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오랜만이지?
약속대로라면 벌써 한편의 글을 올려야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데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인과응보에 따른 일이라는 것을 자꾸만 확인하게 되거든.
내가 관여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제가 뿌린 것을 스스로 거두는 일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굴러가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너를 비롯해서 나와 인연 있는 이들이 인과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서라고 볼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4.19와 5.16혁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해.
4.19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하야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어.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거든.
우선적으로 말할 것은 4.19가 언제부터 혁명이 되었나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게 된 동기는 너와의 대화를 위해 4.19에 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검색 창에 4.19라고 치면 무조건 4.19혁명이라고 나오기 때문이었어.
내가 어린 시절에는 4.19의거라고 배웠고 그런 용어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4.19는 의거가 아니라 혁명이 되고 있다는 거지.
주사파정권이 들어서고 나자 인터넷 검색어도 바뀌었고 5.16혁명도 군사정변으로 검색되고 있는 실정이야.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대한민국이라 할 수 있고 주사파정권의 공작에 온 국민이 세뇌되어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어.
나까지도 무의식적으로 4.19혁명으로 검색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니.
주사파정권이 들어서고 언론이 통제당하면서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셈이야.
공영방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터넷까지 장악했다는 건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어.
그런데 말이야.
혁명이 되었건 쿠테타가 되었건 혹은 의거가 되었던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 생각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그것으로 인해 무엇을 가져왔느냐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일에 대한 결과가 어떠했느냐가 더욱 중요한 거라 할 수 있어.
일단 이런 사실을 인식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해.
그런데 우리가 4.19를 알아보기 전에 이때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봐야할 것 같아.
그래야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때가 6.25가 일어나고 10년째 되던 해였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휴전이 53년 7월 27일에 이루어졌으니 전쟁이 끝나고 7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어.
그러니 경제와 국가 안보 상황이 좋을 리가 없었지.
경제는 미국원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고 안보상황도 남한 공산당인 남로당의 잔재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기에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어.
이러다보니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힘을 빌려 장기집권을 하려 했던 거야.
아마도 미국으로서는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집권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겼음이 분명해.
그러니 1954년 11월 29일 사사오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서 개헌안을 가결 시킬 수 있었던 거지.
사사오입이란 쉽게 말해 반올림 법으로 10의 반의 수, 5가 되지 않으면 무효와 시키고 5이상은 반올림 법을 적용하여 유효하다는 식의 표결법으로 정족수가 모자라 통과시키지 못할 법을 억지로 통과시킨 일을 말하는 거야.
대통령중임제한법을 적용시키게 되면 이승만의 재집권이 어렵게 되는지라 초대대통령은 이러한 법에 적용받지 않는다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킨 것이니 꼼수 중에 꼼수였어.
그 당시 국회의원숫자가 203명이었고 참석인원이 202명이었는데 찬성표가 135표 반대가 60,기권이 7이었으니 딱 한 표가 모자라 통과를 시킬 수 없었던 거지.
2/3 중에 모자란 한 표로 인해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컸던 것 같아.
어찌되었건 이런 일로 인해 전국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건이 1960년 4.19가 일어난 불씨가 된 거라 볼 수 있어.
원래 4.19의 시발점이 된 것은 3.15부정선거라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대구에서 일어난 2.28학생의거를 출발점으로 봐야할 것 같아.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을 많이 벌였었는데 이때역시 야당부통령후보인 장면박사의 선거연설회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일요일 날도 등교하게 만들자 대구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던 거지.
경북고를 비롯하여 대구고, 대구상고, 등의 8개 학교 12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던 거야.
그런데 아들아!
인터넷을 통해 4.19를 연구하다보니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예전에는 의거였던 4.19가 왜 1995년부터 혁명이 되었나 하는 거야.
이때가 문민정부라 불리는 김 영삼 대통령 시절 이었는데 이분이 바로 이 승만 정권 치하에서 개고생 하던 야당인사였거든.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오매불망 원하던 이승만 하야를 성공시킨 4.19를 혁명으로 격상시켰던 거지.
사실 혁명이란 이전 것을 갈아엎고 새로 탄생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보면 4.19가 혁명이 되지 말란 법은 없어.
그래서 4.19희생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까지 가능했겠지.
그런데 말이야.
4.19가 성공하고 허울뿐인 대통령에는 민주당의 윤보선이, 같은 민주당인사인 장면박사가 내각제 총리에 임명되었던 것까지는 좋았다고 볼 수 있지만 어째서 그들의 주장이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었냐는 거지.
이것은 학생들 운동이 순순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볼 수 있거든.
결국 학생들의 운동에는 숨어있는 손길이 있었다는 거야.
내가 오늘 열거한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인데 이러한 정보의 대부분은 현 정부의 입김 하에서 기록되었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된 내용이라 볼 수 있어.
그러니 당연히 좌파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고 좌편향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정보라고 봐야해.
안 그래도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냐하는 거였어.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도 복학생들을 비롯하여 고학년들이 주축이 되어 계획과 작전을 짜서 움직이는데 일개 고등학생들이 시국을 걱정하여 자체적으로 시위를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일이야.
이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이라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선동전략에 이용당했을 거라 여겨져.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 정권이 잘했다는 말은 아니고 자유당의 횡포에 가까운 부정행위가 만연했던 것은 기정사실이긴 하지만 학생운동의 뒷면에는 불순세력(인식에 따라서는 간첩이나 민주세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
아무튼 2.28일 대구에서 발생한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필두로 전국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급기야 3.15선거 부정행위로 인해 민중들까지 가세해 대통령을 하야시켰지만 내각제총리가 들어선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혼란과 배고픔이 찾아왔어.
자유당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하게 된 민주당이 정치를 잘했더라면 5.16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부패적인 정치형태가 또 다른 혁신을 요구하였던 거지.
민주당 내부에서의 갈등도 5.16혁명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는데 신구양파의 분열로 인한 당파싸움도 한몫했던 셈이야.
게다가 그들이 슬로건으로 내건 내용에서도 보았듯이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반미적이고 친북적이다 보니 미국정부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주 큰 약점이었어.
실지로 이 같은 내말을 증명하는 자료가 위키 백과에 기록되어있는데 5.16혁명은 미국의 CIA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5대 CIA국장 앨런 덜레스가 BBC방송 인터뷰에서 밝혔던 거지.
게다가 5.16혁명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면 이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혁명이 일어난 처음에는 유엔군 사령관이던 매그루더가 군사혁명반대성명을 발표했었지만 정작 혁명저지를 위한 군사행동은 거절했다는 것을 볼 때 미국정부는 이미 박 정희 장군의 혁명을 묵인(오히려 돕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거야.
혁명이 일어난 며칠 동안 장면총리는 잠적(피신)해 있었고 대통령이던 윤 보선은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으니 집권당인 민주당 자체가 정권을 유지하고자하는 의지조차 없었던 것 같아.
결국 이렇게 미국의 지지 하에 등장한 박 정희 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자신이 의장의 자리에 올라 3년간 군정을 한 후 선거를 통해 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던 거지.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5.16군사혁명의 주체인 박 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지.
왜 오늘날의 좌파들은 박 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폄하하고 그분의 과거행적을 문제 삼고 있는지를 알아야 오늘날 좌우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치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이분의 개인사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아예 전기를 읽어야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럴 수는 없고 간략하게 말해보기로 해.
박 정희 대통령의 업적이야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폄하하는 세력들이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이 말해주는지라 더 말할 필요가 없어.
경제규모 세계 10권에 들게 된 초석을 마련한 것이 박 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은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거든.
대한민국 좌파들 일부분만 빼고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고 있으니 상세한 설명은 안하기로 하겠어.
이런 실정인지라 좌파인사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친일행적과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던 사실들이야.
그중에서 남로당전력에 관해서는 많이 떠들지 않고 친일행적에 관해 가장 많이 공격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좌파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로당에 몸담았던 것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게 되면 자신들의 출신성분자체를 공격하게 되는지라 주로 친일파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만약 박 정희가 남로당(공산당원) 출신이라는 것을 공격하게 되면 공산당은 안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됨으로 얍삽하게도 피해가는 거지.
그러면 간략하게나마 박 정희 대통령의 과거사를 알아보도록 해.
이미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대로 박 정희는 일본육사출신이 맞아.
44년 일본육사를 졸업한 박 정희가 만주 팔로군을 토벌하는 관동군에서 중위로 복무한일을 두고 좌파들은 독립군토벌대로 활약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게 봐서는 곤란할 것 같아.
왜냐하면 팔로군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기 때문이야.
좌파들의 주장에 의하면 만주 팔로군에 상당수의 독립군이 속해있었다고 하지만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팔로군의 정책에 따라 조선독립군들은 만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배치 되었다고 하거든.
물론 소수의 독립군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독립군을 때려잡는 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곤란하다는 거지.
그런데 아들아.
내가 박 정희 대통령의 과거행적에 대해 조사를 하다 지금껏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약간 충격적이었던 것이 박 정희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동료들의 증언이었어.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팔로군토벌 명령이 떨어지면 이상하리만치 박 정희가 흥분하더라는 거야.
어서 빨리 때려잡으러 가자는 등의 말을 하며 필요이상의 의욕을 보이더라는 거지.
그래서 참으로 괴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조금 더 조사를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더구나.
알고 보니 박 정희는 1945년 2월 상해 임시정부산하의 광복군에 입대를 했었어.
비밀리에 광복군에 입대를 한 상태로 관동군에 있었던 이유는 광복군으로부터의 명령 때문이었던 거야.
광복군수뇌부는 일본군안에서 밀정노릇을 하는 이들이 필요했었고 그 일을 박 정희가 해주길 바랐던 거지.
이러한 일은 박 정희 개인 한사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일본군에 속해있던 많은 장교들 및 조선학도병에게도 하달되었던 명령이었어.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던 박 정희인지라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필요이상의 리액션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런 내용을 사전에서는 제대로 찾아볼 수가 없거든.
좌파정부가 들어서자 박 정희를 폄하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었는지라 많은 내용들이 물 타기가 되었거나 안 좋은 쪽으로 묘사되고 있어.
일각에서는 박 정희가 살아생전 광복군 첩보장교라는 소리를 싫어했다는 말을 하며 그가 광복군에 입대한 사실이 일본패망전이 아니라 해방 후, 그러니까 1945년 9월이라고 말해.
그러면 왜 박 정희는 자신이 해방 전에 광복군에 입대한 사실을 부정하려 했을까.
이러한 일을 말하려면 또다시 우리들은 5.16으로 돌아와야만 하는데 그때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그야말로 피폐하기 짝이 없었어.
산업기반은 전무했고 해마다 보릿고개 넘기가 바빴던 거지.
그러니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해있었던 거야.
이런 상태에서 박 정희는 어떻게든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려보려 노력을 했었는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원조를 해주지 않았어.
좌파에서는 미국의 도움으로 박 정희가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헛소리에 불과해.
미국의 CIA가 박 정권이 집권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친북성향인 민주당이 싫어서였을 뿐 박 정권을 전적으로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 정희를 밀어주면 자신들이 요구하는 데로 움직여 주리라 여겼는데 깐깐하게 구는지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거지.
그랬기 때문에 박 정희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야 했던 거야.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광복군 첩보장교행적은 외교상 치명적일 수 있기에 그 당시로서는 밝혀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그런 이유로 자신의 과거행적을 미화시킨 책을 누군가 출판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호되게 야단쳐서 돌려보냈던 거야.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내주장에 동조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박 정희의 가족사를 보면 내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리라 생각해.
박 정희에게는 박 상희라는 띠 동갑인 형이 한분 있었어.
이분은 독립운동가 이었으며 언론가로 활동하신분인데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지부 사무국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야.
어린 시절 박 정희는 형인 박 상희를 가장 잘 따르고 존경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박 정희의 일본군 첩보장교 설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그리고 박 정희의 남로당이력 역시 형인 박 상희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해.
형인 박 상희가 속해있는 민전은 사실상의 공산당이자 남로당의 또 다른 이름이거든.
그러니 형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박 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박 정희 대통령의 한때 공산당입당을 문제시 여기는 것보다 그 이후 어떠한 과정을 겪고 현재에 이르렀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여순반란사건(48년 10월19일)으로 인해 국군내부 남로당 색출작업이 벌어졌고 그때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았다가 이후 15년형으로 감형되기도 했는데 1950년 일어난 6.25때 소령으로 복귀되어 전공을 세운 후 승승장구한 끝에 혁명을 일으킬 무렵에는 소장의 계급이었어.
그만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는 말이야.
그런데 이러한 과거행적을 가지고 문제시 여긴다고 한다면 그들의 사상을 의심해 보아야하는 것이 아니겠냐 말이지.
한때 남로당(공산당원) 이었다 하더라도 전향하여 전쟁에 나가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인정을 받았다면 오히려 칭송받아 마땅한 것을 과거를 문제 삼아 그분의 업적을 폄하한다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의심해봐야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박 정희 대통령이 남로당을 배신하고 그들의 정보를 넘김으로서 많은 남로당조직원들이 피해본 것을 문제시 여기는 것 일뿐 남로당이력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왜 드러내놓고 말을 못하는가 말이지.
지금의 주사파정권의 핵심인물들 중 한사람은 최근 언론에 말하길 과거에 주사파라고 지금도 주사파가 아님을 강조했는데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은 그렇게 과거의 행적을 숨기거나 용서받고 싶어 하면서 어째서 박 정희 대통령의 과거를 그렇게나 안 좋은 것으로 몰아가느냐 말이야.
그래도 박 정희 대통령은 전향을 하고 공산당을 상대로 전투를 하여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업적과 경제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셨지만 그대는 도대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싶어.
김일성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반정부투쟁을 일삼아오던 무리들이 어쩌다가 청와대를 점령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해본일이 없는 사람들이 기껏 한다는 일이 북한에 퍼주기나 하려들고 국민들을 사회주의사상에 물들게 만들기 위해 전 방위로 노력하고 있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줄 아는가 말이지.
아들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들이 정권을 잡은 것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
이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확한 안배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란 걸 내가 아는지라 그들이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지금처지를 잘 살피라는 말이야.
지금 자신들은 자유대한민국정부 수반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심하고 국민들을 잘 먹고 잘살게 만들고 대한민국의 앞날을 책임져야할 위치에 있음을 명심하라는 거지.
무책임하게 북한에 퍼주거나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려 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말을 하다 보니 목적과는 약간 노선이 달라진 것 같구나.
각설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해.
앞서 말한 대로 박 정희의 친일행적은 알고 보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한 각본일 가능성이 많아.
결정적으로 이러한 이유 중의 한 가지는 내가 성장하는 내도록 받은 반일사상 교육이라 할 수 있어.
86세대라 할 수 있는 내 나이 또래치고 반일감정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이모두가 학창시절 지겹게 주입받아온 반일교육 탓이야.
만약 박 정희가 만고에 때려죽일 친일파라고 한다면 국민들에게 이런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해.
지금의 주사파 정권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뿌리라할 수 있는 북한의 공산당을 미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몰라.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나라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니.
아무튼 국민들에게 반일교육을 시킨 사실만 보더라도 박 정희 대통령이 친일파라는 말은 헛소문에 불과한 거라 봐야하고 만약 이분이 친일파라고 한다면 과거 우리부모세대의 어느 누구도 친일파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일례로 좌파들의 정신적인 지주라 할 수 있는 김 대중 대통령도 알고 보면 친일인사라 할 수 있거든.
일제 때 김 대중은 일본인이 사주로 있는 목포상선에 근무한일이 있어.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사장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사업을 김 대중에게 맡겨놓았다고 하는데 이때부터 김 대중은 졸지에 사장이 되어 목포신문을 인수하는 등의 사업수완을 발휘한 끝에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해.
그리고 김 대중은 목포 상고 학생회장 시절 일본군 군복을 입고 다니면서 학도병 지원 연설을 하고 다녔던 전력이 있어.
그리고 문재인대통령 아버지도 일제 강점기 농업과장 이었다고 하는데 이때당시는 일본을 위해 미곡수탈을 하던 일을 맡아했으니 친일파라고 봐야해.
일개과장이 무슨 친일씩이나 하겠지만 이때의 과장은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한다하니 친일 중에도 친일로 볼 수 있는 거야.
결국 가족들이 남한으로 피난 온 이유도 친일파를 때려잡는 북한의 김일성을 피해 내려온 거라 여겨져.
실지로 북한에서는 친일파 색출과정에서 사형당한이가 30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 많던 친일파들이 모두 남한으로 피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거지.
또한 박 원순 서울시장 아버지는 일본훈도라고 하는데 혼도란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일본제국주의 정신주입에 앞장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아주 악질 친일파라 할 수 있어.
이밖에도 친일파 부모를 둔 위정자들은 많은데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거든.
이러한 실정인데 어떻게 지금에 와서 친일파 척결을 할 수 있겠냐는 거지.
국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기위해 친일파를 없애야한다 말할 뿐 정말 없애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자신들이 제일먼저 타깃이 될 것이 분명한데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니.
지금도 친일이력을 가진 정치인을 검색해보면 민주당 자유한국당 할 것 없이 숱하게 쏟아져 나와.
아들아!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친일파를 옹호하거나 잘했다는 것은 아니야.
그저 흘러간 과거사를 파헤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부터 잘해나갈 걱정을 하라는 말이며 앞으로 돌아올 것을 걱정하라는 거지.
과거에 친일이나 주사파라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다면 칭찬해주고 격려해 주자는 건데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가 않아.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칭찬만 해서는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할 수가 없기 때문으로 어떻게든 업적을 까 내리고 흠집을 내야 명분이 서는 법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좌파진영에서는 어떻게든 박 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폄하해야하고 친일파라는 것을 사실화 시킬 필요가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할지라도 나에게는 박 정희야말로 위대한 대통령이고 한국정치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분의 영웅담은 수없이 많지만 나를 사로잡을 일들 중 한 가지는 혁명이 일어난 직후의 재벌과의 일이었어.
혁명 후 개혁을 하기위해 박 정희가 재벌을 손보기 시작하자 한국의 기업가 및 재벌들은 모두가 일본으로 피신해야만했지.
그래서 결국 나라경제를 생각한 박 정희는 재벌들을 소환하여 면담을 했는데 거기에서 재벌들로부터 많은 고충을 듣고 함께 경제발전을 하기로 약속을 했던 거야.
이로 인해 한국에는 경제발전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착취현상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어.
하지만 어떤 정권도 득과 실은 있기 마련인데 실보다 득이 많으면 성공한 정권이고 득보다 실이 많으며 실패한 정권으로 봐야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박 정희는 성공한 대통령이며 역대대통령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분이라 봐야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많은 좌파인사들이 말하듯이 미국이 박 정희를 돕기만 했던 것이 아니야.
앞서도 말했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밀어주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반대를 했다는 것이 역사에 기술(記述)되고 있어.
64년 월남파병을 약속하고 한때는 관계가 좋았지만 이후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세우는 박 정희정권을 미국은 늘 감시하고 견제하는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 대중이었고 김 영삼도 그중 한사람이었어.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김 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알아.
이 사건을 두고도 왈가왈부 말들이 많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후락의 과잉충성심에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해.
왜냐하면 이때가 이 후락이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를 때기 때문이야.
이 사건은 파티 장에서 정보부장인 이 후락에게 수도경비 사랑관인 윤필용이 인사차 건넨 말로 인해 대대적인 군부숙청작업이 일어났을 때거든.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께서 노쇠해서 이젠 물러나야한다고 했으니 반란을 모의하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받게 된 거지.
게다가 청와대내부에 사찰을 짓게 되면 임기 내에 통일 된다는 말을 듣고 “통일정사”라는 사찰을 지었는데 알고 보니 이 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수방사 손 영길 참모장이 짓게 한 거라는 보고가 올라간 거야.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입지가 불투명해진 이 후락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려고 벌린 것이 김 대중 납치사건이었어.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좌파들은 믿지 않겠지만 오늘날의 좌파가 득세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김 종필의 증언에 따른 일이니 그렇게 핏대를 세우지 말기바래.
5.16의 혁명을 성공시킨 기획자이기도한 김 종필이 처삼촌이기도한 박 정희를 배신하고 그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아주 높아.
하지만 사실이 어떻든 박 근혜 대통령은 김 대중이 살아있을 때 직접 찾아가 아버지 박 정희가 저지른 탄압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고 김 대중은 그 사과를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어.
'박 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그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아들아!
말을 하다 보니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김 대중 대통령은 멋있는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분의 연설문 내용 때문인데 잠시 인용해 보도록 해.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박 정희 전 대통령은 6.25의 폐허 속에서 우리나라가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가져다주었다. 서구처럼 될 수 있다, 선진국에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고속도로도 만들었다. 그런 공로는 지대하다. 근대화를 이룩한 것은 부인하지 못 한다"
이 내용은 1999년 5월, 1박 2일 일정으로 영남지역을 방문해서 한말이거든.
그것도 지역 원로들과 박 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박 정희 대통령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한 거야.
물론 시기와 장소가 그렇게 말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고 사람이 때에 따라서 얼마든지 논조를 바꿀 수는 있다하겠지만 평소 가슴에 간직한 말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볼 때 지금의 누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가슴이 넓었다고 생각되며 나라를 걱정하는 지도자였다고 생각해.
사실 이런 폭 넒은 마음을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바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는데 그들 각자는 좋게 생각하더라도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결코 그렇게 평화롭게 내버려두지 않아.
다시 말해서 집권을 하고나면 너그러울 수 있어도 집권하기까지는 무섭게 물어뜯어야만 가능하다는 거지.
이것은 물질세상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이어질 순환의 고리이자 윤회의 쇠사슬이야.
서두에도 말했듯이 오늘날의 정치상황은 윤회의 쳇바퀴가 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에 불과해.
4.19혁명 때 많은 시위대의 죽음을 앞세우고 집권하는데 성공한 민주당이 박 정희의 5.16으로 인해 정권을 찬탈 당해야했던 것이나 오늘날 박 근혜 대통령이 세월호로 인해 죽은 아이들의 주검을 앞세운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민주당에게 뺏긴 것이 어찌 우연이겠냐 말이야.
게다가 자유당시절 4.19시위대를 향해 발포명령을 내렸던 홍 진기는 박 근혜 대통령 탄핵의 중심역할을 했던 JTBC 사주 홍석현의 아버지이고 홍석현은 국정농단의 뇌물제공자 삼성 이재용부회장의 외삼촌이거든.
대통령탄핵의 일등공신 두 사람이 한사람은 주미주한대사로 임명받았고 뇌물죄로 복역하던 이재용은 얼마 전 풀려났어.
너무나 기가 막힌 인과응보의 연결고리가 아닌가 말이야.
정작 뇌물이라고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은 박근혜대통령은 아직도 못나오고 있는데 말이지…….
아들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에서 마쳐야할 것 같아.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사건의 전개를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지라 많이 길어지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초과하게 되었는데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고 여기에서 잠시 쉬어가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