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holy)한 목사,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오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는 10월의 중순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세상적인일이나 육적인일보다 영
적인일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을 시작할까합니다.
여러분!
혹시 나 홀로목사가 스스로 홀리(holy)하다고 말해서 기분 나쁘지는 않았는지요?
제가 자칭 홀리(holy)한 목사라고 한 것은 절대 스스로를 높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모
두에게 축복을 선물해주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홀리(holy)해야 여러분모두가 홀리(holy)한 사람에게서 홀리(holy)한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만약 홀리(holy)하지 않다면 홀리(holy)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홀리(holy)하지 못한 말
씀을 듣는 꼴이니 여기오시는 여러분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홀리(holy)해야만 하고 홀리(holy)할 것이며 홀리(holy)합니다.
이러한 일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며 여러분모두가 홀리(holy) 할 수 있는 길이
기도 하니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
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For I am the LORD that bringeth you up out of the land of Egypt, to be your God:
ye shall therefore be holy, for I am holy.
이제 조금 확실해 졌는지요?
모세의 입을 통해 여호와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이 제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께 전해질 수 있길 바라며 마가복음 7번째 시간을 열겠습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
가에 계시더니(막5:21)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방주(구원의 배)를 타고 다니십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으려 몰려왔다고 했습니다.
바닷가에 계셨다고 기록한 것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주와 아직 영에 대해 모르고 있는
사람들과의 중간위치에 서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자(中保者)라는 말씀이지요.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막5:22)
And, behold, there cometh one of the rulers of the synagogue, Jairus by name; and
when he saw him, he fell at his feet,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
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5:23)
And besought him greatly, saying, My little daughter lieth at the point of death: I
pray thee, come and lay thy hands on her, that she may be healed; and she shall
live.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막5:24)
회당장(the rulers of the synagogue)이란 유대교회의 최고 우두머리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믿음이 아주 큰사람일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조차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 된 분이
라는 점을 강조하기위해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야이로의 뜻은 하나님이 교화시키다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회(synagogue)의 수장(首長)인 사람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했다
는 것은(besought him greatly)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죽음에 이르러있는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어도 치유되어(may be healed) 살게 될
것이라(shall live) 했으니 그 믿음이 실로 크다 하겠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하나님 이상으로 믿었다는 거지요.
이런 믿음을 가진지라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따라나섰고 많은 군중들 또한 따라갔던 겁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막5:25)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5:26)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5:27)
When she had heard of Jesus, came in the press behind, and touched his garment.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5:28)
For she said, If I may touch but his clothes, I shall be whole.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막5:29)
혈루증은 부인병으로 혈우병과는 다른 질병입니다.
혈우병은 남녀 불문하고 공히 걸리는 병이지만 혈루증은 여성들이 걸리는 만성자궁출혈병을
말합니다.
한번하혈하면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출혈되는지라 아주 위험한 병입니다.
오늘날에는 지혈제의 개발로 쉽게 피가 멈출 수 있게 되었지만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며 잘못
하면 암으로 발전하는 병으로 과거에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이런 환자를 부정하다 여겨 사람들이 접촉하기 꺼려했었지
요.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함부로 만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
다.(27절)
그러기에 군중들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came in the press behind) 예수님 옷자락을 만졌
던 겁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옷에만 손대어도 병이 낫게 될 것이라는(If I may touch but his clothes, I shall be
whole) 믿음은 누구나가 가질 수 없는 믿음이지요.
아마도 여러분은 이 여인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으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감응
(感應)이 오지 않을 겁니다.
하여 그 당시 시대상황을 제대로 알기위해 구약에 언급되어있는 혈루병에 대한 이야기를 잠
시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
한 자라(레15:2)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ay unto them, When any man hath a running
issue out of his flesh, because of his issue he is unclean.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
까지 부정할 것이요(레15:19)
And if a woman have an issue, and her issue in her flesh be blood, she shall be
put apart seven days: and whosoever toucheth her shall be unclean until the even.
무릇 그 유출이 있는 날 동안에 그의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무릇 그
의 앉는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의 부정과 같으니(15:26)
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15:27)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레15:31)
"`You must keep the Israelites separate from things that make them unclean, so
they will not die in their uncleanness for defiling my dwelling place, which is
among them.'"
시간관계상 간단하게 몇 구절만 옮겨왔습니다.
례위기 15장 전체의 내용은 모세가 이스라엘백성에게 정해준 규례(規例)중 한가지인데 몸에
이상한 징후가 일어난 사람들이 취해야할 행동입니다.
유출병이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혈루 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혈루증은 유출병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출병에 해당되는 영어는 한단어가 아니라 아래와 같이 이렇게 깁니다.
any man hath a running issue out of his flesh
무엇이든지 몸 밖으로 흘러내리는 병을 가진 사람 모두가 유출병에 걸린 이라는 말입니다.
코를 흘린다던지 침을 흘린다던지 하여간 몸에서 뭔가를 밖으로 흘리는 병이지요.
그래서 19절에 유출되는 것이 피면(And if a woman have an issue, and her issue in
her flesh be blood) 하고 전제조건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닐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혈루증과 유출병을 동일시하고 있기에
언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내용은 31절부터 나옵니다.
1절부터 30절까지 유출병에 걸린 사람과 그와 접촉한 이들이 지켜야할 규례를 모두 말해두
고서 이렇게 지켜야하는 이유가 여호와의 장막을 더럽히게 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 여호와의 장막이라 기록된 곳은 성전을 말합니다.
모세의 입을 통해 여호와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거주하는 곳(my dwelling place)이라
했으니 성전을 말하며 그들 가운데 있다 했으니(which is among them) 육신 안을 가리킨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각자의 몸 안에 성전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실임이 그러났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사람들 각자에게 성전이 있으며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살고 있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본인들이 모르고 있거나 깨우지 못했을 뿐 하나님을 담고 살아갑니다.
예문으로 올린 레위기의 내용을 보니 우리들이 잘못행동하면 여호와의 성전(my dwelling
place)을 더럽히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잘못 행동했기 때문에 성전이 더렵혀져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혈루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진 인물로 받아들여지는지
라 사람들이 접촉하기 꺼려하게 되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여인역시 사람들 뒤에 숨어서 몰래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
에 있었던 거지요.
이런 사람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일이며 예수님 옷을
만진다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모두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자면 유출을 하는 이를 만지는 것도 부정하고(19
절)눕는 침상과 앉는 자리조차 부정하며(26절) 심지어 이런 것을 만지는 이들까지도 부정하
다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으니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
겠습니까?
이러한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다음내용을 보시죠.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
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막5:30)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막5:31)
예수님은 자신의 치유능력이 나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누구인줄 안다는 말이지요.
다만 여인의 용기와 믿음을 보기위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보이기위해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제자들은 군중들이 에워싸 미는 중에 누가 손을 댄
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지요.
제자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쳐대는지라 특정한 한사람이 손대
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막5:32)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
대(막5:33)
32절을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듯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
다.
이러할 때 여인이 곧바로 엎드려 이실직고(以實直告)를 했지요.
어찌 보면 황당하게 여겨지거나 꾸민 것 같은 이 내용은 아주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사자성어를 아시는지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이 말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영적인겁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사이에는 이미 성전에 거하는 성령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서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성령이 감응하였으며 여인 또한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
님처럼 믿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법이라고 합니다.
이심전심은 불교에서 주로 쓰는 사자성어인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통을 전수할 때 일어난
일을 하나의 수행법으로 여기게 된 것이 이심전심법이라고 전합니다.
재미삼아 잠시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 지각을 한 제자 가섭에게 자리
의 반을 내어주어 함께 앉게 하신 이치와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몰랐지만 가섭만이알고서 미소를 지어 응답했던 일, 부처님께서 사라쌍수아래에서 돌아가실
때 임종의 시기를 놓쳐 늦게 도착한 가섭에서 두발을 내보이신 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
라고 합니다.
이모두가 내면으로 서로 통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혈루병 앓는 이 여인은 이미 예수님과 성령으로서 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찌어다(막5:34)
And he said unto her, Daughter, thy faith hath made thee whole; go in peace, and
be whole of thy plague.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내면의 성령이 깨어났다고 봐야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이 여인만큼은 아니어도 적지 않은 믿음을 가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직도 떠나지 않고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것만 보더라도 믿음이 없지는 않지요.
부디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삶에서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딸아 하고 불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위치에서 말한 동시에 여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한다
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으로서 연결되어있다는 말이며 그로인해 완전(be
whole of thy plague)해 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병이 나은 것을 말하고자함이 아닙니다.
완전해졌다했으니 구원을 받았으며 영생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내용을 예수님이 혈루병 환자를 낫게 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자세히 살펴보
니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지금당장 여러분에게 묻고자합니다.
여러분은 병이 낫는 것을 원합니까?
영생을 얻길 원합니까?
홀리(holy)한 나 홀로목사는 여러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것 일뿐 병을 낫게
하거나 돈이 생기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신다면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길 바랍니다.
예문을 통해 보았듯이 혈루병환자인 여인도 예수님 옷을 만질 때 자신의 병 낫기보다 구원
을 바랐습니다.(28절)
병이 낫게 된 것은 구원을 얻음으로서 생긴 보너스인 셈이지요.
이런 까닭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 왕국을 구하라는 말은 자신 안에 성전이 있음을 깨달아 알라는 말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살고계시니 우리 육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는 것이며 내 생활 모든 것을 보살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할 때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며 마음에 만족이 오고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지 않게 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거지요.
이것보다 더 크게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혈루병 앓던 여인은 이것을 얻은 겁니다.
아울러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레위기15장의 내용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규례이자
규범이며 모든 사람이 적용받아야할 내용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레위기를 잠시 보겠습니다.
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와(레15:32)
불결을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이니라(레
15:33)
예문을 보면 유출병이 있는 이와 성관계를 하거나 불결한 여인 및 유출병있는 이와 동침한
자에게 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적용해야할 규범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실 이러한 규례나 규범이 아니어도 병이 있는 환자라면 성생활을 피해야 마땅한 일입니
다.
어떤 질병이라도 성생활을 통해서 가장 빠르게 전염될 수 있으니까요.
하찮은 감기라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으니 당연히 격리되어야합니다.
그러고 보면 3500년 전의 모세는 참으로 지혜로운 인물입니다.
이제 혈루병 여인을 뒤로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
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막5:35)
While he yet spake, there came from the ruler of the synagogue's house certain
which said, Thy daughter is dead: why troublest thou the Master any further?
혈루병 앓던 여인에게 말씀하는 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만들지 말라고 했지요.
딸이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이 가봐야 쓸데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35절 서두에 아직 말씀하실 때에(While he yet spake)하고 기록한데는 이
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앞서 보았듯이 혈루병은 단순하게 혈루병이 아니었고 병이 낫는 것 또한 단순하게
육신의 병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지속하거나 규범을 어기게 되면 성전을 더럽히고 가리
는 꼴이 되는 것이며 그 결과 영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거지요.
아무래도 그냥 말해서는 부족할 것 같으니 관련 예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레15:31)
"`You must keep the Israelites separate from things that make them unclean, so
they will not die in their uncleanness for defiling my dwelling place, which is
among them.'"
이미 올렸던 예문이긴 하지만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 한 번 더 올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라는 대목에 해당하는 영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Israelites separate from things that make them unclean
직역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분리하라는 말입니다.
그이유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성전을 더럽혀서 하나님으로부터 가려져 죽게 될지도 모르
기 때문이지요.
여기에서의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이런 상황인지라 혈루병 앓는 여인이 병이 낫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이어지는 내용 또한 혈루병 여인이 구원을 얻게 된 과정과 동일선상에 있음으로 마가
는 연결고리의 의미로서 아직 말씀하실 때라고 서두에 말했던 겁니다.
나 홀로목사의 말이 참됨을 증명하는 구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함께 보시죠.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
시고(막5:36)
믿음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깨닫게 되는 대목인데 이 또한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
다.
우리가 믿음이 서지 않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내용은 말해줍니다.
바꾸어 말하면 두려움은 신의 속성인 빛으로부터 멀어짐이자 어둠속으로 들어섬이며 빛조차
어둡게 만들어버립니다.
과연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원하실지 다음내용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막5:37)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5:38)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막5:39)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 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5:40)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
어나라 하심이라(막5:41)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5:42)
And straightway the damsel arose, and walked; for she was of the age of twelve
years. And they were astonished with a great astonishment.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5:43)
이 내용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정말 죽은 소녀를 살리셨는지 아니면 뭔가 담겨진 뜻이 있는 것인지를 알
아보기 위해 숙고를 해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내용은 육(肉)이 죽고 영(靈)이 되살아남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
다.
이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똑같은 내용의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
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마9:18)
While he spake these things unto them, behold, there came a certain ruler, and
worshipped him, saying, My daughter is even now dead: but come and lay thy hand
upon her, and she shall live.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마9:23)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9:24)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마9:25)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9:26)
18절을 보면 어떤 직원이 와서(came a certain ruler) 자신의 딸이 금방 죽었다고 (My
daughter is even now dead)말하며 예수님께서 손만 얹으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지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굉장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럴 것 같으면 누군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길은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하나님법칙도 무너집니다.
인명(人名)은 재천(在天)이라 했는데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하늘의 뜻을 거스
르는 일이 됩니다.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렇게 말한 직원이(ruler)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줄 모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을 보면 교회당의 직원(the rulers of the synagogue)이라고 명시하고 있
지요.
이는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었음을 말하고자했음이며 영의 세상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
내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가는 마태복음의 내용을 알고서 복음서를 적었기 때문에 마태오의 심
중(心中)을 헤아렸던 겁니다.
그래서 똑같이 직원이라고 적지 않고 교회당의 직원이었다고 고쳐 적었던 거지요.
마가복음 서두에 직원의 이름이 야이로라고 기록했던 이유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야이로의 뜻은 하나님의 교화를 받다 이니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죽음과 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배웠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 내용이 죽은 사람을 육적으로 살린 것이 아니라 영의 부활을 말한다는 것을 마태
복음 9장26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한 것은 반어적(反語的)표현으로서 이 말씀이 비유의 말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모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스라엘 온 땅에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될는지요?
아마 그 당장 로마 황제로부터 이스라엘 고급관리들까지 예수님을 찾으려 혈안이 될 것이며
온 나라는 물론 멀리 해외에서까지 모시려고 난리를 피웠을 겁니다.
이 내용을 비유의 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마태복음에는 아이가 금방
죽었다고 했지만 마가복음에는 죽음에 이르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처럼 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말하면 더 이상 살릴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
함으로 좀 더 현실성 있게 만들려고 살아있었다고 고쳤던 거지요.
우리가 또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할 대목은 마가복음 5장 39절과 마태복음 9장 24절입니다.
두 복음서 공히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말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영생을 얻은 사람의 인식으로는 죽음이란 잠드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
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잠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죽음너머에 있는 영생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영원히 잠들게 되며 심할 경우 영벌에 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나 홀로목사의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할 거라 여겨지는바 한 가지 덧붙여
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곧 눈을 들어 마가복음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에는 없는 내용으로 소녀의 나이가 12살 이었다는 대목이 보일 겁니다.
왜 하필이면 12라는 숫자를 썼을까요?
성경에는 많은 숫자들이 있는데 기록된 숫자마다 담긴 뜻이 있습니다.
3은 아시다시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뜻하며 4는 피조물의 숫자입니다.
따라서 3과 4의 곱한 수 12는 인간과 신의 완전한 연합으로 나눌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3
과4는 곱할 수는 있어도 나눌 수는 없음)
이러한 의미로 마가는 아이의 나이가 12살이 되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비유해 놓은 거지요.
마태오의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마가는 아주 지혜로운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군가 이 내용을 비유의 말로 헤아리지 못하고 액면그대로를 받아들일 경우에는 아주 심각
한 오류에 부딪쳐야합니다.
똑같은 내용이 이복음서와 저 복음서가 다른 것을 두고 의견이 분분해질 것이 분명하며 나
아가서는 성경을 불신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목회자들 중 80% 이상이 하나님이 실존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만 보더라
도 이들이 얼마나 성경을 불신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다시피하는 목사님들이 성경의 모순점을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다들 자신들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이유는 목회가 그들의 업이 되어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먹고 살기위한 방편으로 목회를 하기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겁
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성경은 액면그대로를 봐야하는 것이 아니라 담겨진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합니다.
무조건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외쳐 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가르
침을 받아들여야할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아야 우리들이 우상숭
배의 대열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영생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믿는 척 하나 속으로는 불신하는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위선자)들이
라 말씀하셨지요.
사실 이러한 점은 타종교인들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도인들조차 성경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불신합니다.
액면의 내용만으로 해석하여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가하면 심지어 성경이 조작되었다는
말까지 하지요.
이모두가 자신들이 충분히 지혜롭지 못한 가운데 성경을 읽거나 타인의 생각을 따랐기 때문
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끔씩 성경 내용에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다행스럽게 여기
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손을 댄 이들이 성경에 기록된 깊은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 홀로목사는 점점 더 성경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갈수록 사명감이 생기고 삶의 활력을 배가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들이 있기에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영생의 여정에 걸림돌이 없이 원할 할 것을 기원하며 오늘시간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