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나 홀로(holo) 목사입니다.
며칠간 휴가를 다녀오느라 시작이 늦었습니다.
구차한 인사말은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며칠 동안의 휴가인사를 대신할 것 같군요.
오늘은 앞으로의 holy하고도 holo 한 나 홀로 목사의 여정에 대해 말할까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려면 구약부터 읽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구약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약의 세계를 열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구약의 내용이 현시대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예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 먼저겠지요.
신약을 살펴보면 성경 아랫단에 부연(敷衍)설명을 해놓은 난이 있는데 대부분 구약의 말씀을 신약시대에 예수님이나 그 제자들이 해석을 해놓은 내용들입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의 인식에 차이점을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앞으로 성경을 볼 때 신약을 위주로 살펴보며 그때그때 구약의 내용이 부연 설명 란에 나오면 그 내용을 토대로 구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방향설정이 절대적일 수는 없으며 천상의 메시지가 온다면 바로바로 방향은 바뀔 것이며 어느 날 순식간에 마침표가 찍힐 수도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과 내가 공동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
방향설정이 대충된 것 같으니 지난시간 잠시 언급했던 모세오경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요?
아무래도 신약으로 바로넘어가기에는 모세오경이 모세가 지은 이야기책이라고 말한데 대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발을 할 것 같거든요.
내가 말한 것은 모세가 지어내었다는 말이 아니라 모세라는 한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함께 먹고 마시는 영광을 누리며 산 것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성경말씀 한 구절을 볼까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에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3~4)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그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자 화가 난 가인이 동생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내용이 나오는데 액면그대로 보게 되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요.
이때까지 아담이 자식을 둘밖에 낳지 않았는데 아벨이 양치는 사람이고 가인이 농사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렇게 달랑 4명뿐인데 누구는 양만 치면서 살아가고 누구는 농사만 짓고 살아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음구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쫒아 내시 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14~15)
달랑4명만 살고 있는 그 시대에 만나는 자마다 가인을 죽일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이제는 이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에덴동산의 일이 아니라 모세가 사람들에게 뭔가의 메시지를 주기위해 말해놓았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요?
하지만 이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하나가 있습니다.
모세가 오경을 만들었다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난 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봤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을 드러냈다는 말이며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오경을 만들도록 허락하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 홀로 목사의 말을 듣는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실지 몰라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설명할 기회가 오리라 여겨지는바 여기에서 멈추고 모세가 완전한 상태의 깨달음을 얻었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하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모세는 영적스승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그것을 잠시 알아보기 위해 신약으로 넘어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많은 목사님들이 바로 이 구절을 아벨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받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인용하곤 하지요.
아벨이 바친 양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세상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을 하나님은 즐거이 받지만 가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지었던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진정 목사님들이 이렇게 적용하려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액면그대로 봐야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자신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성경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이러한 해석을 즐거이 성경강연에 사용하고 있다면 앞서 내가 말한 대로 에덴동산의 일들은 비유로서 가르침을 주기위한 것이 맞는 거지요.
절대 중동지역의 지하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며 선악과나 영생과의 일은 물론이며 에덴동산에 둘러놓은 불칼(a flaming sword)과 그룹(Cherubims)들도 비유로서 말해 놓은 것이 맞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지요.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모세의 시대보다 무려 1500년 후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요한이나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 모세의 가르침인 성경을 늘 읽고 있었기에 모세가 기록해놓은 가인과 아벨의 일을 떠올려서 어린양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아벨이 바친 양이 될 수 없음에도 왜 요한은 아벨이 바친 어린양을 예수라고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가인이 지은 땅의 소산물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이자 물질적인 것들을 이름이며 양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바로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노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것들을 받지 않으시며 오로지 하나님의 품에서 나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영광만 받으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인 일을 하는 성직자의 일을 말한다 해도 틀리지 않으며 우리자신을 길 잃은 어린양에 비유한다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헤매던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도 되는 거지요.
이것을 특정종교에 국한시킨다면 그조차도 하나님을 욕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 하신 것이지 특정한 종교는 하나님이 만들고 타종교는 다른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유일함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되고 마는 겁니다.
따라서 모세가 말해놓은 가인과 아벨의 일은 영적인 면과 물질(육신)적인 면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여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만들어놓은 기가 막히게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또 한 가지의 의문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을 죽이지 않을 뿐 아니라 표를 주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이 또한 모세가 가진 지혜의 크기를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액면 그대로를 믿어서 가인의 후예들에게 해를 가할까 방책을 해놓은 것이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말해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절대 심판자의 위치에 자리할 수 없으며 하나님만이 그 권능을 행사하실 수 있다는 거지요.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였다하더라도 우리들이 심판할 권한은 없으며 하나님이 그러한 일조차 허락하셨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때 비로소 심판의 자리에서 벗어남으로서 스스로가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해석이 되었지요?
아직도 궁금한 점이 남았다는 분이 몇 명 보이는군요.
불 칼(a flaming sword)과 그룹(Cherubims)에 대한 해석을 듣고 싶다고요?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에덴동산에 대해 말을 할 때 하려고 했었는데 오늘 언급이 되었기 때문에 맛보기로 말하겠습니다.
불 칼이라는 말은 영어 a flaming sword를 번역할 때 적당한 말을 골라서 말해 놓았던 것뿐이며 제대로 번역하려면 “진노하는 검”이라고 봐야하며 그룹이란 케루빔으로서 천사를 말하는 것이며 인식의 세계를 뜻하지요.
여기에서 또다시 우리들은 “진노하는 검”에 대해 숙고를 해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생과를 얻기 위해서 넘어야하는 시험과 같은 것인데 지금은 허락되지 않는 답이기도 합니다.
언제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자신 안에서 답을 얻으리라 확신합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오늘의 성경탐구시간을 정리 하도록 하지요.
홀리(holy) 홀리(holy) 한 나 홀로(holo) 목사가 말합니다.
아담(사람)이 가인(육적인면)과 아벨(영적인면)의 양면성을 가지고 살아나감에 있어서 영적인면에 치우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일지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일 것이며 영적인면을 버리고(아벨을 죽인일) 육적인면을 중시 여기게 된다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일들이 땅으로부터 생겨나지는(가인이 경작을 해도 땅이 소산물을 내지 않을 것) 않을 것입니다.
자칭 세상의 많은 목자들은 들으시오.
그대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번성하고 커지는 것(물질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면임을 알고 생명가진 모든 것(영적인면)들을 사랑하기바랍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 범위를 얼마나 넓히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인식정도에 달렸겠지만 무엇이 영적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가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살리는 것은 창조요.
죽이는 것은 파괴니 양날의 검은 하나님께 있고 모든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으나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인간에게 있음입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신 하나님이 그대들과 함께 함을 인식하며 홀로되길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나홀로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홀로 목사(바벨론의 진실). (0) | 2016.02.20 |
|---|---|
| 마태복음3. (0) | 2016.02.16 |
| 마태복음2. (0) | 2016.02.14 |
| 마태복음1. (0) | 2015.12.03 |
| 나홀로 목사의 출범(出帆). (0) | 201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