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를 움직이는 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요.
때로 신은 나를 통해 역사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통해 역사하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기는 하지만 육신의 습관은 신 의식을 가립니다.
그럴 때면 신은 어김없이 상대방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조금 더 솔직히 말을 하자면 어떤 일에 대한 판단여부가 내 이익과 연관이 있을 때는 육신이 에고를 부리게 되고 상대편과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한 점을 피하려면 상대편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 일이 영적인 일이라면 결코 양보하지 않겠지만 육적이고 물질적인 일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양보가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 경우에는 투쟁을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 성경은 어김없이 길을 제시해줍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seeketh not her own, is 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고린도전서 13장 내용은 성령에 대한 가르침으로 우리가 성령을 담고 살아가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자신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Doth not behave itself unseemly)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했지요.(seeketh not her own)
이 말씀은 성령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으며 우리 안에 머물고 있는 동시에 세상전체를 통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볼썽사납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일로 품위를 떨어트리거나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한 못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쉽게 화를 내거나 악한생각을 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성령이 육신에 담겨있기에 감정적으로 화를 내지 않거나 악한생각을 않을 수는 없지만 쉽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not easily provoked, thinketh no evil)
이 말씀이 간단하고 쉬울 것 같지만 막상 삶에서 실천해보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화를 내기는 하지만 얼마만큼 참아야하는지의 기준이 애매하고 악한생각의 기준도 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뭔가 확실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기준을 정하려면 삶의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하며 구도자의 목적지는 영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동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영생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이 영생에 부합하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화를 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악한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영생을 위한 어떤 행위도 정의로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성경말씀은 우리 삶에서 실현되는 겁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Trust in the LORD with all thine heart; and lean not unto thine own understanding.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내재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 해도 여기에 대한 명확한 길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내 생각(에고)에서 나오는 것인지 신의 음성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영생을 목적으로 삼아야한다는 말이며 내 이익을 구하거나 무례하지 않아야한다 말하는 겁니다.
나의 신구의(身口意)가 영생을 위한 것이 되었을 때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음으로 본능으로부터 자유롭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성령을 깨닫게 되면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상대방을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성령을 깨닫게 되면 육신적으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해 성령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완전해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내 것만 고집하지 않고 내 생각만 고집하지 않으며 내행동만이 정의롭다 말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 몸이 우주를 담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며 만물동일체라는 말도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불어 살아야한다 말하는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살아가기란 여간 어렵지 않지만 목적이 뚜렷하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상대방과 언쟁을 하더라도 영생에 부합한지를 살펴보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며 성냄과 다툼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불과 얼마 남지도 않은 세월을 감정싸움에 허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득 없는 행위이지만 영생을 위한 진통이라면 얼마든지 해야 합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이며 영생을 위한 그 어떤 행위도 정의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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