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나 홀로(holo) 목사의 두 번째 마당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들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오늘날 글자에 사로잡혀 성경에서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우수성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앙의 대상을 최고라고 말하며 타인들의 종교를 가볍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을 숱하게 보는데 그러한 일들이 사실은 하나님께 벌 받을 짓 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놓았지요.
이와 같은 일은 성경내용을 들먹일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러한 판단을 하고 그러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지도 않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겁니다.
이세상이 지옥 같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것이지 성경이 말한 대로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세상의 멸망을 바랄수가 있을까요?
이미 그러한 인식하에 살아가는 자체가 지옥 속에 머물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불쌍한 영혼일 따름입니다.
이쯤에서 지난시간의 향기는 잠시 잠재우고 새로운 기분으로 신약의 시간을 열어보도록 하지요.
많은 이들이 알듯이 신약의 첫째 장은 마태복음입니다.
이복음서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예수의 제자였던 세리(세금징수원) 마태오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유대인이 적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떠한 것도 참되다 할 것은 없고 그저 이야기로 전해질뿐입니다.
누가 적었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복음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만약 누군가 성경은 사실그대로를 기록해놓았다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문자에 사로잡혔다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오류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진정 우리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야하며 예수라는 인물에 중점을 두어서는 우상숭배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내말을 믿지 않는 많은 분들을 위해 오늘은 마태복음 1장을 분석해 보도록 하지요.
모두가 알다시피 마태복음1장은 예수의 족보를 적어놓았는데 예수가 성경에서 말한 메시아가 맞는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일부러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속의 다음구절을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시
89:3-4)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누가복음 3장을 보면 명확해 집니다.
예수의 족보를 보면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은 일치하지만 요셉의 아버지를 마태복음에서는
야곱으로 기록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헬리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후로 다윗에 이르기까지 족보가 일치점이 없으며 다윗위로 아담
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일치가 됩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내용을 성경을 불신하는 이유로 즐겨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그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등급을 말한 것이기도 하며 첫 관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왜 시험이냐고요?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일입니다.
앞서 예문으로 제시한 이 내용은 성경을 세밀하게 읽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수박겉핥기식으로 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라는 거지요.
어느 정도의 성경지식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하는 인식이 갖춰진 자라야 보게 되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가지요?
사실 이러한 생각은 나 홀로 목사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도한데 성경탐구의 시간을 갖기 전
아들과의 대화 형태로 썼던 글에서 이러한 장난을 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성경
편찬(編纂) 인들의 놀라운 지혜를 헤아릴 수 있었던 겁니다.
아들과의 대화형태의 글을 썼던 분명한 이유는 나와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 최 상승 법문에
대해 말하고자 했었는데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이들이 와글거리기에 살짝 방향을 틀어 놓았
지요.
그랬더니 잠잠해 지는 것은 물론 비난의 목소리까지 들리더군요.
내가 의도한대로 그들은 신의 축복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걸어갔지요.
그때껏 그들에게 퍼부어지던 신의 축복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겁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성경곳곳에 지뢰처럼 놓여 있는데 마치 에덴동산에 둘러쳐진 불칼과도 같
은거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보았더니 말도 되지 않는 내용도 있다고
여긴다면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생은 없는 것이 되겠지만 성경 안에는 분명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길이 있으며 하나님을 만났던 숱한 이들이 있음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시험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한구절이 시험의 마지막이 아니며 넘어야할 산은 너무나 많고 이것 또한
모두는 아닙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많은 분들이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나 홀로 목사의 또 다른 해석을 말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는 그들이 기록된 역사책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자가 인식의 세계에서 아카식 기록을 보고 적었다는 겁니다.
누군가의 살았던 흔적을 아카식기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식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깊은 기도(명상)속에서 볼 수 있는 환시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 당시 호적부가 있어서 기록된 내용을 보고 적은 것이라면 두 사람이 기록한 내용이
틀릴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아카식기록이 사람마다 다르게 기록될 수가 있는가 하겠지만 인식의 세계
는 경계가 없기에 사람마다의 아카식 기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이미 다른 기회를 통해 충분히 해놓았으니 자제를 하고 오늘은 예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하겠습니다.
아카식기록은 그렇다 치더라도 먼 훗날 성경을 만들 때 학자들이 잘못된 내용들을 고치거나
삭제하지 않고 기록해 놓았을까요?
분명 의도된 목적으로 기록해 놓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러한 구절에 대한 해석을 참으로 궁색하게 하더군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는 것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이라 그대로 적용을 하고 누
가복음에서 말한 헬리는 요셉의 장인이라는 겁니다.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장인의 족보를 말해놓은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참으로
궁색한 티가 너무 나지 않습니까?
만약 이렇게 말하게 된다면 사람들로부터 불신감만 심어주게 되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
님 자신도 성경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도 한순간에 해결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니 인간의 족보와는 무관하다.”
이한마디면 모두다 엎드려야하지요.
실지로 이러한 주장을 많은 목사님들이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만 이럴 경우 예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이란어디에도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고 우리들 인간은 비천한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성령과는 무관하게
태어났으니까요.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만 잘못 불러도 이단시여기며 원수처럼 대하는 거지요.
“예수천국 불신지옥”
너무나도 친근한 문구 아닙니까?
이런 분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하나가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라는 인물을 본적이 있습니까?”
질문을 하다 보니 한 가지 더 생각이 나는군요.
“혹 당신이 보았다고 한다면 그 예수를 내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누구도 본 일이 없는 예수를 어떻게 따라갈 수가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요?
어느 누군가가 보았다고 해도 내가 인정을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입니다.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어떠한 형상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성령이신{말씀(진동)과 빛}에
중요성을 알아야하는 겁니다.
말이 너무나 옆길로 샌 것 같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한 예문에는 또 하나의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구약에 기록되어있는 약속의 메시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서 말해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말해놓은 것이
기도 합니다.
다 같은 아담의 후손들임에 틀림이 없다는 말이며 사람(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이
지요.
신약시대의 예수제자들이 자신의 스승을 높이려고 다윗의 후손임을 증명하려 했기에 예수의
족보가 다윗에서 일치가 되는 것이며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족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구태여 족보를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요.
그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해버리면 간단하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공중에 나타나서 온 인류를 향해 한 말씀만 해도 모두 다 죽습니다.
한번 해보세요!
깜빡 넘어갑니다.
너무 심했나요?
지금 나 홀로 목사는 여러분이 믿는 예수를 비하(卑下)시키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처럼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며 여러분이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 예
수와 다름없는 하나님의 고귀한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오신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은 예수와는
별개의 인물로서 하나님은 인류역사상 독생자 하나만 보낸 인색한 구두쇠가 되지 않을까요?
이래서야 어찌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신다 하겠습니까?
각 시대마다는 물론 오늘날에도 숱하게 볼 수 있어야 마땅하지요?
어떤가요?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요?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좀 더 시간이 흐르면 성경 안에서 정리가 되는 기회가 올 것
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를 해야겠군요.
홀리(holy) 홀리(holy) 한 나 홀로(holo) 목사가 말합니다.
문자에 사로잡힌 이의 하나님은 문자에 갇혀있고
형상에 사로잡힌 이의 하나님은 형상에 갇혀있나니
편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어디에도 갇혀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이들에게 고하노니
자신의 인식에 갇힌 하나님을 하루빨리 자유롭게 하여 홀로(holo)되소서.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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