를 원하지 않던 많은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유사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최종목적지는 영원한 안식에 있으며 참된 진리의 길이란 이세상의 부와 명예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안다.

자신들이 처해있는 지금의 환경과 위치가 그들을 변화의 소리에 호응하지 못하게 만들뿐 근본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없으며 그들이 진정 성령과 함께 한다면 영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한 가지 숙고해 볼일이 있다.

왜 구약시대 사람들과 예수가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일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했을까?

이것이 바로 인식의 차이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의 많은 성경학자들의 해석이 물질적이고 육신적인데 반해 예수의 해석은 보다 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인 수준이 어른과 아이의 차이와 같았고 그 당시 율법학자들의 인식상태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예수의 영적상태가 어떠했는지 드러나는 일이기도 한데 구약속의 모세와 많은 선지자들의 영적상태가 어떠했던가를 나타내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성경학자들이나 크리스천들의 행태도 별다를 바 없다고 보이며 구약시대의 율법학자들의 구태를 그대로 본받고 있으며 더욱 심한 경우도 있다.

원래 구약이란 모세오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은 모세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설명하듯이 이야기 형태로 말해 놓은 것이다.

창세기를 통해 우주의 생성과정을 말해놓았고 한인간이 신과의 합일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을 묘사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인간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행동규범을 말해 놓은 것이다.

이 같은 성경내용을 물질적이고 육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중동지역에 자리했던 에덴동산을 찾느라 땅속을 헤집어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진정 그들의 말대로 에덴동산이 중동지역에 있었다고 한다면 영생과도 땅속에 묻혀있다는 말인지라 지금부터 사력을 다해서 땅 밑을 파야한다.

수천 년이 걸려도 발견하지 못한 영생과가 땅 밑에 있다고 한다면 온 인류가 합심해서 파내야하겠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B. C 1500년경에 모세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세오경이 많은 내용이 보태져 오늘날의 구약이 완성되는 데는 110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러한 구약속의 내용들이 기자(記者)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을 비롯하여 솔로몬이나 많은 선지자들의 기록들이 그들의 인식상태를 보여주고 있고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여 인간사회에 영적인 선물을 주려 노력했다.

이와 같은 일은 신약의 시대에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예수가 죽고난후 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영적인 성과물인 기록들을 세상에 남겼고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신약의 많은 내용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바울은 그야말로 깨달음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얻은 영적성과물을 사람들과 공유하기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노력한 위대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찬양에 열을 올리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심기는 예수가 심었지만 영적인 결실은 그 시대 제자들이 거두었다고 볼 수 있으며 예수의 제자들이 심어놓은 수없이 많은 결실을 오늘날 우리들이 거두는 것이라 봐야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예수가 보낸다는 보혜사는 각 시대마다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주변에 늘 함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말이 틀리다고 한다면 성령을 담을 수 있는 이들은 특정한 누군가에 국한시켜야하고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피조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만다.

누군가 아직도 예수가 우리들을 구원하기위해 올 것이고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는 분명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그에게는 예수의 보혜사(성령)가 함께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특정한 누군가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이거나 나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임을 말하기 위함이며 진정한 영적해석을 하게 되면 모든 이들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함이다.

언젠가 나는 영적인 길을 산행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산의 꼭짓점은 하나이지만 그곳에 다다르는 길은 여러 갈래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아직도 자신의 길만이 유일하다 믿고 있다면 그것은 산중턱에 머물고 있음이며 과정에 있음을 알아야하고 조금 더 타인들의 말을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리란 사통팔달(四通八達)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길 만이 유일하다는 인식이란 꼭짓점에서 바라본 시각이 아니라 빼곡히 들어찬 산림 속에 갇혀있기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란 것을 알아야한다.

이 세상 어떠한 종교도 마찬가지이며 어떠한 논리의 길도 마찬가지이며 어떠한 여정의 끝자락도 신과의 완전한 합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각종교마다 신을 부르는 이름이 달라도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며 수학적 논리의 마지막에 자리한 무한대라는 숫자도 하나님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이 같은 내용은 절대 나 혼자만의 개인적인 생각이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이다.

앞으로 내가 인연 있는 분들과 나누게 될 내용이지만 과연 그 끝자락까지 갈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진정 많은 이들이 알기를 원하고 나또한 나 자신(自神)과의 약속을 중하게 여길 때 우리들은 함께 여정을 마칠 수 있을 것이며 산 정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성경을 알고 있다는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요한계시록이 멸망을 예언해 놓은 것이 절대 아니다.

성경의 많은 복음서들이 그렇듯이 요한계시록도 요한이 자신의 수준에서 환시의 세계를 본 것을 말해놓은 것인데 그조차도 각자의 수준대로 해석을 하다 보니 멸망을 예언했다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본문을 다루게 되면 다시 한 번 말하게 되겠지만 요한이 경험한 세계는 심판받는 하늘의 모습인 동시에 우리들이 갈수도 있는 하늘의 모습이기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만이 모든 이들이 가는 유일한 곳일 수는 없으며 바울이 가보았다는 세 번째 하늘도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가되는 영생의 하늘도 있다.

따라서 누군가 성경을 말할 때 각 구 절 마다의 유일함을 말하게 된다면 심한 모순점에 부딪히게 되며 아무리 노력해도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른 이들이 어디만큼 오는지 보이지만 아래에서 보게 되면 숲에 가려져있는지라 다른 길이나 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인한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지금의 세상이 급변하는 시대이며 지구촌이 지금껏 반복적으로 겪어왔던 일이 오늘날 도래하였으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멸망의 시기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고 성경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말했는데 내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분을 상대로 설득을 하거나 이해를 시키기 위해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대화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고 말았는데 내 가족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라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호주에서 돌아온 후 2년 반 이상을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들었으니 그들의 주장을 충분히 알았고 내가본 성경과 그들이 본 성경이 해석에 있어서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그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말하길 내가 목사가 되고자 한다 여기는데 어찌 보면 옳은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옳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사(牧師)라고 한다면 옳은 것이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목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원래 목사(pastors)라는 말은 성경에서 그 유래를 볼 수가 있는데 (에베소서4:11)에 나오는 목사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뜻은 양치기로서 신도들을 양떼로 보고 목사를 목동으로 보는 시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목사는 일반 회중을 양떼로 보고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지만 나는 모든 이들이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말하고자 하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사라는 말은 어울리지가 않으며 구태여 붙인다면 나 홀로 목사라 불리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나 홀로란 (lonely)가 아니라 (only)인데 진정한 하나님은 유일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우리들이 구세주가 필요한 피조물이기보다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운 존재임을 말하고자함이다.

또한 나 홀로 목사는 인간들과 동떨어져 홀로 외로운(lonely)하나님보다는 인간과 하나 되어 혼자 유일한(only)하나님으로서 우리인간들과 함께 지내고 계신 하나님을 말하고자 하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여러 표현들로서 갈라져 있어도 하나일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자한다.

홀로 거룩(holy)하시고 홀로 높으신 하나님을 위한 나 홀로(only) 목사이고 싶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세상의 완전(holo)함을 말하는 나 홀로(holo)목사이길 원한다.

나 홀로 목사와 함께하는 성경을 통한 진리탐구에 참여하는 것을 자축하며 많은 이들이 홀로(holo)되길 기원하노라.

'나홀로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홀로 목사(바벨론의 진실).   (0) 2016.02.20
마태복음3.  (0) 2016.02.16
마태복음2.  (0) 2016.02.14
마태복음1.  (0) 2015.12.03
창세기.  (0) 2015.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