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상고하는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변함없는 건강과 안녕(安寧)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마가복음 5번째 시
간을 열겠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제가 알도록 허락하심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매일같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게 하심에도 감사하며
제가 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심에도 감사드리며
물질적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도 당신의 권능을 알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 당신께 감사하는 기쁨을 맛보게 허락하소서.
아멘! 아멘! 아멘!
시작에 앞서 지난시간의 여운(餘韻)을 잠시 느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영혼에 대해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좀 더 파헤쳐봐야겠
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더러운 영혼(귀신)(unclean spirits)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지 알아야 우리들이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
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자면 영은 온 곳으로 돌아가고 혼백은 흩어
지며 육은 땅으로 돌아간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영은 우리의 진정한 진아(眞我)),즉 진정한 영혼(성령)을 말합니다.
혼백이란 우리들이 자신으로 알고 있는 인식체(認識體)를 말하는 것이며 육신은 우리의 몸
을 말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영혼이란 인식 체를 말하는 것으로 육신을 벗어난 상태의 여러 단계별 몸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말을 그다지 신
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언급된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본 후에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
에 앉으라 하셨도다
The LORD said un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앞의 The LORD 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뒷부분의 my Lord는 다윗의 영혼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라는 말은(Sit thou at my right hand)하나님과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이라는 말이지요.
자신 안에 내재한 성령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과 하나 된 영혼의 등급에 올랐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높은 영혼일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영(unclean spirits)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같은 영이라도 누군가의 영은 하나님과 하나 됨의 영광을 얻고 누군가는 더러운
영이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이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됨의 영광을 얻고 어떤 사람이 더러운 영
이 될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 홀로목사가 몇 번에 걸쳐 방법을 말해놓았으니 기억이 나지 않으시
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간관계상 또다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해드리고 싶은 말은 있습니
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천국을 간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만약 이럴 것 같으면 예수님생존당시의 이스라엘 백성 중에 더러운 영(귀신들린 이)은 없어
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사람 중에 숱하게 많은 귀신들린 이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
대로 알지 못하고 무조건 믿어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듣는 이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말하는 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
다만 그 또한 모순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리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은 믿음에 대한 이
야기로서 믿지 않는 이에게 적용될 말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예수님 보혈의 의미를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합시다.
그런 사람이 타종교인들을 향해 욕을 퍼붓고 지옥 간다고 악담을 한다면 그 같은 일이 합당
하며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만약 이런 식이 될 것 같으면 과거 유럽의 크리스천들이 8차례에 걸쳐 십자군전쟁을 일으
킨 것도 합당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전쟁을 잘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으며 그런 말을 하면 무식하다는 말
을 듣기 십상이지요.
정말 예수님을 믿고자 한다면 예수님말씀을 제대로 알고 믿어야 마땅하며 예수님말씀처럼
살아야합니다.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말씀을 알고 있다면 어찌 타인들을 향해 지옥 갈 거라는 악담을 그
리도 쉽게 할 수가 있는지요?
이런 사람은 절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 홀로목사가 감히 말하건대 십자가의 보혈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예수님이 보내신다는
보혜사(성령)가 각개인의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럴 경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감히 지옥 간다는 말을 하지 않
을 겁니다.
정말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내면에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게 되면 살아가는 동안 죄를 짓
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이 짓는 죄에 대해서는 곧바로 징계가 주어집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며 죽어서 더러
운 영이 될 사람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십자가 보혈을 믿는 일부기독교인들의 성경해석을 보자면 참으로
모순됩니다.
예수만이 구원이고 영생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과 목자들을 영생을 얻지 못한 이로 치부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성경해석을 하고 있으니 예수가 부활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만약 이럴 것 같으면 예수사후에 영생을 얻은 사람은 단한사람도 없으며 모두들 예수의 부
활을 꿈꾸며 우주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타종교인들을 비판하고 지옥 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지요.
이런 분들이 잘못하면 깨끗지 못한 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만큼은 이런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갈 길이 멀고 아직 말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지라 이쯤에서 서
두의 말씀은 줄이고 본문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막4:1)
이 내용역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있었다는 것은 세상으로(바다)부터 자유로워진(배, 방주)상태
에 있는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기위해 몰려든 무리가 육지에 있었다는 말은 세상에 남겨진 상태, 즉 깨닫지 못한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지한 이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위해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는지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러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막
4:2)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막4:3)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막4:4)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막4:5)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막4:6)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막4:7)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가 되었느
니라 하시고(막4:8)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9)
뿌리는 자는 법문(말씀)을 전해주는 이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은 길가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소용없습니다.(4절)
또 어떤 이는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다지 믿음이 서지 않는지라 시련이 닥치면 맥없이 무너
지고 맙니다.(5~6절)
나 홀로목사는 이런 사람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할 때는 믿는다고 하다가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
중 누군가 병이 들거나 죽음을 맞이하면 신심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신앙을 버리고 말
지요.
이모두가 믿음이 굳건하게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주위환경이 좋지 못한 탓에 온갖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와 도저히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7절)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이들도 있으니
각자 믿음의 크기만큼 결실이 다양하게 피어납니다.(8절)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나 홀로목사 개인의 경험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면 제대로 뜻을 헤
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왜 예수님은 쉽게 풀어서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서 말씀하실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예수님께서 말씀해놓으셨습니다.
함께 보시죠.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막
4: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4:11)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
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4:12)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막4:13)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서 말씀하는 이유가 외부인 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
니다.
행여 외부인 들이 알아듣고 깨닫게 되면 돌이켜서 죄 사함을 얻을까봐 비유로서 말한다했으
니 이방인들조차 제대로 알아듣게 되면 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12절)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제자들조차 비유의 말씀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13절)
그만큼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며 알아듣기만 하면 죄 사함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예수님이 말씀해주시는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어볼까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4:14)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
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막4:15)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막4:16)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
어 지는 자요(막4:17)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
니라(막4:20)
예수님말씀을 듣고 보니 안 좋은 것을 고치고 좋도록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
각이 드는군요.
15절의 경우에는 말씀을 들을 때에 사단이 말씀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만들면 됩니다.
사단이 빼앗아 간다는 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말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으면 아무
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돌밭에 뿌리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굳어있어서 말씀이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는 말이니 내주장과 내의(義)를 내려놓고 말씀을 청종(聽從)하면 됩니다.
그리고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더라도 인내하고 믿음의 길을 벗어나지 않으면 되지요.(16
절~17절)
또한 온갖 걱정근심과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모든 화가
비켜갈 것인즉 가시덤불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18~19)
이렇게 되면 저절로 마음 밭이 평온을 찾아 말씀이 뿌리를 내릴 것인즉 각자의 믿음대로 수
확하게 될 겁니다.(20절)
어떻습니까?
너무나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간단하다고만 말하기에는 다음내용들이 너무나 심오합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
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4:21)
And he said unto them, Is a candle brought to be put under a bushel,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set on a candlestick?(KJV)
He said to them, "Do you bring in a lamp to put it under a bowl or a bed? Instead,
don't you put it on its stand?(NIV)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4:22)
For there is nothing hid, which shall not be manifested; neither was any thing kept
secret, but that it should come abroad.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If any man have ears to hear, let him hear.
해석에 앞서 번역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왜 bushel과 bowl이 말로 번역되어야만 했을까요?
곡식을 재는 단위로 쓰이는 단어가 bushel이니 됫박이라고 하거나 그릇(bowl)이나 용기라
고 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제대로 된 해석이 이루어집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용기나 평상아래 두려함이냐 등경(촛
대)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4:21)
등불이란 말씀을 가리키니 좋은 말씀은 살아가는데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좋은 말씀을 감추어 두거나 밝지 못한데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22절의 번역은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은 이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는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보지 않았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어를 보니 너무나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지요.
다음은 제가 영어를 본 후 해석한 것입니다.
숨긴 것이 없다면 드러낼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비밀로 간직할 것도 없고 드러나게 되느니
라.
For there is nothing hid, which shall not be manifested; neither was any thing kept
secret, but that it should come abroad.
이렇게 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보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행방법을 말해놓은 것이더군
요.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감춰진 것이 있다는 말이니 아직 마음에 어두운구석이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가운데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자신의 어둡고 부정적인 면들이 드러나게 됩
니다.
등불이란 빛이니 밝은 빛 아래 감춰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지혜를 열면(빛을 보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비유의 말도 알아듣게 된다는 말
입니다.
23절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은 지혜가 열린 이들만 알아들으라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조금은 납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막4:24)
And he said unto them, Take heed what ye hear: with what measure ye mete, it
shall be measured to you: and unto you that hear shall more be given.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5)
For he that hath, to him shall be given: and he that hath not, from him shall be
taken even that which he hath.
말씀을 들을 때 주의해서 들으라는 말입니다.
헤아린다는 것은 판단(measure)한다는 말로서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자신이 간직한 인식의 폭만큼 받아들이기에 헤아린 만큼 받을 것이라 했으며 더 받기도 한
다고 했습니다.
있는 자란 지혜가 있다는 것이니 당연히 받게 될 것이요 지혜 없는 이는 그나마 자신이 갖
고 있던 식견마저 흔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하신 것인데 듣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거지
요.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막4:26)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막
4:27)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목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왕국(천국)에 이르는 것은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했으니 앞서 말한 대로(14
절~20절) 어떤 마음가짐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지요.
믿음의 씨를 뿌린다는 말은 마음 안에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4:28)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4:29)
But when the fruit is brought forth, immediately he putteth in the sickle, because
the harvest is come.
믿음이 마음 밭에 뿌리내리면 싹이 돋아나게 되겠지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실이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겁니다.
땅은 우리개인을 나타내며 추수 때 낫을 대는 이는(he putteth in the sickle) 하나님을 가
리킵니다.
추수 때는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로 돌아갈 때이니 믿음의 크기만큼 결과가 각자에게 주어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늘나라에 대한 추가설명이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막4:30)
And he said, Whereunto shall we liken the kingdom of God? or with what
comparison shall we compare it?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막4:31)
It is like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when it is sown in the earth, is less than
all the seeds that be in the earth: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2)
But when it is sown, it groweth up, and becometh greater than all herbs, and
shooteth out great branches; so that the fowls of the air may lodge under the
shadow of it.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위해 이렇게 비유해놓았습니다.
겨자가 아무리 크게 자라도 공중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 수는 없지요.
한두 해밖에 살지 못하는 풀의 일종인 겨자가 모든 식물보다 더욱 크게 가지를 낸다
(greater than all herbs, and shooteth out great branches)는 것은 천국의 상황이 이세
상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래서 성경은 액면 그대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 나 홀로목사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 들을 수 있는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막4:33)
And with many such parables spake he the word unto them, as they were able to
hear it.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
시더라(막4:34)
But without a parable spake he not unto them: and when they were alone, he
expounded all things to his disciples.
우리들이 보았다시피 깨끗지 못한 영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만드느라 비유로 말씀하신다했지
요.
그러니 성경을 액면그대로 봐야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의 궤변이며 지혜롭지 못한 이들
이 무지한 사람들을 끌고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부디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얼마나 우리들이 성경을 잘못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막4:35)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막
4:36)
And when they had sent away the multitude, they took him even as he was in the
ship. And there were also with him other little ships.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막4:37)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4:38)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
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막4:39)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
니(막4:40)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막
4:41)
이제부터 여러분은 지금까지 들어오고 알고 있던 성경지식을 잠시 내려놓고 나 홀로목사의
말을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바다에 나가서 풍랑을 만나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믿음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왜 그런지 36절에 그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even as he was in the ship) 갔다고 기록한 것은 이 내
용이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배들도 함께 했다는 대목은(with him other little ships)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
정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냥배도 아니고 작은 배(other little ships)라 기록한 것은 믿음의 크기를 나타내는 동시에
인식의 크기를 말합니다.
이미 1절에서 밝혀 놓았듯이 예수님은 방주(영생을 얻은, 영원한 해탈을 득한)에 오르신 분
이고 제자들은 아직 믿음과 인식의 폭이 넓지 않았기에 작은 배라고 일부러 기록하였는데
한글성경을 만든 이들이 비유의 말씀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단순하게 다른 배들도 함께 했다
기록한 거지요.
따라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는 것은 세파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이며 어떤 어려움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분들을 위하여 1절을 다시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막4:1)
만약 이 내용이 액면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면 성경은 거짓말을 기록한 책이 되고 맙니다.
많은 군중이 바닷가에 모였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면 확성기가 있다고 해도 모자람이 있
을 겁니다.
이것이 비유라는 것을 일부러 밝히기 위해 마가는 예수가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았다고 명
시했으며 군중들은 육지에 있었다고 기록한 겁니다.
4장 전체의 가르침을 펼친 후 예수께서 배에 떠있는 채로 바다로 나갔다했으니 바다가운데
에서 강연을 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명백하게 말해서 비유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분들을 위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같은 내용을 보겠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마8:23)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마8:24)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
라(마8:27)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눅8:22)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
어 위태한지라(눅8:23)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
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8:24)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눅8:25)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비교해보면 이 내용이 얼마나 큰 비유의 말씀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이 하나의 독립된 내용으로 기록되었지만 마가복음은 4장전체가 연결되
어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로 기록하고 있지요.
이는 눈 밝은 이로 하여금 이 내용이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배려입니다.
마태복음은 그저 배가 풍랑을 만나 제자들을 구했다고 기록하였지만 마가는 좀 더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데 고물을 베게삼아 베고 누웠다는 것까지 묘사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더러운 영이 깨닫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따라서 성경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꼴입
니다.
타인들이 지옥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날을 심히 걱정해야하는 영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구태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기를 바랍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시대에만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지옥에 빠트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성경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없어서 예수를 배척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지혜롭지 못한 인식으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깊은 가르침을 알 수가 없었으며 성
경을 알지 못하는 일반백성들을 무저갱에 빠트리는 잘못을 저질렀던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구약의 깊은 뜻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무조건 인간예수만을
추종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들고 있으니 과연 이들의 앞날이 어떠할는지요?
몇 번에 걸쳐 밝혀놓았듯이 성경은 우리네 삶(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전체가 들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경전중의 경전입니다.
거듭 부탁드리건 데 나 홀로목사의 말이 믿기지 않는 분들은 이곳을 오지 말기 바라며 오더
라도 널리 알리지는 말아주기 바랍니다.
행여 귀신들린 이들이라도 보게 되면 영생을 얻게 해 달라 떼를 쓸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해주지 않았으니 나 홀로목사역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다보니 마칠 시간이 되었나봅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만나게 되길 바라며 마가복음 4장의 해석을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