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의천은 벌써 초록빛에 점령당하고 있었습니다.
봄의 정령이 소식을 전하기 무섭게 여름 폭군의 등장이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산책길에 나선 많은 이들이 반팔차림인 것은 물론 아직도 타이즈를 벗지 못하고 지하실에서 일을 하는 나조차 반팔을 입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새소리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을 듣노라니 물가에 텐트를 치고 누워 밤새 속삭이는 연인들의 밀어가 떠오릅니다.
그렇게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일 겁니다.
비록 그러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그 순간은 기억 속에서 영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스한 봄날을 좋아하고 따뜻하게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를 좋아하지요.
그렇지만 삭풍 몰아치는 겨울이 없으면 봄은 오지 않습니다.
또한 오만과 편견 속을 흐르는 오해와 불신의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믿음아래 피어나는 진실한 사랑은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인고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에덴동산 주위로 불 칼을 둘러놓았다 기록한 겁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s,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세상의 어떤 일도 노력 없이 얻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을 내가 감내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고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그 무엇이든 주된 목적이 된다면 나머지는 부수적인 일이지요.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신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구분 짓겠지만 신을 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둘 다를 사랑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육신은 성전이고 성전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있다했으니 이렇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다만 알고 모르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믿음아래 사랑하는 것은 영육모두를 사랑하는 것이고 영의 세계를 모르고 육에 속한 이를 사랑하면 육신의 사랑에 머물 겁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며 같은 종교아래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자식이 부부사이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하듯이 같은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영육을 결합시켜주는 역할을 하지요.
일반인들의 결혼은 육의 화합으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고 구도자의 결혼은 소울메이트를 만나 영원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말로만 영원히 사랑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영혼까지 사랑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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