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하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었나 봅니다.
만물을 생동케 하려면 해가 있어야 하고 비도 있어야하지요.
메마른 대지에 비가 내리면 토양이 비옥해지고 촉촉이 젖은 대지에 새싹이 움틀 때 태양은 식물을 성장시킵니다.
삼라만상의 창조의역사가 이러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듯이 성령의 임하심도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는 법입니다.
메마른 마음에 하나님말씀이 비처럼 내릴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인 토양은 비옥해져 성령의 씨앗이 움트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빛이 되어 내리면 성령이 자라나기 시작하지요.
말씀이 비처럼 내리고 은혜와 축복이 햇볕처럼 내리쬐기를 반복하는 동안 성령은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게 되며 많은 이들에게 말씀이라는 과일을 선물하게 됩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이 하루빨리 열매를 맺게 되길 기원하며 누가복음의 마지막장을 열겠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눅11:33)
No man, when he hath lighted a candle, putteth it in a secret place, neither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that they which come in may see the light.
이 말씀은 지난시간의 연장으로서 깨달은 사람의 의무를 말하는 겁니다.
성령을 깨달은 요나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초막아래 숨어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성령이 드러난 사람을 등불에 비유한 거지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세상에 임할 때 빛으로 나타내시는지라 등불에 비유한 것이며 등불(빛, 성령)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이는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를 나타내는 말이며 안은 하나님왕국(영생의 하늘)을 뜻합니다.
영의 일을 모르는 일반인들조차 등불을 비밀스럽게 감추어두거나(it in a secret place) 말(됫박)아래 두지 않거늘(neither under a bushel) 어찌 하나님이 주신 책무를 저버릴 수 있느냐는 질타의 말씀이지요.
그러면 빛의 몸인 성령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볼 수 있을는지 예수님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The light of the body is the eye: therefore when thine eye is single, thy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but when thine eye is evil, thy body also is full of darkness.
역시 예수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약간의 수정과 보안작업이 필요합니다.
번역상의 문제가 있으므로 수정할 부분만 추려서 분석해보겠습니다.
먼저 “네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에 해당하는 영어는 네눈이 하나일 때 온몸이 밝을 것이요(when thine eye is single, thy whole body also is full of light) 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내용은 하나의 수행법으로서 두 눈을 하나로 모으는 명상(기도)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제3의 눈으로도 불리는 영안을 여는 일을 다른 말로 지혜안을 연다고도 하는데 이마 정 중간에 위치한 에너지 중심(차크라)을 상단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두 눈을 모은다고 해서 사팔뜨기처럼 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이마 정 중간으로 모은다는 거지요.
이러한 명상법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닌지라 깊이 있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간략히 설명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대체적으로 눈을 감고하게 되는데 이때 눈으로 이마 쪽을 본다 생각하지 말고 의식(생각)을 자연스럽게 이마한가운데로 모읍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지만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될 때가옵니다.
하루 5분씩 하다가 점차 시간을 늘려가게 되면 언젠가는 빛이신 성령을 맞이하게 되는 엄청난 영광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비 채식인의 경우 하루 30분을 넘기면 안 됨)
다만 조심할 것은 시작해보고 구토가 나거나 열이 오르는 등의 이상증상이 일어나면 더 이상 진행해서는 안 되며 그래도 꼭 해보고 싶다면 식단을 채식으로 바꾸고 명상이나 요가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곳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눈이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는 부분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when thine eye is evil, thy body also is full of darkness)
evil이라는 단어가 단순하게 나쁘다는 의미로 쓰일 것 같았으면 차라리 bad라는 단어를 썼을 겁니다.
그리고 눈이 나쁘다고 몸이 검을 수는 없지요.
이는 제3의 눈(영안, 지혜안)이 막힌 것을 암시하는 말로서 업장으로 인해 성령이 드러나지 못함을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악하다는 뜻의 evil을 쓴 것이고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성령이 드러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연이 있는 분들만 알아들으시길 바라며 더 이상 여기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도저도 싫고 그저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들은 차라리 주기도문을 외우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5)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11:36)
If thy whole body therefore be full of light, having no part dark, the whole shall be full of light, as when the bright shining of a candle doth give thee light.
지금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자신들안에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주의하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은 빛을 보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빛으로 된 하나님의 몸이기에 빛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영접하는)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빛을 보는 방법에 대한 말씀드렸으니 예수님의 다음가르침을 보시죠.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눅11:37)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11:38)
바리새인은 성경상의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대제사장들 중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스라엘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말씀과 율법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거지도 바르게 하려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남들의 잘못된 행동도 그저 보아 넘기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런지라 예수님의 잘못된 행동역시 지적했던 것인데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11:39)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11:40)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1)
But rather give alms of such things as ye have; and, behold, all things are clean unto you.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겉모습만 중요시하고 자신의 내면은 못보고있다는 것을 지적한 겁니다.(39절)
바리새인들은 성경말씀과 율법을 중요시 여김으로 여호와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영혼을 만들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다는 거지요.(40절)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네 안에 있는 것으로(as ye have) 모든 것을 구제하라 하셨고(give alms of such things)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하셨습니다.(41절)
이 말씀인즉 성령을 깨닫고 나면 육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몸은 영혼의 도구로서의 역할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육과 영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되면 사는 동안 육신을 입고 역할에 충실할 뿐 돌아갈 때는 육은 썩어서 땅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과 하나 된 성령은 하나님왕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거지요.
살아서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깨닫기만 하면 육신으로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를 묻게 될 것인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께서 해놓았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11:42)
But woe unto you, Pharisees! for ye tithe mint and rue and all mannerof herbs, and pass over judgment and the love of God: these ought ye to have done, and not to leave the other undone.
이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과거 이스라엘의 풍습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약초에 대해 십일조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for ye tithe mint and rue and all manner of herbs)
바리새인들이 풀포기에 불과한 약초에도 십일조 바치는 것을 중요시 여기면서 정작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은 간과하고 있었다는 거지요.(pass over judgment and the love of God)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일조 하는 일을 그만두거나 영을 중요시여기는 일을 그만두거나 해서는 화를 초래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woe unto you, Pharisees)
왜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되었나하면 아직 자신내면에 성령이 임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역할 론을 앞세워 행동하게 되면 심판의 하늘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율법도 철저히 지켜가면서 영생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 말씀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바리새인(구도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내세우는바람에 교만과 자만에 빠져 영생의 하늘을 볼 수 없음을 걱정해서 해주신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신겁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눅11:43)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11:44)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are as graves which appear not, and the men that walk over them are not aware of them.
회당과 시장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바리새인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하다는 인사말 듣기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명예와 권력을 좋아한다는 말이지요.(43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질 거라 말씀하셨습니다.(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무덤이 평평하여 사람들이 밟아도 무덤인줄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죽게 되면 땅으로 돌아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화가 미치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겁니다.
자신이 율법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존경을 받고 우쭐해하는 행위가 하나님보시기에는 위선자로 보인다는 말인지라 율법학자가 발끈하고 나섰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눅11:45)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또 너희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그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서기관 같은 성경을 베껴 쓰는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성경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들을 일러 율법사라고 하는 모양으로 이들 또한 상당한 성경지식을 토대로 사람들 위에 군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성경지식은 해박하나 성령을 깨닫지는 못했음으로 예수님은 서기관과 마찬가지로 취급했던 겁니다.
이들이 성경해석을 하여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야하고 저렇게 살면 안 되고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하는 등의 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친 일을 사람들에게 어려운 짐을 지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율법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는 해도 그들에게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한손가락도 짐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지요.
율법사가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전달해준다고 해도 성령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말씀을 볼 때 율법사는 밥이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에 불과할 뿐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왜 이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눅11:47)
Woe unto you! for ye build the sepulchres of the prophets, and your fathers killed them.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눅11:48)
Truly ye bear witness that ye allow the deeds of your fathers: for they indeed killed them, and ye build their sepulchres.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다는 말은 과거에 성령을 깨달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왜곡함으로 인해 가르침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사장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였다는 말은 율법학자들이 육신에 속해져있다는 말로서 윤회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억압하며 거부한 업장이 유전자로 전해져 대물림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은 영적인 가르침이 잘못 전해져 내려온 것을 의미합니다.(47절)
48절은 조금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할 것 같군요.
너희아비의 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해 너희가 증인이 됨을 받아들인다 했으며(Truly ye bear witness that ye allow the deeds of your fathers) 너희아비는 그들을 죽이고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든다고 했습니다.(for they indeed killed them, and ye build their sepulchres)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율법사들이 배우기를 잘못 배웠기 때문에(영적인 아버지로부터) 똑같이 잘못된길로 간다는 말이며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인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사로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내용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눅11:49)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눅11:50)
That the blood of all the prophets, which was sh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may be required of this generation;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눅11:51)
From the blood of Abel unto the blood of Zacharias which perished between the altar and the temple: verily I say unto you, It shall be required of this generation.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낼 때 그들 중 더러는 죽임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49절)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거지요.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피를 이세대가 담당한다는 말은 유전자로 대물림을 한다는 뜻이며 예수님당시의 세대가 조상들의 잘못을 책임지게 될 거라는 겁니다.(50절)
그런데 51절은 아주 면밀하게 들여다봐야할 것 같습니다.
아벨의 피가 등장하고 스가랴의 피까지 등장했으니 뭔가 특별한 뜻이 담겨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잠시 구약을 살펴본 후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4:2)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4:4)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5)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6)
시간관계상 길게 살펴볼 수는 없으니 약식으로 분석해보겠습니다.
아담의 뜻은 “사람”이며 하와는 “생명, 삶”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었지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숨결인 생명이 담겨져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 사람 안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가지 품성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뜻은 “소유, 획득, 대장장이”이며 아벨의 뜻은 “숨, 증기, 목장”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생명력(하와)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아담)의 안에는 소유하고자 하는 품성(가인)과 하나님의 숨결을 가르치려는(따르는) 마음(아벨)이 동시에 존재합니다.(1~2절)
이러한 상태로 성장하여 세월이 지난 후 수확을 하게 되면(죽음에 이르게 되면) 물질을 추구하는 삶(땅의 소산)을 산 사람(가인)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3절) 하나님의 숨결을 깨닫고(기름부음을 받고) 어린양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나온 사람(아벨)도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3~4절)
이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적인(아벨)것만 본다고 했습니다.(5절)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력을 발휘하여 무엇인가 물질적인 것들을 소유하고 획득하며 만드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이 태초에 인간에게 불어넣어준 숨결(성령)과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거지요.
특히 길 잃은 어린양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가장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영적이지 못하고 물질적이고 육적인 삶에 사로잡힌 사람(가인)은 자신 안에 영을 따르려는 마음(아벨)을 억제하여 살아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겁니다.(6절)
그리고 사가랴가 제단과 성전사이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사가랴가 성령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가 하면 제단과 성전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단은 성전의 밖에 자리하고 있고 제사장이 양을 잡아 성전 안으로 들어가 기름을 불살라 번제를 드리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것은 실지로 양을 잡아 드린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구태여 제단과 성전사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과 완전하게 하나 되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사가랴의 뜻이 “야훼께서 기억하고 계시다” 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전 안에 들어서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너를 기억하고 언젠가는 성령을 깨닫게 만들 거라는 겁니다.
시간이 있다면 스가랴서도 보았으면 좋겠지만 지면관계상 다음기회로 미루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스가랴 선지자기 흘린 피에 대한 책임까지도 져야한다는 예수님말씀을 우리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이 모든 선지자들의 죽음과 사가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면 유전되어오는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물려받은 독생자로서 성령을 나누어줄 권한이 있는 메신저라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11:52)
Woe unto you, lawyers! for ye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e entered not in yourselves, and them that were entering in ye hindered.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열쇠를 가져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원래 성령을 담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깨닫지(드러내지, 되살리지)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이며(ye entered not in yourselves) 또한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는 거지요.(that were entering in ye hindered)
예수님말씀이 바로 핵심이자 키인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많은 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눅11:53)
And as he said these things unto them,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began to urge him vehemently, and to provoke him to speak of many things: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눅11:54)
Laying wait for him, and seeking to catch something out of his mouth, that they might accuse him.
53절에 거기서 나오실 때는 그들에게 이러한 말들을 하셨을 때로 고쳐야합니다.(he said these things unto them)
예수님께서 자신이 해주는 복음말씀이 키인데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희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추종하는 이들이 못 깨닫는 것까지 책임져야한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화가났던 겁니다.
격렬하게 몰아대며 많은 말로서 자극했지요.(began to urge him vehemently, and to provoke him to speak of many things)(53절)
그리고 예수님 말씀 중에 비난할만한 일들이 나오지나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54절)
그만큼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11장을 모두 마친 것 같은데 아주 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 두 편을 넘지 않는데 11장은 세편에 걸쳐 다루게 되었지요.
무척 중요한 내용이 담긴 탓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긴 합니다만 나 홀로목사 개인의 생각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시간관계상 구약을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고 아쉽다는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영적인 것들보다 물질적인 것들에 더욱 관심이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시대에도 많이 가진 이들일수록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려는 누가의 배려였다는 것을 여러분모두가 인식하시길 바라며 누가복음 11장의 막을 여기서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