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간에 금슬이 좋을 때는 서로 칭찬을 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당신이라는 말은 기본이고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조차 당신 때문이라는 말도 쏟아냅니다.
이럴 때면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높입니다.
당신을 만난건 아마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인가 보다 말하지요.
그러다가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고나면 말이 달라집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다는 당신은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둘도 없이 악한 당신만이 존재합니다.
어쩌다가 내가 저런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났나 하지요.
게다가 몇 번이나 구한나라가 갑자기 팔아먹은 것으로 바뀝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죄가 있지 않고서는 어떻게 저런 인간을 만났겠는가 합니다.
조금 전까지 하늘의 축복을 노래하며 사랑가를 부르던 사람이 하늘이 퍼붓는 저주아래 몸을 노출시킨 채 짐승처럼 울부짖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이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상대방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 한순간에 터져 나옵니다.
이럴 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으며 과거에 케케묵은 감정의 찌꺼기까지 끄집어내어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이미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한 과거일 조차 들추어내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위해 노력하지요.
어떤 경우에는 몇날며칠을 두고 싸우기도 하는데 어제 못다 한 말을 생각해놓았다가 퍼붓기도 하며 끝내는 이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사실 부부싸움이라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서로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잘했건 여자가 잘했건 우쭐거릴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포용과 이해로서 감싸준다면 구태여 싸우고 헤어질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자랑하는 이는 팔불출 중에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아주 성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때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는 겁니다.
온 세상을 향해 우리가 결혼하노라 선언하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생활을 하는 동안 싸움을 하지 않는 커플은 없습니다.
반드시 부부가 아니어도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다툼이 일어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렇게 다툼이 일어나는 건지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툼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태어난 목적에 대한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태어난 목적이 육신적으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게 되면 다툼과 반목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물질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수컷의 본능에 충실하게 되고 여성은 암컷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영생이 목적이 되게 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가 못 다한 공부를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업장해소를 위한 것이 됩니다.
특히 부부싸움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살아가는 동안 신구의(身口意)로서 죄를 짓기 마련이지요.
내가 아는 바에는 그래도 뉘우침이 가능하지만 나도 모르게 몸짓이나 말, 또는 생각으로 죄를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런 죄를 씻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그 역할을 담당해야합니다.
만약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얼토당토않게 나를 단죄한다면 가만히 두들겨 맞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해가며 나를 나무랄 사람은 배우자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참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쉽게 화를 내거나 맞대응하는 일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육적으로 보자면 말이 안 되는 일도 영적으로 보자면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아주 중요한 뜻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요.
이처럼 인생에 있어서 목적을 설정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영생을 목적으로 삼게 되면 이 땅에서는 평화가 주어지고 하늘에서는 영광이 주어질 겁니다.
반대로 세상 것에 목적을 두게 되면 사는 동안 걱정근심이 끊이지 않고 고해(苦海)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영혼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 영적인 길을 선택했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걷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만족을 얻었고 영적으로도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이정도면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지요.
나를 아는 이 가운데 아직도 영적인 길을 걷지 않는 분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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