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16.

배가번드 2016. 4. 2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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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나 홀로 목사입니다.

마지막 포스팅한지 거의 1년이 다되어가는군요.

먹고사는 일이 먼저다보니 성경연구가 늦어졌습니다.

성경을 그저 읽는 것만 해도 어떤 이들에게는 쉽지가 않은데 한 구절씩 영어와 비교분석을 하고 깊은 뜻까지 헤아리려다보니 깊은 집중도가 필요 했습니다.

일과 병행을 해야 하는지라 집중을 하기가 힘이 들었지요.

우선적으로 주변일이 안정 되고나서 다시시작하려다보니 많이 늦어진 겁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야기는 차차하기로 하고 당장 본문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시간까지 우리는 마태복음9장까지 연구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10장의 내용을 보도록 하지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0:1)

And when he had called unto him his twelve disciples, he gave them power against unclean spirits, to cast them out, and to heal all manner of sickness and all manner of disease.

 

많은 분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힘을 느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힘을 제자들에게까지 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말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아주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크리스천 중에 누군가가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정신이 이상하거나 귀신에 들렸다고 생각할 경우 심각한 일이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삿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종교가 다른 이들을 귀신들린 자 취급을 하게 되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게 되는지라 여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나 홀로 목사가 보았을 때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에게 권능의 힘을 주었다기보다 설교를 하는 방식과 몇 가지의 치료방법을 전수해주신 것이며 타종교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거나 귀신들린 자 취급을 하라는 것은 아니라 여겨지는데 이 말을 뒷받침해줄만한 구절이 뒤이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은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10:5)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이방인의 길로나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 시지 않습니까?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망했는데 그 이후부터 이방인들이 모여 살게 된 곳이니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믿음이 굳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절대로 타종교인들에게까지 믿음을 전파하라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하며 새겨야할 구절입니다.

이제 다시 2절부터 볼까요?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10:2)

빌립과 바돌로메,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10:3)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10:4)

 

사도(apostle)라는 말은 예수님 생존당시 함께 했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시던 분들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분들 한분 한분의 특성과 업적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성 베드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지요.

열두 사도들 중에서도 최고의 지도자역할을 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열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교황이었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여기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의 성경에는 기록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외경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곧게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자신은 그럴 자격조차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달라고 자청했다고 하지요.

이러한 겸손을 오늘날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기독교에서 외경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러한 정보는 즐겨 인용한다는 겁니다.

인정을 하지 않으려면 모두다 인정을 하지 않던지 아니면 가톨릭처럼 외경에 기록된 사실도 인정을 하던지 해야 할 텐데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들만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을만한 짓은 아닌 듯합니다.

각설(却說)하고 다음을 보겠습니다.

성 바오로는 열두 사도의 일원은 아니지만 예수님 제자 중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분으로 유명하지요.

예문에서도 보다시피 열두 사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약성서27권중 13권을 서간문형식으로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교회 박해자로 유명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개종을 한 후 네로황제에 의해 목이 잘려 순교를 하기까지 숱한 업적을 남겼지요.

제배대오의 아들 성 야고보는 갈릴레아의 어부였으며 아주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요한과는 형제사이로서 둘 다 과격한 성격 탓에 천둥의 아들들로 불렸다고 하지요.

주후 44년에 헤롯대왕에 의하여 순교하였는데 사도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성 요한인데 성야고보와 형제로서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봐줄 것을 부탁받았으며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 등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대 박해 때 파티모스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에페소로 돌아가 서기 100년경에 90세의 나이로 돌아갔다고 하며 파티모스 섬에서 요한묵시록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나 홀로 목사는 이 정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생존당시에 요한이 함께 하였으니 서기 100년경에 90세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120세는 되어야 말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또 다른 요한이 분명하다고 봐야합니다.

또 한 분의 사도는 성 안드레아입니다.

성 베드로의 동생이자 세례자요한의 제자였기도 하지요.

북 그리스 에피루스에서 선교하다 X자 형의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는데 러시아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사도는 성 필립보(빌립)입니다.

예수님 생존당시에 식량보급임무를 맡아서 했고 소아시아 프리기아지방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지내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 후 유해가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되었다가 12사도 성당으로 모셔졌다고 합니다.

성 바돌로매는 나타니엘과 동일인물로 알려져 있는 사도로서 이디오피아 인디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였는데 산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참수를 당했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사복음서중에 첫 번째인 마태복음의 저자 성 마태오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두는 세리였는데 예수님을 따르라는 소명을 받고 팔레스티나에서 선교활동을 주로 했지요.

전승에 의하면 주로 이방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디오피아 페르시아 파르티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성야고보가 있는데 성경에는 두 명의 야고보가 있어 정확히 구별하는데 혼란이 있습니다.

한분은 예수님의 동생이고 다른 한분은 예수님의 사촌일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의 가톨릭에서는 동일인물로 보고 있지만 동방전례교회에서는 다른 인물로 보고 축일도 달리지내고 있지요.

순교한 년도가 서기62년으로 기록된 것도 있고 66년으로 기록된 것도 있는걸 보면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사도는 성토마스(도마)로 쌍둥이를 뜻하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부활한 예수를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않다가 직접 만나본 후에야 나의 하나님이라 했다고 전해져오지요.

위경인 토마스행전에 보면 인도에서 목수로 일하며 선교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성 시몬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고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사도로 정해지기 전에는 바리새파인으로 구성된 열혈당원의 일원으로서 유대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고 하지요.

또 한 분의 사도는 성 유다 (다대오)인데 이스가리옷(가롯) 유다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로 알려져 있으며 훗날 창과 도끼에 찔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가롯 유다가 있는데 훗날 유다는 예수를 은화 삼십 닢에 팔았다하여 빼버리고 성 마티아를 사도로 지정했다고 합니다.

이상이 십이사도라고 할 수 있는데 바오로까지 합하면 십삼 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이러한 숫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이분들뿐만이 아니라 훗날에는 더욱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으니까요.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따라 거룩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순교를 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분들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이분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이라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자신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그러할 수 있을지는 상황이 되어봐야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끌려가시고 나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것만 보더라도 상황이 급박해지면 지금가지고 있는 믿음은 저만치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저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말 십이사도들처럼 순교를 당하기 직전까지 갔을 때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여길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가 있지요.

이정도의 믿음을 가지려면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일인데 이래서 체험이 중요한 겁니다.

열두 사도들 대부분은 예수님이 생존해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들이며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이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지요.

그리고 죽음이후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토록 의연하게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삶보다 영적인 삶에 대한 가치를 더욱 크게 여겼다는 것이지요.

나 홀로 목사역시 이러한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더 깊은 찬사와 동조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앞으로 나 홀로 목사의 삶의 초점도 이러한 영적인 곳에 맞추고 경전해석을 목적으로 삼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하기를 옳다는 것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악하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옳은 것이라 여기는지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아직도 물질적인 그 무엇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까?

나 홀로 목사는 이미 20년 전에 물질세상을 버리고 영적인 길을 걸어가고자 망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습니다.

그 결과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 20년을 보냈지만 지금도 조금의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에게 남들은 볼 수 없는 성경속의 비밀을 조금씩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불교계통의 출가를 결심했었지만 그러한 길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면서도 영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음을 알고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 홀로 목사가 물질세상과 거리를 두고 산다고 해서 하나님은 남들보다 빈곤하게 살거나 궁핍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지금껏 늘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혹은 나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먹고도 간간히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허락하십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거래를 하듯이 합니다.

내가 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신은 반드시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주시리라 믿는 것인데 그 같은 일을 나무랄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알아야할 일은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자 하는 목적이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보다는 영적인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는 겁니다.

사도들의 순교정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옳은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자체로서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전연구는 그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과거 에세네파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이들이 경전연구와 기도를 하며 일생을 보냈다는 것은 오늘날의 수행자들이 새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누군가 이런 일에 동참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영광으로 알아야하는 것이며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많은 수행자들은 자신들이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해서 영생을 얻거나 해탈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내면의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사람의 생기는 하나님의 입김으로 만든 것이니 결국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품성인 성령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들이 하는 일거수일투족은 하나님이 깨알같이 아신바 되는 것이며 그 정도에 따라 어떤 이는 살아서 물질적인 풍요를 어떤 이는 열두 사도들과 같이 죽어서 영광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와 함께하신 많은 분들은 대부분이 수행자들이며 구도자들인데 그들 모두는 지금도 열심히 명상이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지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득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은 절대 밖에 있지 않으며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지요.

그런 까닭에 많은 이들이 자신내면의 신을 드러내기 위해 명상과 기도를 하지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누군가 인간의 노력은 필요 없는지 물어오는군요.

당연히 필요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신을 위한 길이라 여기는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이며 여기에 대한 결과는 신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경전을 필사(筆寫)하며 일생을 보내기도 하는 거지요.

수행을 시작하거나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먼저 알아야할 일은 먼저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러한 신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리 수행을 열심히 하고 고행을 심하게 하며 단식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신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 인정이 되고나면 그때부터 수행이 시작 되는 것이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신이 지켜본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인식하여 육신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신이 자신 안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수행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앞서 열거된 열두 사도 중에 중도에서 탈락이 된 이스가리옷 유다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배반자로 인식하고 지금껏 심하게 욕을 하는데 실상을 보자면 유다는 욕을 먹어야 마땅한 인물이기보다 악역을 맡은 성인으로 봐야 한다는 거지요.

왜 이 같은 인식이 필요한가하면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원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넘어야만 하는 시험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웬만큼 읽어본 사람들은 구약예언서의 곳곳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묘사해놓은 구절을 보았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기록해 놓은 구절이 있지요.

이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예언서에 나와 있는 일들을 자신이 구현함으로서 스스로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보인 것인데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고발해야만합니다.

잠시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3)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5)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53:10)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53:11)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

 

이렇게 이사야서에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유다가 예수를 고발해야만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누군가가 고발을 하지 않았더라면 십자가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었고 이사야서에 기록한 인물이 예수님을 가리킨 것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성경을 아시는 많은 분들은 이사야서가 언제 기록된 것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이사야서가 메시아의 출현을 기록해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기록된 내용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까지 모두 구현했다는 것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상에 나타내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는 예수님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을 고발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 홀로 목사의 말에 동조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어떤 이는 정신이 이상하다 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할 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악의 경계를 뛰어넘어야하고 심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합니다.

이세상의 그 어떠한 악인도 함부로 심판을 해서는 안 되며 그가 맡은 역할이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거지요.

이렇게 되어야만 만물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무소부재하고 편재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 같은 일은 절대 물질적인 세상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직업이 판사인 경우 심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 많은 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수없이 많은 심판을 하고 있으며 끝도 없는 분별 심을 나타내보이고 있지요.

내 종교에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타종교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릴 거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분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단군상의 목을 잘라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식들 때문이지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 많은 분들은 무조건 예수만 따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절대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3:22)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3:2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이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생각나는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들이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바란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이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러하기에 나 홀로 목사는 늘 말하기를 성경에 담겨진 뜻을 헤아려야지 액면그대로를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 명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으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잠시 불교용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면 천백억 화신을 나툰다고 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뜻은 만물동일체의 경지를 얻는다는 말인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만물에 들어있다는 말과 동일하지요.

불교에서는 무상정등정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같은 용어는 아뇩다라 삼막삼보리와 동일한 말로서 산스크리트어인 아뇩다라 삼막삼보리가 한문으로 표기되면 무상정등정각이 되는 것인데 위없는 깨달음을 뜻하는 겁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이를 부처를 이루었다고 말하며 크리스천들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나 멜기세덱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편재하고 무소부재하신 만물을 움직이고 생동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러한 힘이 어떠한 형상을 입게 될 때 성자이신 예수님이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불교의 경우 무상정등정각이 형상으로 나타날 때 부처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처의 대표격인분이 석가모니이며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처가 이 세상에 있어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가요?

이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예수님 한분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이며 그러한 방법은 불 칼과 그룹을 넘어서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룹이란 케루빔을 말하는데 지천사로 알려져 있지요.

사실 에덴동산의 일도 하나의 비유로 볼 수가 있는데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시험을 거쳐야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들이 열두 사도들의 순교정신에서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자신에게는 우주가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뭣 하러 순교를 하는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을 하고 넘어가면 서로가 편하고 좋을 텐데 할 거라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일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배치된 케루빔과 불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자그마한 어려움에도 좌절을 해버리고 만다면 물질세상에서조차 성공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감히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겠냐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순교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어 들어 올림을 받을 수 있었고 이세상사람들이 성인으로 떠받들어 모시는 겁니다.

하지만 요즘은 열두 사도가 활동할 때와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구태여 순교를 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세상 누구도 심판하지 않음으로서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예수님처럼 영생을 얻은 사람을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또한 누가 영생을 얻은 사람인지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 안에 내재한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방법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최선을 다해 행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위탁하면 되는 겁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마음에 만족을 못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나 홀로 목사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성령의 역사하심보다 더 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직도 만족 못하시는 분들은 성경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알게 될 수도 있을 거라 여기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영생은 얻고자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성령이 드러나야 함이니

 

성령이 스스로 깨어날 수 있도록

마음 밭을 일구라.

 

만물 안에 성령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누구를 향해서도 심판을 삼가하고

 

심판의 칼날을 자신에게로 돌리라.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성령이 담겨있으니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진심으로 돕는다면

 

그 또한 성령을 위함일지니

영생에 한걸음 다가 갈수 있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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