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118)

배가번드 2022. 3. 1.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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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말이야.

우리들이 신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일로서 결말을 만들어 가기로 하자꾸나.

앞서 내가 우리들이 신 일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우리 모두가 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를 만들어 보자는 거지.

지난 시간에도 잠깐의 언급이 있었지만 신이라는 가정을 내리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아.

그래서 내가 우리들이 신이라는 인식을 하던 그렇지 않던 모두가 신 일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부여하고자 노력했고 결국 모든 이들이 신 일수밖에 없는데 어떤 신이고자 하는 데까지의 결론을 만들어 내게 되었어.

기억이 나지?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모든 이들이 각자가 되고자 하는 신의 모습을 실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데 초점이 맞춰지게 되어있거든.

그렇지?

혹 어떤 이가 육소 간을 한다고 해서 신이 아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거지.

그렇다고 볼 때 누군가는 이렇게도 항의를 하리라 여겨져.

 

어떻게 그런 사람이 신일수가 있지요?

다른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하는데 말입니다.

창조력을 가진 신이라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지난 시간 말을 했지?

우리들이 남의 생명체를 먹기를 원하기에 누군가는 그러한 역할을 해주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결국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라는 말이거든.

그렇지?

 

그렇게 보니 그러네요.

하지만 먹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신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것 아닌가요?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신이라면 남의 생명을 뺏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신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렇지.

아마도 많은 채식주의 자나 철저한 계행으로 무장된 수행자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리라 여겨져.

그렇지만 그럴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곤란해.

왜냐 하는 것을 지난 시간 말해 주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한 번 더 말해주라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주 명백하고 똑똑하게 듣기바래.

수행을 하는 사람이 남의 생명을 뺏는 행위를 하는 자들을 신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되고자 하는 신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사실화 하기위해 선택한 자신들의 생각의 실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신이라면 이래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다만 자신이 되고자 하는 신을 스스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거야.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런 신이 되고 싶어 라는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스스로의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이 말이거든.

 

그렇다면 구태여 힘들게 억제되고 제한된 삶을 살 필요가 뭐 있나요?

막행막식을 하고 살아도 신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지옥도 갈 필요도 없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닐 텐데 말 이예요.

 

아들아!

어떻게 너는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지?

내가 말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왜곡되게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앞서 말한 것을 너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어.

먼저 말해주지 않았는가 말이야.

우리들은 지금 스스로의 영체에 색을 입히는 중이라고…….

너는 지금 네가 되고자 하는 신을 선택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니?

다른 사람이 까만 신이 되고자 할 때 너는 하얀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너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거냐?

너는 다른 이들의 까만색이 부러운 거냐?

아니면 너는 까만색이 되고자 처음부터 선택을 한거냐?

그들이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너와 무슨 상관이지?

너는 네가 선택한 지금 너의 길이 즐겁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런 거야?

우리들 모두가 신이라는 사실을 내가 말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뜻하는바가 모든 이들이 쌍둥이처럼 똑같은 신이라는 말이 아니었음을 너는 아직도 모르겠니?

 

어떻게 신이 여럿 일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이기에 하나님인데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럿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럿님이라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이구나.

이제 여럿님이라 부르자는 말이지?

그것도 괜찮겠는걸.

그러나 아들아!

우리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 모두가 동등한 출발점을 가진 존재들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들이 신 일수 밖에 없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을 알아야해.

너도 생각을 해보렴.

온 우주가 하나님의 품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이지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고 저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일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기 위해서라도 내말이 맞아야 하거든.

그렇지?

이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분이 맞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 품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인 동시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나누어 받은 동등한 신이 되는 거지.

그래서 모든 것은 역할을 분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거든.

지난 시간에도 말을 했지?

우리들은 하나의 시계에 속한 부속품들이라고…….

누구는 태엽의 역할을 누구는 겉포장의 역할을 또 다른 누구는 앞면의 유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이야.

이것을 누가 무엇을 하던지 나의 행동에 지장을 주거나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인거지.

누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욕을 하거나 나무라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해야만 하고 갖추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어?

괜스레 남의 행동에 딴죽을 걸거나 비난을 하지 말고 말이야.

아들아!

말을 하고 보니 이 말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구나.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다가온 지금의 상황이 과거에 지나온 나의 흔적들이 앞에 놓인 것이기 때문인데 너는 이것을 인식하려나 모르겠구나.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고?

그렇기도 하겠지.

갑자기 뜬금없이 말을 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겪어야 하는 일들이 과거 전생에 내가 해놓은 일들일 수 있다는데 주목을 할 필요가 있어.

지금 내가 누군가의 말에 딴죽을 걸고 남의 일을 방해를 한다면 다음 생에 그것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는 거지.

내가 물질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물질을 우습게 여긴 과거의 내생각의 영향이라고 한다면 좀 더 확실한 설명이 될 거야.

이와 같이 누군가의 일을 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기우려서 그를 돕는 것은 사실 스스로를 위한일이 될 수도 있어.

스승을 모시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은 물론이거든.

스승님의 법문을 보면 깨달은 부처를 공양하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를 하시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러한데 있는 거야.

사실 깨달은 부처가 공양을 받거나 보시를 원할 필요가 없는데 불구하고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해서 말씀 하신거지.

신이 되신 이가 새삼 사람들의 존경을 유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불구하고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 엄청난 축복을 가져온다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거다 이 말이거든.

지금은 네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다음 생에 네가 스승의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 너 또한 공양을 받게 될 거라는 간접적인 말씀인거야.

사람들은 모두 신이라는 말을 듣고 다들 좋아라하며 깨달은 스승과 우리가 모두 동일함을 주장하기를 즐겨 하겠지만 사실을 바라보자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해.

내가 스승과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내행동이 스승의 역할을 하기에 적당한지를 살펴야하고 그만한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는지를 살펴야 하거든.

지난시간 내내 우리들은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을 하신분이 오늘은 왜 엉뚱한 말씀을 하시나요? 라는 물음은 더 이상 하지말기바래.

먼저 시간에도 분명하게 말을 해주었어.

우리들이 동일한 신이라는 말을 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우리들의 본성이라고 말이야.

지금 내가 말을 하는 것은 각자의 역할 속에서 스승이라는 직업을 예로 든거지.

다시 말해서 근본은 같지만 지금의 현실 속에서의 역할을 달리하고 있다는 거야.

지금의 역할에서는 스승과 나는 분리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갈은 사실을 동일시하려고 시도한다면 자신이 스승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 역할을 자신이 소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이지 않겠어?

절대 여기에는 해서는 안 되는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할 사실이 있다고 지난 시간 말을 했지 않니?

지금의 스승과 단체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말이야.

그렇지?

거기에다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알아야하는 사실이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지금의 내가 스승을 위해 헌신하고 공경하는 행위들이 나중에 내가 되돌려 받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들아!

너는 듣고 있니?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자비 행을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라 할 수 있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스승을 신으로 알고 섬기며 헌신해야 하는 이유인거야.

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진솔하게 이생을 살아가면서 신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들은 스승을 모시며 수행을 하는 것이며 철저한 계행으로 자신의 신구의를 깨끗이 하는 거지.

이러한 것들 모두는 스승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니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거라 할 수 있어.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스승이 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지금의 스승을 배신하는 행위를 쉽사리 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이 앞으로 돌아올 부메랑일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 스승을 따라야 하고 한 가지 법문을 하면 절대 다른 법문이나 종교를 선택해서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야.

언제나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늘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있고 길을 항상 개방되어있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지만 그 같은 선택의 자유를 자신에게 유익하게 행사하라는 말이거든.

지금 믿고 있는 종교나 스승을 떠나 다른 길을 선택할 경우 그들을 비방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옮겨가라는 거지.

실상을 보면 타종교나 단체라 해도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 같은 교리를 따르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은 달라질 수가 없어.

이 같은 종교나 단체들이 우리들의 기호에 맞게 표현된 신께 이르는 다양한 방법이라 말했던바와 같이 어떠한 길에도 내가 말한 방식은 달라지지 않아.

 

아니!

 종교와 교리가 분명하게 다른데 무조건 동일하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요?

근본적으로 신께 이른다는 목표점은 같지만 길은 다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길이 신께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위한 방편이었을 뿐 진정한 의미는 모두가 한길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지금부터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할 테니 잘 듣기 바라.

우선 불교의 경우 부처를 모시는 행위를 함으로서 우리들이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는데 이 같은 일을 삼보(三寶)에 귀의 한다는 표현을 하거든.

삼보를 나누어보면 불(),(),(), 인데 불은 부처를 이름이요 법은 경전, 즉 불경을 말하며 승은 이 같은 경전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스님을 말하니 우리들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거야.

이세가지에 내 몸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귀의(歸依)한다는 표현을 하는 거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의 나무는 바로 귀의한다는 의미이고 아미타불은 부처(무량광)을 말하는 거야.

거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귀의 한다는 것을 뜻하는 거지.

결국 이것은 우리들 안에 내재한 불성(佛性)에 귀의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거든.

사람들이 불상을 보고 절을 하며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원하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보자면 수없이 많은 법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들 안에 내재한 불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며 그 외 모든 것들은 본성을 깨우기 위해 존재하는 방편에 불과한거야.

이것이 진정 우리들이 불교에서 얻어야하는 골수인 것은 물론이지 않겠어?

다른 수많은 불교관련 경전들과 법문들은 이한가지를 얻기 위한 예비동작에 불과해.

이와 같이 기독교의 성경 안에도 마찬가지의 길이 들어있어.

우리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불교에서의 삼보에 해당하거든.

우선 성부(聖父)를 보게 되면 하나님을 말하는데 불교의 불성(佛性)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부처로도 볼 수 있어.

다음으로 성신(聖神)으로 불교의 법에 해당하며 성자(聖子)는 예수님을 일컫는데 불교의 승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성신의 경우 성령(聖靈)으로 해석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법문일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령의 은사가 모든 이들에게 내리기 때문이야.

너도 들어보았지?

사람들마다 기도 속에서 성령의 은총을 받았다고 말하고 일이 잘되어도 성령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말하는 것 말이야.

바로 이래서 성령은 누구에게나 전해질 수 있는 법문이 되는 거지.

사실 이세가지는 하나로 통일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해.

불교의 불, , , 이나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신, 은 같은 의미이면서 각 세 가지가 하나로 통일을 시켜서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

너도 생각을 해보렴.

부처가 없는 법문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부처와 법문이 없는 스님이 어떻게 존재하겠냐는 거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없는 성령의 은총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있을 수 있었겠냐 이거지.

이래서 이세가지는 하나로 통일이 되어도 무방한 것이 되는 거야.

이것은 얼마나 크게 범위를 넓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는데 마치 우리들이 얼마나 큰 신을 알고자 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있어.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신을 크게도 작게도 만든다는 거야.

이모든 것들을 지난 시간 충분히 설명했으니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겠어.

불교에서는 이 같은 일을 깨닫는데 비유를 하고 있는데 위없는 큰 깨달음이란 말이 이래서 존재하는 거지.

불교는 그렇다 치고 기독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말기바래.

흔히들 목사님들이 기도를 할 때 자신이 성령의 은총으로 말을 한다고 하거나 성령이 함께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을 하거든.

이것이 바로 불교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이유인거야.

이 같은 점은 천주교의 기도를 보면 아주 잘 나타나고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하는데 이것을 성삼위일체라고 해.

이것만 보아도 내말이 맞는다는 것이 증명이 되지?

이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하나님이다 " 하고 말씀하신거야.

예수님의 그 말씀처럼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는 중에 성령의 강림하심을 강하게 느끼다가 점점 정도를 더하게 되어 자신안의 성령의 임하심을 느끼고 밖으로 표현하게 되면 스스로 재림 예수라 말하는 것이고…….

가끔씩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큰소리치기도 하는데 이것을 절대 나쁘다고 말해서는 곤란해.

왜냐고?

그들이 말하는바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그들이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정말 그들이 잘못 되어서라기보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이 잘못된 것으로 내 눈에 비춰지기 때문이거든.

다시 말해서 그들과 나의 인연 고리가 형성되지 못해서 함께 연극이 필요하지 않을 뿐 진정으로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란 거지.

왜냐 하면 그들이 스스로 재림예수라 하기도하고 하나님이라 말을 하는데 불구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그렇게나 많은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라 할 수 있어.

내가 그들을 미친놈이나 정신이상자로 볼지라도 그것은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들 문제일수는 없거든.

이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들이 신이기 때문이라 거듭 말했으니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겠지만 이러한 점은 말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지금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고 하거나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서 혹은 부처로서 살고 싶기 때문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좋은 파트너가 아니겠어?

이러할 때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연극무대가 형성되는 것인데 한쪽은 하나님의 역할을 나머지 한쪽은 숭배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야.

바로 이러한 연유로 지금 속해진 종교나 단체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라고 하는 거지.

다음 생에 내가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의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모시는 스승이나 종교의 신을 철저히 숭배하는 것은 내안에 내재한 신을 모시는 것과 진배없거든.

아들아!

이 같은 일은 비단 특정한 종교나 어느 특정한 단체에만 국한 시킬 문제만은 아니야.

사회생활을 할 경우 내가 모시고 있는 사장님을 힘들게 하는 행위가 다음 생에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행위를 조심하라는 말도 되는 거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행동이 언젠가 내가 되돌려 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직 네가 확신을 하지 못한다면 좀 더 이 같은 일을 경험해야 하는 네 삶의 여정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아니!

인과라는 것은 있지도 않고 우리들이 신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무엇을 되돌려 받는다는 거죠?

이미 신이라면 해탈을 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들에게 인과를 벗어난 신으로서의 삶을 가르치시지 않았나요.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말을 번복하시는 건가요?

 

그래?

만약 그렇다면 한번 물어보자꾸나.

네가 정녕 그렇게 올바로 들었더라는 말이더냐?

진정 너는 내가 인과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 것을 올곧게 받아들이며 네 생활에서 실천하였는지 되묻고 싶구나.

지금 잠시 네 가슴에 손을 얹어놓고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렴.

과연 너의 지금 생활이 너를 해탈로 이끌고 갈만큼의 인식을 가진 행동들 이었는가를 말이야.

좀 더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네가 진정 윤회의 사슬로 부터 영원한 자유를 말하고 쟁취할 만큼의 인식을 가진 신이 되는 삶을 선택하였나를 물어야 되겠지.

조금도 물질적인 인식을 벗어나지도 못했고 시시비비는 물론 어떠한 이원성의 벽도 통과하지 못했다면 너는 그야말로 해탈을 말하기는 이르다는 것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어.

다시 말해서 너는 좀 더 이세상의 연극을 하고자 선택한 삶속의 신이 되는 선택을 하였다는 거지.

이것은 아주 공평한 법칙일수밖에 없어.

너는 서울을 가는 길로 들어서서 가고 있는 사람이고 다른 이들은 대구로 혹은 광주, 부산. 등의 각지를 향해 가는 중인거야.

어떤 이들은 국내보다 국외로 가기를 희망한 것이고…….

이것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결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안에 내재한 하나님이 결정해 주신다고 지난 시간 말했지?

이러하기에 우리들은 각자의 말과 행동과 생각들을 청정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자신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나고자 하느냐에 따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

과거 내가 호주에 머물면서 홍법을 할 때 잠시 겪었던 일은 이와 같은 내말을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는데 그 당시 나는 홍법을 하는 내가 스승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한다는 것을 알았어.

순전히 나를 위해 필요한 스승을 위한 헌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자각했던 거야.

이것은 신을 따르고 종교를 선택했다 해도 결코 달라질 수 없거든.

신을 섬기기를 내가족보다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면 그기에 따른 일들이 내 앞에 놓이게 될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

여기에는 결코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란 있을 수도 없고 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은 현명하고 저러한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개념은 있지도 않아.

아들아!

지금 이 순간 너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내가 한말을 꼬투리 잡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난 시간 곳곳에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성토해놓고 이제는 어떠한 행동도 어리 섞거나 현명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하니 말이야.

그렇지만 그 당시 내가 한말은 어떠한 가정에 대한 나의 판단이었음을 네가 알 필요가 있어.

하나님을 좀 더 많이 인식하고자 해서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해야겠다는 일을 만들었다면 거기에 따른 방법과 지름길이 있을 건데 그러한 정답에서 멀어지는 행위를 어리석다고 표현한 것이지 전체적인 행위에 대한 내 판단은 아니라는 거지.

마치 남산을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선 사람이 북한산을 가는 노선의 전철을 선택한 것을 나무랐던 거다 이 말이거든.

이제 이해가 갔지?

렇다면 우리 모두가 해탈을 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이었냐고?

너는 아직도 모르겠니?

모든 이들이 해탈해 있지만 다들 아직도 그러한 해탈을 인식하고자 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마치 눈은 남산을 향해 있는데 몸은 북한산 전철에 실려 있는 꼴이지.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어.

 

"네 가족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를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가족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한다는 말이거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려고 한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신을 보고자하고 하나님을 진정 찾고자 하느냐의 신심을 확인시켜 주기위한 말씀이야.

이 말은 이런 식으로도 말을 할 수 있거든.

 

"우리들이 얼마나 근원에 가까운 신을 느끼고자하고 그러한 신이 되고자 하느냐에 따라 근원을 볼 수도 있고 화신을 볼 수도 있으며 분신을 볼 수도 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

 

"우리들이 어떠한 곳에 머무는 신이 되는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경험되어지고 인식되어지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모든 말들은 우리들이 어떠한 신이 되고자 하는 말을 여러 가지 각도로 말한 것에 불과해.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이 신이 아닐 수는 없다는 말은 신의 품성을 간직하지 않을 도리가 없기에 그것은 선택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사정이 이러하다면 보다 분명한 사실 하나가 우리 앞에 놓임을 볼 수 있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내가 되고자 하는 신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라는 거지.

이러하기에 지금 우리들의 육신 스승님께서는 사력을 다해 제자들의 인식을 높여주려 애를 쓰고 있는 거야.

제자들의 영적인 갈망에 부응해주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시는 거지.

자신의 지금 역할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겠어?

이와 같이 스승님께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실 때 제자들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더욱더 열심히 스승님의 말씀대로 수행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며 명상을 열심히 해야겠지?

팔만사천가지 법문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붙잡든지 아니면 팔만사천법문 모두를 부여잡던지 각자의 역량에 달렸겠지만 이순간의 역할만큼은 충실해야 할 것 같아.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의 내 역할에도 충실해야 하는 거지.

얼마만큼이나 신으로서의 생활을 영위 하고자하는 목표점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야.

아들아!

지난 시간에도 말을 했지만 우리들은 이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어.

마치 달리기를 하는 계주 주자들 마냥 지금의 내 순서가 내 앞에 놓여 있고 우리들은 달리는 중이야.

다음에 나에게 바통을 넘겨받을 주자들을 위해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경주해야 하는 거지.

이것은 내가 앞서거나 뒤서거나 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해야해.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코 후발주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생에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 시간을 마무리 하자꾸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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