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치고 육바라밀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없습니다.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일러 육바라밀이라고 하지요.
보시에는 금전적인 보시와 몸으로 하는 보시, 법문을 전하는 보시 등이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보시를 하고 육신을 이용한 보시를 하는가 하면 가르침을 전하는 보시까지 다양한 형태의 보시를 함으로서 공덕을 쌓아 깨달음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시를 함에 있어 자신의 희생 없이는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쓸 것 다 쓰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나면 보시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제대로 하려면 자신의 희생은 불가피한 겁니다.
그리고 지계의 경우를 보자면 이 또한 쉽지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정해진 계율은 없지만 각종교가 정하고 있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거지요.
나 같은 경우 5계를 지키고 있습니다.
죽이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술 담배 마약을 멀리하라
이런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고 있으며 술과 담배를 않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5계를 지키는 것도 자신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점은 5계의 범위를 정하기가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과연 어디까지를 계율위반으로 볼 건가 하는 것은 개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범위의 문제는 각자 개인에게 달린 것으로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이라 말해야겠지요.
다만 계율의 경우 본능을 억제하고 자신이 하고픈 욕망을 누르지 않고서는 계율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지계는 인욕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참지 못하면 계율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은 하나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보살 심과 지계와 인욕으로 무장한 구도자는 정진할 수가 있지요.
구도의 길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수행자가 많다는 점을 볼 때 이 또한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쉼 없이 정진하는 가운데 심정(心情)이 편안함을 찾기 시작하면 선정(禪定)에 들 수 있고 지혜(智慧)가 열리는 겁니다.
사실 이러한 일은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실천을 하려고 보면 그렇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육바라밀의 경계도 고정적으로 정할수도 없고 정해질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기도 하는지라 타인이 뭐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타인을 위하는 일보다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거지요.
정말 자신이 깨달음을 얻길 원한다면 이타행은 필수라 하겠습니다.
솔직히 거창하게 이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가족들에게조차 보살 심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중생구제에 나서기에 앞서 내 가족과 이웃에게 보살심을 먼저 발휘하는 것이 순서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무엇보다도 나에게 온 인연부터 챙기려 노력하고 있지요.
알고 보면 한사람은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겠습니까.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을 많이 사랑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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